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제3대 대통령을 지낸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그는 계몽주의 속에서 실용주의를 도모했고, 유럽에 심취하면서 서부와 인디언을 흠모했고, 자유와 천부인권의 사도임을 부르짖으면서 노예를 부렸다. 이런 양면성은 포용과 실용이라는 미국적 계몽주의로 승화했고, 이는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꾸민 집 ‘몬티첼로’에 집약돼 있다.
버지니아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의 2층집 ‘몬티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사회적 다양성 그 자체가 어쩌면 미국의 역사적 현실을 추상적 이념태(態)에 의탁해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미국의 국민적 정체성은 역사적 경험의 공유보다는 미국적 이념과 가치에 대한 동의에서 생겨 나온다. 미국에서는 출생이 문제되지 않는다.
신분과 계층, 종족과 인종에 상관없이 미국적 이념을 받아들이면 미국인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정치학자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은 미국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이념 원소로 자유, 평등주의, 개인주의, 대중주의, 자유방임의 다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미국사는 말하자면 이 다섯 이념으로 구축된 좌표 속에서 전개돼왔다는 것이다.
건국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미국사를 이런 추상적 이념의 전개 과정으로 파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이다. 독립혁명기의 시대적 여망을 담아 그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이런 이념들에 계도되지 않는 사회적 삶은 타기해 마땅하다’고 천명함으로써 미국의 분리 독립을 정당화했고, 건국과 더불어 거기에 표명된 이념, 특히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에 집약된 이념은, 나라의 근본을 밝힌 국시(國是)로 자리잡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상상태의 원천이 됐다.
제퍼슨은 자신이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요,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제안자’요, ‘버지니아 대학의 창설자’로 후세에 기억되길 희망했다. 버지니아의회 의원, 대륙회의 대표, 주지사, 프랑스 전권공사, 국무장관, 부통령,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정치 이력보다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한 철학자요 교육자로서의 업적을 더 의미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 이념’의 창안자
미국사회가 나아갈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고 그것에 입각한 단순명료한 역사적 상상력을 고취한 주인공이지만, 정작 제퍼슨 자신은 대단히 다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격동의 혁명기를 이끈 정치 주역이면서도 18년간 미국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계몽주의의 이상에 불타면서도 실용주의자였고, 유럽의 고전문화에 심취했으면서도 서부와 아메리칸 인디언 및 그 토착문화를 선양했고, 자유와 천부인권의 사도를 자임하면서도 노예 소유자였다.
오늘날 종종 그에 대한 비판의 원천이 되는 이 양면성은 그러나 그가 구축한 정신세계가 얼마나 드넓은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1782년 몬티첼로(Monticello)를 찾은 프랑스인 샤스텔뤼(Marquis de Chastellux)의 찬탄대로, 제퍼슨은 ‘음악가, 설계사, 측량사, 천문학자, 박물학자,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나마 제퍼슨이 화려한 경력을 갖기 이전의 평가이니 여기에 적어도 서너 가지의 또 다른 커리어를 덧붙여야 하리라.
제퍼슨이 사유지로 만든 내추럴 브리지. 신대륙의 번영을 약속하는 듯한 장엄함이 느껴진다.
역사상 제퍼슨만큼 이런 전인으로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발휘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1962년 노벨상 수상자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면서 케네디 대통령은 “제퍼슨이 이 방에서 혼자 식사하던 때를 제외하고서 백악관이 이처럼 뛰어난 인재들로 붐빈 적이 없었다”는 재담을 남긴 바 있는데, 이 또한 제퍼슨의 심오한 지성에 대한 미국인의 경외심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제퍼슨이 40년에 걸친 필생의 사업으로 완성한 버지니아 샬로츠빌의 저택 몬티첼로를 찾는 여정은 이 다재다능한 거인의 삶을 통해 미국정신의 근본과 그 현재적 의미를 새삼 음미해보는 기회가 됐다.
몬티첼로는 제퍼슨이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1768년에 짓기 시작해 그가 대통령으로 은퇴하기 직전인 1808년에 현재와 같은 형태로 완공됐다. 직접 집터를 잡고, 설계하고, 세우고, 고치고, 다시 설계하고, 또 뜯어고치는 과정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간 40년의 건축 과정은, 실로 길었던 그의 공직 생활과 나란히 한 것이다.
