- 원시 잡림만 가득했던 연해주의 깊은 산중 분지 추풍(秋風).
- 한 접시의 식량을 얻기 위해 자식까지 팔 정도로 궁핍했던 한인들에게 이 땅은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한인 10여 가구가 시작한 개척 작업은 30년 만에 척박한 땅을 남부 우수리의 곡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러시아인 마을로 변모한 추풍4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코르사코프카 마을 입구
이 지역은 러시아 최대의 한인거주지였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곡창지대라 할 만큼 근면한 한인들에 의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곳이다. 또 한편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 산골에 위치한 숱한 빈농마을들은 시베리아 내전기에 항일 무장독립군과 빨치산부대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를 비롯한 발해사연구자들은 우수리스크를 발해 15부(府)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와 추풍이라고 불리는 그 서쪽 일대에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수이푼강의 명칭이 바로 ‘솔빈(率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여하튼 수이푼은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말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이후 몇몇 러시아 지도에 ‘수이펜헤(Suifen’khe)로 기재되었는데, ‘수분하(隋分河)의 중국식 전사(轉寫)를 반영한 것이다.
또 발해인을 비롯해 만주지역 민족들의 오랜 역사적 연고지이기도 한 우수리스크에는 발해 때 축조된 남성(南城)과 금나라 때 축조된 서성(西城) 등 두 개 성터가 있다. 이 곳은 청나라 때는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리기도 했고, 송나라에서는 황제가 구금됐던 곳이라는 의미로 ‘송황령(宋皇嶺)’ ‘송왕령(宋王嶺)’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현재의 우수리스크는 1866년 러시아 아스트라한주(州)로부터 이주한 농민들이 수이푼강의 지류인 라코브카(Rechka Rakovka)강 하구의 강변에 니콜스코예마을(Derevnaia Nikol’skoe)을 형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니콜스코예는 1898년 4월 시(市)로 승격됨과 동시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개칭됐다. 그리고 1935년 스탈린의 측근인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Kliment Efimovich Voroshilov)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로 개칭됐다. 이같은 명칭변경은 1929년 ‘동중철도사건’의 영웅 원동특립군사령관 부류헤르(Vasily Konstatinovich Blucher) 등의 러시아 원동지역 지도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일본군의 만행 4월참변
스탈린 사후인 1957년 보로실로프는 다시 현재의 우수리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수리스크는 서북쪽으로 북만주를 가로질러 통하는 동중철도(東中鐵道)와 북쪽으로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되는 우수리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우수리스크 시내로 들어선 조사단은 우선 한인협회(칼리니나 거리 35번지)를 찾았다. 협회건물의 간판이 흥미를 끌었다. 맨 위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이 돔(Koreiskii Dom),’ 그 아래에 식당이라는 뜻의 ‘Kafe’, 그리고 맨 아래에 한자로 ‘韓國食堂’이라 써놓고 있었다. 이 건물은 우수리스크지방 고려인들의 민족교육, 언론, 문화의 센타로 활용되고 있는데 우수리고려민족문화자치회와 고려학교, 동북아평화연대 우수리스크 사무소, 원동신문사, 라디오방송국이 들어서 있다.
조사단 일행은 추풍4사(秋風四社)로 불렸던, 우수리스크시 서쪽 일대 강유역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4개의 한인마을인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크로우노브카(Krounovka), 푸칠로브카(Putsilovka), 시넬리니코보(Sinel’nikovo)를 찾아 나섰다.
우수리스크에서 노니콜스크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가 나타난다. 이 추모비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4월참변 당시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병사 170명과 빨치산 70명 등 총240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바로 그 전투현장에 세워져 있다. 4월참변이란 1920년 4월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스파스코에, 하바로프스크, 포세트, 스챤 등 연해주 각지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연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공공기관과 러시아 혁명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50명을 무장해제하고 한인단체사무소와 가택을 수색해 60여 명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헌병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창설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한인 76명을 검거하고 4월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인 최재형을 비롯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저명한 한인지도자 4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추풍4사 가운데 그 형성과정에 관해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푸칠로브카마을이다. 1895년에 추풍지대 한인마을을 조사한 러시아지리학회 아무르지부 학자들은 푸칠로브카마을의 사제와 오랜 주민들의 얘기를 바탕으로 푸칠로브카마을의 형성과정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1867년에 ‘최’라는 성을 가진 한 한인이 동네사람의 부탁으로 러시아지방을 다녀오기로 했다(러시아 학자가 말하는 최씨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를 개척한 최운보(崔運寶)가 아닌가 한다). 최씨의 여행목적은 러시아지방 가운데 궁핍한 농민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없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포세트, 니콜스크예 등 남부 우수리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을 둘러보았다. 최씨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남부 우수리지방의 생활과 농업상의 조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경흥의 궁핍한 농민들 150가구가 당국의 허가 없이 포세트구역의 연추마을로 무단 이주를 감행했는데, 이곳에는 이미 30가구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연추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2개월, 그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을 고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러시아 학자는 이들이 겪었을 궁핍상에 대해 “잘 알려진 것처럼 자기 가족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한인들이 겨우 몇 접시의 식량을 얻기 위해 처와 자식들을 판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충분하다고 썼다.