‘자서전 같은 집’
그러기에 몬티첼로는 제퍼슨의 ‘집’이면서 정신의 본향이고, 그의 삶의 표현이면서 또한 그의 역사이다. 방대한 제퍼슨의 전기 ‘제퍼슨과 그의 시대’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매스 멀론(Dumas Malone)은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정신으로서, 몬티첼로보다 더 제퍼슨을 특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없다고 썼다. 집주인의 삶의 철학이 집약되어 있고 그의 심미적 이상이 투영되어 있기에 몬티첼로는 달리 말해 일종의 자서전이다.
주택의 규모나 건축미로만 본다면 몬티첼로를 능가하는 집은 허다하다. 그러나 몬티첼로처럼 한 인간의 정신과 혼,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집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몬티첼로가 제퍼슨의 초상과 더불어 역사적 기념물로서 미국의 5센트 동전에 새겨진 까닭도, 또 미국의 주택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제퍼슨의 발자취를 찾아 몬티첼로 탐방 길에 나선 것은 4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주말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 방문에 앞서서 제퍼슨으로 인해 유명해진 버지니아 록브리지 카운티에 위치한 내추럴 브리지(Natural Bridge)를 거쳐 가기로 여정을 잡았다. 출발지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채플힐에서 샬러츠빌로 가는 통상적인 코스에서 다소 우회하는 것이지만 버지니아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자연의 경이를, 그것도 한때 제퍼슨이 소유한 적이 있기에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달릴 주간(主幹)고속도로 81번길은 버지니아의 서쪽 경계를 이루며 블루리지 산맥의 기슭을 따라가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로다.
내추럴 브리지는 땅이 하늘로 치솟으며 생긴 거대한 아치형 구멍이 만들어낸 다리 형상의 기이한 지형을 일컫는다. 폭 90피트, 높이 215피트의 타원형 아치 아래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을 따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이 나 있다.
아치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니 지형이나 경관은 크게 변화하지 않으나 기분만은 무슨 별세계에 온 듯했다(후에 무릉도원 전설이 서린 중국의 장가계 지역에서 이와 대단히 유사한 지형을 본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이곳에 살던 원주민 인디언의 후손들이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재현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이 이 지역을 답사하고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바위에 새겨 흔적을 남겼으나, 이곳을 역사적 명소로 만든 것은 제퍼슨이다.
몬티첼로 앞에 조성된 정원. 꽃과 나무 하나하나에 제퍼슨의 손길이 담겨 있다.
정계에 진출하기 1년 전인 1767년,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다가 내추럴 브리지를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제퍼슨은 이곳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독립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774년 이 일대를 매입해 자신의 소유지로 만들었다. 프랑스 공사관 서기 마보와(Fran뛬is Barb?Marbois)의 질의에 대한 답으로 쓴 ‘버지니아 주에 대한 비망록’(1787)에서 제퍼슨은 내추럴 브리지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구세계 유럽과 달리 광활하고 풍요한 ‘자연의 나라,’ 미국만이 제공할 수 있는 야생적 자연의 상징으로 클로즈업시켰다.
그는 내추럴 브리지를 ‘장엄한 자연의 역사(役事)’로 찬탄하면서 다리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정신을 압도하는 숭엄한 감정이, 아래에서 하늘로 솟구쳐 있는 아름다운 아치를 올려다볼 때는 형언할 수 없는 황홀경으로 바뀐다고 기술했다. 칸트의 숭고미학에 의탁해 자연의 경이로움을 토로하는 제퍼슨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고 갓 독립한 신생 공화국의 달라진 자연관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청교도들의 눈에 비친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황량한 황야’도, 문명의 행진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아니다. 신대륙의 굽이치는 야생 자연은 유럽의 오랜 역사와 문화전통을 상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새로운 문명의 창출과 번영을 약속하는 신생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새롭게 주목된 것이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서 ‘자연과 자연의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빌려 독립을 정당화한 제퍼슨은 1801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독립혁명의 소산인 신생 공화국은 유럽의 낡은 역사의 짐을 벗고 자연과 성약(成約)을 맺은 나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다시금 천명했다.
성서에 입각해 형성된 신앙 공동체는 이렇게 독립과 더불어 자연법에 입각한 공화주의 공동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제퍼슨의 하나님은 이제 저 무서운 칼뱅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성적 질서를 통해 그 존재성을 드러내는 자연의 하나님이었다.