3개월이 지난 후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추마을에 남았고, 나머지 한인들은 연추마을을 떠나 블라디스토크로 향했다.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868년 3월의 일. 1개월 후 몇 가구는 이곳에 남았고, 나머지는 행정당국의 허가를 받아 기선을 타고 라즈돌리노예역(하마탕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정착지를 특별 할당해줄 것을 러시아당국에 청원했다. 이에 연해주당국은 수이푼강의 오른쪽 분지를 할당하기로 하고 관리 푸칠로(Putsillo)를 파견했다. 라즈돌리노예에 온 지 8개월 만이었다. 다시 일부는 라즈돌리노예에 정착하기 위해 남고, 나머지 가구들이 푸칠로를 따라 수이푼강의 지류인 류치헤자강(Rechka Liuchikheza, 현재의 카자취카강 Rechka Kazachka) 오른편 분지에 정착했다.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서쪽으로 25베르스타(약 26km)에 위치한 최초의 한인마을은 이 러시아 관리 푸칠로의 이름을 따서 ‘푸칠로브카’라고 하였다. 1869년 4월의 일이다. 한인들은 푸칠로브카마을을 육성촌(六城村)이라고 했는데, 마을 옆의 강 이름 즉, 바로 ‘6개의 지류를 가진 강’이란 뜻의 류치헤자(六?河子)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한인가구는 10가구였다. 이들은 배치되자마자, 중국식과 조선식을 모방해 거처할 집과 다른 용도의 건물들을 지었다. 그러나 원래 푸칠로브카마을이 들어선 분지는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잡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황무지였다. 그러던 것을 이주한인들이 매년 분지를 뒤덮고 있는 삼림들을 베어낸 결과 몇 년 만에 오래된 참나무 몇 그루를 빼놓고 15∼16베르스타(16∼17km)에 달하는 분지를 덮고 있던 삼림이 사라졌다.
일단 거처할 집을 마련한 뒤 정착민들에게 절박했던 것은 일용할 식량이었다. 이들은 소, 말과 같은 가축이나 주요한 농기구조차 없어 몇 안 되는 목재나 철제의 호미와 도끼를 갖고 거의 맨손으로 땅을 일궈 채소와 곡식을 파종할 밭을 마련했다. 이들은 조, 감자, 옥수수를 심었는데 종자는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다음해인 1870년 러시아당국은 땅의 경작을 위한 경작용 소 한 쌍을 푸칠로브카마을에 제공해 더 많은 땅을 개간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당국은 이와 함께 파종용 종자를 구입할 수 있도록 은화 30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 돈으로 농민들은 국경지대의 중국마을인 산차거우(三?口)의 중국인들로부터 종자를 구입했다.
자국민처럼 보호해준 러시아정부
러시아당국은 또한 당시 수이푼강 일대를 횡행하고 있던 홍후즈(紅?賊, 붉은 수염을 한 중국인 마적)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2개의 권총을 줬다. 가을이 되자 푸칠로브카마을 한인들은 수확한 농작물 중 일부를 자급용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산차거우의 중국인들에게 팔았다. 푸칠로브카마을의 농민들은 곡식을 판 자금으로 소와 말을 사 기르고 이를 위한 축사를 마련했고, 고난의 3∼4년을 거친 후에는 제법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이들 한인들은 두고 온 국내의 고향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안정된 생활소식을 전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매우 좋다. 식량이 풍부하고 러시아정부는 자국민처럼 도와주고 보호해주며 애정으로 받아들여 비옥한 토지를 주었다. 때문에 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와도 상관없을 정도이다”라고.
이로 인해 푸칠로브카마을의 주민수는 늘어났다. 1869년 정착 당시 10가구에 불과했던 것이 1년 만에 70가구로 늘어났고, 이후 새로운 이주자들이 계속 증가하면서 강의 양쪽에 4개의 촌락군이 형성됐다. 류치헤자강의 가장 서쪽, 즉 상류지역에 위치한 상소(上所)로 부터 동쪽으로 중소(中所), 관소(官所), 하소(下所)로 불려졌다. 1878년에는 측량기사가 파견되어 푸칠로브카마을과 다른 한인마을들 간의 경계가 지어졌다.
추풍4사의 형성과정이나 주민들의 생활조건은 시넬리니코보마을이 다른 3개 마을보다 3년 늦은 1872년에 형성된 점을 빼놓고는 하나의 조합으로 말해도 좋을 만큼 거의 같다. 푸칠로브카마을외의 다른 3개 마을의 위치를 니콜스코예마을, 즉 후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코르사코프카마을은 한인들이 한자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하거우(河口)’라 불렀던 마을이다. 코르사코프카마을은 우수리스크에서 수이푼강과 갈라지는 수이푼강의 가장 큰 지류인 쉬우판강(Rechka Shufan, 현재의 보리소브카강 Rechka Borisovka) 분지의 강상류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km) 떨어진 거리이다.
크로우노브카마을은 한인들이 한자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황거우’라 불렀는데 본래의 중국식 표기인 ‘황구(黃溝)’ 또는 발음대로 표기해 ‘황거우(黃巨隅)’라 하기도 했다. 이 마을은 쉬우판강의 지류인 자피거우강(夾皮溝江, 현재의 크로우노브카강 Rechka Krounovka)가에 자리잡았는데, 코르사코프카마을로부터 서남쪽으로 6베르스타(약 6km)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넬리니코보마을은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40베르스타(약42km) 떨어진 수이푼강 상류의 강 양쪽에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이북에 위치했던 마을이 ‘첫번째 시넬리니코보마을’이라는 뜻의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Pervoe Sinel’nikovo), 강이남에 위치했던 마을이 ‘두번째 시넬리니코보마을’이란 뜻의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Vtoroe Sinel’nikovo)’이다. 한인들은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을 용산동이라고도 불렀다. 시넬리니코보마을 주변의 수이푼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한인들은 영안평(永安坪), 대전자(大甸子) 또는 대지안현(大地安峴)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영안평 또는 대전자는 두 개의 시넬리니코보마을과 한인들이 ‘영안평 남숭전’이라고 불렀던 포크로브카(Pokrovka)마을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정부의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0년대 중반 추풍일대를 방문하고 1885년경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서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제외한 추풍3사의 형세와 규모가 기록돼 있다. 이들 추풍3사는 공통적으로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동서로는 들을 끼고 있는 형세였다. 추풍4사의 규모를 보면, 푸칠로브카마을 274호 2827명, 시넬리니코보마을 237호 2673명, 코르사코프카마을 229호 1569명 순이었다. 이들 조선관리들이 이보다 2, 3년 앞서 조사하고 작성한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는 추풍3사와 함께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추풍3사의 형세와는 달리 동서 7리, 남북 4∼5리이며 주민수는 90여 호였다고 한다. 이로써 1880년대 전반에 이르러 이미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마을과 시넬리니코보마을이 연해주의 한인마을 가운데 1, 2위를 다투는 대규모 마을로 성장해 있었고, 코르사코프카마을 역시 앞서 형성된 지신허마을(236호 1665명), 연추마을(237호 1623명)에 이어 5번째로 큰 마을로 성장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부 우수리의 곡창
1895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러시아 지리학자는 이들 추풍4사를 한마디로 “남부 우수리지방의 곡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함경도 국경지방의 빈농들에 의하여 개척된 추풍4사는 연해주지역에 주요 식량과 채소를 공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윤택한 농촌으로 성장해 있었다.