건국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 수사의 원천이 되면서 자연은, 특히 신대륙의 광활한 자연의 야생성은, 이제 번영을 약속하는 표상으로서 신생 공화국의 자긍심의 원천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자연의 경이를 과시하는 내추럴 브리지를 거쳐 몬티첼로로 향하는 여정을 재촉했다. 다시 주간고속도로 81번을 타고 달리다가 곧 동서로 달리는 64번으로 갈아 탄 후 20번 지방도로로 들어서니 이윽고 몬티첼로 방문자 안내소였다. 내추럴 브리지를 떠난 지 한 시간 반 만이다.
안내소에서 우리는 ‘토머스 제퍼슨, 자유의 추구’라는 안내 영화를 잠시 보고 안내 책자를 얻은 다음 몬티첼로로 걸음을 옮겼다. 놀랍게도 몬티첼로는 그곳으로부터도 2마일이나 떨어진 산정에 있었다.
서부를 보고 루이지애나를 사다
몬티첼로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주변이 경작지로 개발되고 도로도 잘 닦여 있어서 집이 자리잡은 산정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숲이 울창하고 산등성이 또한 가파르고 거칠어 산정까지의 등정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산정의 높이가 해발 867피트이니 사실 낮은 것도 아니다. 몬티첼로는 그냥 집이 아니라 주변 약 5000에이커에 이르는 상당히 넓은 플랜테이션(재식(栽植)농업)의 중심이었다.
플랜테이션을 산정에 세우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관습을 깨는 행보 속에 자연을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주시한 제퍼슨의 자연관과 더불어 그의 실험정신, 다시 말해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야생의 자연과 거기에서 발견하는 건강한 자연미에 대한 관심은 제퍼슨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는 블루리지 산맥 너머로 여행해본 적이 없지만 그 너머 광활한 서부에 대해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고, 이것이 곧 신생 공화국 경영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사실 제퍼슨은 내추럴 브리지를 서부로 나가는 관문으로 여겼다. 그곳을 자신의 소유지로 만든 것도 서부를 향해 미래를 여는 선두에 서고자 하는 생각의 발로였다.
제퍼슨이 연합회의에서 서북조례 제정 위원장을 맡아 오하이오 강 너머의 서북 영지 경영의 큰 틀을 마련한 것이나, 훗날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지를 사들이고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클라크(William Clark)를 보내 그곳을 탐사하도록 함으로써 미국이 대륙국가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도 모두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집터를 황무지나 다름없는 산정에 잡은 진취적 기상 속에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농부’의 공화주의 정치철학
몬티첼로 입구에서부터 산정까지 셔틀 버스가 운행하고 있었다. 붐비는 관람객들 틈에 끼어 버스를 탔다. 문득 1990년대에 몬티첼로보다 방문객이 더 많은 주택은 멤피스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레이스랜드(Graceland)뿐이었다고 술회한 어떤 사학자의 방문기가 떠올랐다. 널따란 과수원과 정원을 관통하는 산정으로 오르는 길은 색색의 봄꽃과 나무에 갓 돋아난 새싹들의 연둣빛 향연으로 눈부셨다.
몬티첼로 정원의 조경과 꽃과 나무 하나하나마다 제퍼슨의 손길이 배어 있다. 그는 정원에 심은 꽃과 나무의 생장과 생태적 변화를 자세히 기록한 ‘정원기(Garden Book)’를 남겼다. 그 기록은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단순한 도락가의 시선이 아니라 기후의 변화와 식물 생장의 관계, 품종의 종류와 변종 등을 자세히 살피는 박물학자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퍼슨은 만년에 쓴 자서전에서 ‘나라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일은 새로운 식물을 소개해 사람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것’이라는 구절을 남긴 바 있다.
그는 롬바르디아 지방의 포플러, 중국과 콘스탄티노플의 뽕나무를 수입해 심기도 했고, 프랑스산 무화과와 꽃상추, 영국산 살갈퀴, 이탈리아산 포도와 딸기를 들여와 심었고, 이탈리아·이집트·수마트라 등지에서 볍씨를 도입해 쌀 품종의 개량에 힘쓰기도 했다. 실패하긴 했으나 올리브를 미국 땅에 식재하기 위해 500여 그루의 올리브 나무를 수입하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제퍼슨은 또한 소믈리에 못지않은 포도주 감식가로 워싱턴 정가에서 이름이 높아 만찬에 쓸 포도주는 늘 그에게 문의해서 골랐을 정도였다. 이 또한 버지니아에 포도주 양조를 증진하기 위해 프랑스 공사로 재직할 때 보르도 지방의 포도밭과 라인 강 유역의 포도밭을 방문하고 유럽의 양조 산업을 면밀히 살핀 영농가적 관심의 소산이다. 파종기와 조면기(繰綿機) 등 영농기구 개량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그는 버지니아 토질에 알맞게 개량한 쟁기로 파리 농업협회로부터 금상을 받기도 했다. 제퍼슨은 자신을 정치가이기에 앞서 곧잘 농부로 자처했는데, 기실 그의 공화주의 정치철학은 농경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퍼슨은 1743년 버지니아 서쪽 변방, 앨버말 카운티의 섀드웰(Shadwell)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으나 젊은 시절 측량과 지도제작 일을 하면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일으키고 버지니아 식민의회 의원까지 지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어머니는 버지니아의 명문 랜돌프 가문의 딸. 외가가 그의 정치적 출세에 든든한 배경이 돼줬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잃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한 아버지에게서 근면과 성실 그리고 학구열을 물려받았다고 자주 술회했다.
제퍼슨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일군 수천 에이커의 땅과 노예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몬티첼로 집터도 그중의 일부였다. 17세가 되면서 제퍼슨은 윌리엄스버그의 윌리엄앤메리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에서 제퍼슨은 계몽주의 신봉자인 윌리엄 스몰(William Small)로부터 인간 이성에 입각한 학문 탐구와 지식의 중요성을 배우고 폭넓은 교양과 세련된 매너를 익힌다. 그는 고전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 음악, 건축에 대한 소양을 쌓았다.
최고 실력의 젊은 변호사
윌리엄앤메리 대학을 졸업한 후 제퍼슨은 당대의 뛰어난 법률학 교수였던 조지 위드 (George Wythe) 밑에서 다시 5년 동안 법학 공부를 하고 1767년 변호사가 됐다. 당시에는 불과 몇 개월간 법률 상식을 익히고 수습 기간을 거쳐 변호사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워싱턴DC 제퍼슨 기념관에 있는 제퍼슨 입상(왼쪽), 버지니아에 있는 제퍼슨의 묘비.
이런 관행에 비춰본다면 5년에 걸친 제퍼슨의 법률 공부는 돋보이는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법철학은 물론 영국의 옛 색슨시대의 법까지 폭넓게 공부해 고금의 법체계에 해박했는데, 이 전문적 식견이 결국 그의 정치적 출세와 리더십의 원동력이 됐다.
1768년 제퍼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향 앨버말 카운티를 대표해 버지니아 의회에 진출한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가장 오래된 의회인 이곳에서 6년 동안 의정활동을 하며 버지니아를 대표하는 정치가로 부상한다.
제퍼슨의 정치적 명성은 패트릭 헨리와 같은 뛰어난 웅변이나 새뮤얼 애덤스와 같은 능란한 정치적 수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앞에 나서기보다는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는 냉정한 책략가라기보다는 사변적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40년 가까이 여러 공직을 맡았지만 자리에서 물러날 궁리를 더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식, 전문적 식견, 그리고 뛰어난 글솜씨는 그를 늘 시대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제퍼슨이 처음으로 세인의 이목을 끈 것은 강압법의 시행으로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 의회가 해산 위기를 맞은 1774년에 쓴 ‘아메리카 식민지의 권리에 대한 요약적 견해’라는 팸플릿을 통해서다. 이 팸플릿에서 제퍼슨은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 간섭할 권리가 없음을 영국법의 전통에 입각해 석명(釋明)하고 식민지의 자주권을 주장했다.
내용보다도 그것을 떠받치는 명석한 논리와 뛰어난 문장에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1775년 페이턴 랜돌프(Peyton Randolph) 대신 2차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한 제퍼슨은 식민지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결의안과 선언문을 작성하는 일을 거들었다.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그가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로 지명된 것도 함께 기초위원으로 지명된 존 애덤스의 술회대로 뛰어난 문장력과 해박한 법률 지식 덕분이었다.
프랑스와 인디언을 흠모하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 독립선언서 기초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776년 6월11일이다. 6월7일 버지니아 대표인 리처드 헨리 리가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한 지 4일 만이었다.
기초위원으로는 제퍼슨과 더불어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만, 로버트 리빙스턴이 지명됐다. 기초위원회로부터 선언서 작성을 위임받은 제퍼슨이 프랭클린에게 선언서 초안을 검토하라고 건네준 것이 6월21일이니, 그는 이 세기의 명문을 불과 10일 만에 쓴 셈이다.