추풍지역에는 러시아정교회가 들어섰는데 1895년경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 시넬리니코보, 코르사코프카의 3개 마을에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고, 크로우노브카에는 큰 기도소가 있어서 가까운 코르사코프카의 정교회 사제가 2주에 한번씩 와서 예배를 주재했다. 1894년 당시 연해주 전체의 32개 한인마을에 총 4개의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3개가 추풍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개 교회는 남부 연해주의 연추마을에 있던 교회로 22개 한인마을을 관할했다. 더욱이 연해주 동남방에 위치한 스찬지역(3개의 한인마을)이나 내륙지방인 북부 우수리지역(2개 한인마을)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이처럼 러시아정교회는 추풍지방에 편중돼 있었고, 교회마다 1명의 사제 겸 선교사가 있었던 관계로 추풍지역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학자들은 추풍지역 노인들의 말을 빌려 불과 3년 만에 러시아정교회식 혼례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의 한 러시아인의 집 주춧돌로 쓰인 연자방아 맷돌.
추풍4사는 원호인촌
한인들이 추풍이라고 할 때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쪽의 광활한 농업지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일대 즉 수이푼강과 그 지류 유역에 산재해 있던 한인부락들을 총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따라서 추풍4사는 추풍 일대의 대표적인 4개 한인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러시아국적을 취득한 이른바 원호인(原戶人)들의 마을이었다. 이와 달리 러시아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른바 여호인(餘戶人)들은 카자크부대나 러시아인 지주 소유의 토지를 소작해 경작하며 살기도 했다. 전자의 카자크부대 주둔지 마을로는 시넬리니코보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간 수이푼강의 최상류지역으로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콘스탄친노브스키이(Konstantinnovskii)나 폴타브스카야(Poltavskaia)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콘스탄친노브스키이는 1906년 당시 한인 83가구 300명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또 러시아인 지주의 토지에 정착해 살았던 마을로는 수이푼강과 류치헤자강 사이의 분지에 위치했던 보리소브카(Borisovka)마을과 크로우노브카마을 남쪽 쉬우판강 상류지역에 위치했던 야코노브카(Iakonovka)마을, 그리고 크로우노브카 서남쪽 상류지역에 위치했던 프로콥스브카(Prokop’svka) 등이 있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에 인접한 자피거우강(Rechka Chapigou)마을은 전형적인 여호인촌이었다. 여호인촌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접경지대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자피거우마을외에도 시베창(西比廠 또는 西北倉,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남쪽 10리), 다쟈골(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4리), 솔밭관(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10리), 타보오프(니콜스크-우수리스크 동북방 3리 반) 등이 형성돼 시베리아 내전시기에 주요한 항일무장세력이나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됐다.
한인들의 골칫거리 홍후즈
러시아 한인역사에서 초기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골치 아픈 존재가 바로 홍후즈이다. 만주지역의 마적에 해당하는 홍후즈는 훌륭한 학위논문의 주제로 손색이 없을 만큼 크게는 동북아시아 역사에, 그리고 작게는 우리 한인이민역사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존재였다. 홍후즈는 포세트, 수이푼, 스찬, 아누치노 등 한인들이 사는 연해주의 모든 지역에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혔다. 적어도 1922년 시베리아 내전이 끝나 공산주의정권이 등장해 지방치안을 확립될 때까지는 그랬다. 추풍 일대에 초기 한인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홍후즈는 어김없이 등장해 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간 약탈자였다.
초기 한인정착민들이 얼마간의 재산을 갖게 된 것을 알아차린 홍후즈는 무리를 지어 한인마을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손에 걸려드는 것이면 현금, 식량, 채소, 의류, 가축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약탈해갔다. 어느 때는 남녀와 아이들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출현하는 홍후즈들의 공격에 한인 농민들은 무방비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여 모은 재산을 일시에 홍후즈에게 넘겨주고 구차한 생명만이라도 구하고자 관목숲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에 추풍4사의 한인들은 니콜스코예 수비대가 홍후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도록 군초소를 설치해줄 것을 러시아관청에 청원했다. 그 결과 푸칠로브카마을에 20명이 주둔하는 군초소가 설치되고, 1878년에는 모든 한인마을들이 매달려 중대 규모의 부대가 체류할 수 있는 군막사를 짓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1882년경에는 절도 등 아주 사소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추풍 일대에서 홍후즈의 습격은 거의 멎어 푸칠로브카마을에만 7명의 군인들이 잠시 동안 머물곤 했다. 1884년에는 러시아관청의 명령으로 이전의 군막사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가 개설되어 추풍4사의 사무를 관장토록 했다. 2년 후인 1886년에는 한인들의 요청에 따라 ‘추풍 한인회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마을로 이전했고, 이어 1892년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 읍청으로 바뀌어 러시아 지방행정체계에 부속됐다.
코르사코프카의 김원석옹
조사단은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를 떠난 지 10분 만에 코르사코프카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표지판에는 마을 명칭과 함께 마을이 1869년에 형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1869년 한인이주민들이 개척했던 코르사코프카마을은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완연한 러시아마을로 변모했다. 우리 일행이 코르사코프카마을을 찾은 것은 추풍4사 가운데 하나라는 점 외에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자피거우 마을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자피거우마을은 부유한 원호인들이 집결해 살았던 추풍4사와는 달리 외진 산골에 위치한 빈곤한 여호촌으로 항일무장세력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특히 조사단의 일원인 의병연구가 박민영 박사를 비롯한 국내학자들은 이 자피거우를 13도의군의 결성지로 파악하고 있었다. 박박사 등은 의암 유인석 선생의 연보에 13도의군의 결성장소로 기록되어 있는 재구(梓溝)를 ‘자피거우(夾皮溝, Chapigou 또는 Tsziapigou)’의 음역(音譯)이라고 보고, 추풍지방의 한인마을 자피거우로 추정해왔던 것이다(필자는 신동아 9월호에 게재한 기고문에 13도의군 결성지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자피거우마을은 1920년 초 강국모 등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血誠團)이 1920년 말까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사단은 나이 많은 러시아 여자의 안내로 자피거우 마을터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고려인 노인을 찾아갔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노인의 이름은 김원석(金元石)으로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하리토노비치(Nikolai Haritonovich)이다. 김원석옹은 192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동북쪽에 있었던 한인마을 진불(眞佛, Timpur) 출신이었다. 진불마을은 동북쪽 우수리만의 서쪽 해안에 위치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불과 2∼3리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점차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1921년경에는 12개 마을 300가구가 35리에 걸쳐 형성됐다. 김옹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1953년 러시아의 로스토프로, 그리고 다시 1970년에 코르사코프카로 이주해왔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재의 조선교육전문학교를 다녔고 1937년 강제이주 직전에 졸업한 인텔리였다.
한인사회주의 이론가 박진순
조사단은 김옹으로부터 강제이주 이전의 한인사회에 관한 풍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직접 만났거나 알고 있었던 한인사회 지도자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이동휘, 박진순, 홍범도, 계봉우, 김규면, 김하석, 이제, 한명세, 오창환, 박영, 최호림, 김준, 박세르게이 등에 관한 단편적이지만 가족관계를 비롯해 문헌에서 볼 수 없는 값진 증언들을 해주었다.
필자를 특히 감동시켰던 것은 김옹이 박진순(Ivan Petrovich)의 사위라는 사실이었다. 박진순은 ‘강동지방(江東, 연해주지방의 다른 칭호)의 신동’으로 유명했고 1920년 제2차 국제공산당대회서 원동집행위원으로 선출돼 1921년 11월 이동휘를 단장으로 하는 고려공산당대표단의 일원으로 레닌을 면담했던 초기 한인사회주의운동의 이론가였다.김옹은 부인인 박진순의 딸 박엘레나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찌무르)와 세 딸(루바, 루다, 라리사)을 두었다. 박진순과 부인 김올가 사이에는 엘레나 외에 아들 하나(김알렉산드르)가 있었는데, 타지크스탄에서 사망했으며, 엘레나 역시 1950년에 사망했다.
며칠 후에 우리가 박진순의 출생지인 스찬지역(현재의 빨치산스크지역)의 신영동(니콜라예브카)을 답사하였을 때, 현지 고려인이 신영동을 개척한 김공심(니콜라이)의 외동딸이 박진순의 부인 김올가라는 증언을 했으나 동행했던 김옹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필자는 아직 이 증언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김옹은 박진순이 사용하던 러시아역 한화자전(漢和字典)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1908년도 판인 이 자전에는 “冊主 朴鎭淳”이라고 써 있는데 박진순의 친필이라고 했다. 김옹이 이 자전을 물려받게 된 것은 그가 1948년에 모스크바에 가서 박진순의 두번째 부인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유태인이었던 박진순의 두 번째 부인은 “자네는 조선글을 아니 이 자전을 자네에게 준다”며 건네주었다는 것.
김옹은 스찬지역의 여러 한인마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필자가 궁금해 마지않았던 스찬(水淸)지역의 한인마을들 가운데 다우지미(大烏吉密), 우지미(烏吉密, 두쉬키나), 청류애(淸流涯, 가이다막), 동개터(나홋트카) 등 한인마을들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박3일에 걸친 스찬지역 한인마을터 조사에 동행해달라는 요청에 ‘공부는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며 흔쾌히 따라나섰다. 우리가 폐허화되거나 러시아마을로 변해버린 이들 한인마을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옹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다.
코르사코프카마을로부터 불과 6km 거리에 있는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찾았다. 김옹은 이 마을에 다차(주말농장)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아이들의 안내로 마을 입구에서 대형 연자방아 아랫맷돌을 발견했으며, 김옹의 안내로 마을 중심부(소베트스카야 울리챠와 폴타프스카야 울리챠)에서 주택의 기둥을 고이는 받침으로 쓰여지고 있는 또 다른 맷돌을 찾을 수 있었다. 맷돌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 지역 농업생산력의 수준을 짐작케 했다.
우리는 서둘러 푸칠로브카마을로 향했다. 이곳 옛 학교 건물에서는 여전히 11학년제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길 양편으로 갈라져 있는데, 붉은 벽돌 건물에서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 길 건너편의 시멘트 벽돌 건물에서는 5학년부터 11학년까지가 공부한다고 했다. 붉은벽돌건물이 있는 학교 뜰 구석에는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아랫받침맷돌 3개와 위 굴림돌 1개가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에서 보았던 맷돌보다 크기가 작았다. 학교에서 여교사가 나와 우리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녀는 이곳에 110년 전 화훼학교가 있었고 몇 년 전에는 북한사람들이 와서 유명했던 한인교사(카프 작가 조명희를 말하는 듯)를 주제로 한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촬영해 갔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 마을의 한인들이 1920년도에 러시아 빨치산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 교사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본군이 출병한 1918년 이후 푸칠로브카마을에는 일본군수비대가 주둔해 있었고, 이들은 부호 원호인들의 요청으로 주변의 여호인 빈농마을을 근거로 해 활약하던 한인들의 항일무장부대들에 대한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1919년에서 1922년에 이르는 시베리아 내전기라고 하는 일종의 계급전쟁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내부적으로는 원호인과 여호인 간의 계급적 갈등 양상이 중첩돼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넬리니코보마을로 향했다. 이마을은 한국학계에서는 우리 조사단이 처음으로 답사하게 되는 것이다. 푸칠로브카로부터 서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Sinel’nikovo II)마을’이 나타난다. 우리 일행은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고려인 부자(父子)를 만났다. 이른바 고봉질을 하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의 안내로 밭 귀퉁이에 놓여져 있는 큰 연자방아 맷돌 한 짝을 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마을’과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다면, 우리는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로 곧바로 건너갈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을 나와 동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포크로브카(Pokrovka)를 거쳐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가야 했다. 바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이웃마을을 21킬로미터를 ‘ㄷ’자로 돌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마치 남북이 갈린 듯한 우리민족의 형편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먼저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마을’에서 우리는 아무런 한인유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 창당의 산파역할을 했던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어보았다.
추풍4사는 원호인 출신의 한인부농들의 본거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힘을 배경으로 러시아 한인사회를 주도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러시아혁명 격동기에 반(反) 볼셰비키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고 일부는 백위파 그리고 이를 후원하는 일본출병군에 협력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대로 추풍 산간지방에는 한인무장부대들이 결성되어 반백위파=반일적 무장투쟁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추풍지역의 한인사회는 다른 지역보다 한층 격렬한 계급투쟁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1928∼29년에 개시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화’ ‘토호척결’ ‘당청결’의 와중에서 이들 추풍4사의 원호인 부호들은 척결의 대상이 됐다.
소멸된 마을은 대부분 여호인촌
1937년의 한인강제이주로 추풍지역에서 소멸된 한인마을은 문헌상으로만도 적어도 80여 개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산악국경지대 산골에 위치했던 이른바 여호인촌들이었다. 이에 비해 이민 초기에 추풍일대를 개척하였던 원호인들이 건설한 추풍4사는 수이푼강 유역의 광활한 들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추풍4사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한인들이 떠난 이후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이제는 완연한 러시아마을로 변모했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한인들이 살았던 추풍4사는 그만큼 관개와 교통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인데 이를 맨손으로 개척하고 가꿨던 이들은 고려인의 조상인 억척스런 함경도 농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