제퍼슨 자신이 몇 주 전에 독립을 전제로 작성된 버지니아 주 헌법의 머리글을 이미 쓴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별다른 문서를 참고하지 않고 독립의 대의를 밝힐 역사적 문서를 이처럼 신속하게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윽고 우리 차례가 되어 4개의 주랑이 떠받치고 있어 로마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동편 현관을 통해 몬티첼로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은 응접실인데 그야말로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각종 지도, 그림, 초상화, 조각품이 벽을 장식하고 있고, 창문과 창문 사이의 기둥에는 네 개의 흉상이 있으니, 볼테르, 튀르고, 해밀턴, 그리고 제퍼슨 자신이 그 주인공이다. 정치 일선에서 그와 늘 대립하던 해밀턴의 흉상을 가까이 두었다는 점이 그의 넉넉한 삶의 자세를 말해주는 듯해 흥미롭다.
이 방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벽면에 걸린 사슴, 영양, 엘크(몸집 큰 사슴)의 뿔과 마스토돈(코끼리의 일종) 뼈, 그리고 여러 가지 인디언 도구와 무기, 모피를 포함한 수많은 인디언 민속품이다. 대부분이 그가 서부로 파견한 메리웨더와 루이스 탐사대가 보내온 것들이다.
그는 한때 서부에서 보내온 이 토착 문물로 이 방을 인디언 홀로 꾸미고자 했다. 여기에서도 신대륙의 자연과 풍물 그리고 그 토착문화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버지니아에 관한 비망록’에서 기후와 지형이 문명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에서 기후가 습하고 토양 또한 척박하기 때문에 신대륙의 문명은 곧 쇠망할 것이라는 유럽 박물학자들의 예견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반박한 바 있다. 특히 신대륙의 동물은 유럽의 그것에 비해 왜소하다고 주장한 박물학자 뷔퐁을 거론하며 그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실증적으로 논박했다. 훗날 프랑스 주재 공사로 있을 때 그는 메인 주에서 덩치 큰 무스(사슴의 일종)를 붙잡아서 프랑스로 실어와 왕립공원에 기증하고 뷔퐁을 초청해 보여주기도 했다.
젊은 시절 인디언 언어를 채록하기도 했던 제퍼슨은 인디언에 대해 늘 호의적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이 게으르고 힘과 용기가 부족해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들은 열정적이고 민첩할 뿐만 아니라 현명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주어진 자연 조건에 최상으로 적응한 결과 선택된 것이라고 옹호했다.
그는 백인에게 살해당한 가족을 애통해하는 밍고족 추장 로간의 조사(弔詞)를 ‘버지니아에 관한 비망록’의 부록으로 실어 인디언의 우수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200단어로 미국을 세우다
그는 인디언들이 주어진 환경 탓에 본래적 우수성이 발양되지 못했을 뿐, 그들도 백인과 다를 바 없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흑인에게 적용하는 데는 유보적이었다. 이 점이 그의 생애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됐을 뿐만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로 작용하게 됐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럽과 신세계 문명이 공존하는 응접실이야말로 그의 유례없이 다양한 관심과 박식한 정신세계의 축도(縮圖)로 비친다. 이어지는 서재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책 없이는 살 수 없소”라고 쓸 정도의 독서광이자 장서가였다. 제퍼슨은 한 때 7000권의 장서를 소유했는데, 그것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제일가는 장서였다.
빚에 쪼들리던 제퍼슨은 이 장서를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중에 불타버린 연방도서관에 2만3950달러를 받고 넘겼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장서 수를 자랑하는 미국 의회도서관은 바로 이 도서를 토대로 출발한 것이다. 그 후로도 제퍼슨은 꾸준히 책을 사 모아 그의 말년에 다시 2000여 권의 장서를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풍요한 정신세계는 무엇보다 책을 통해 구축된 세계이다. 제퍼슨이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독립선언서에 시대의 여망을 간결하면서도 힘찬 언어로 담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박람강기(博覽强記) 덕분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독립의 이념과 정당성을 다룬 전반부와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전횡과 그 해악을 열거한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당시에는 모두 28개항에 달하는, 조지 3세에 대한 탄원 부분이 중시됐으나 오늘날 독립선언서가 미국정신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것은 물론 전반부 때문이다. 제퍼슨은 불과 200여 단어로 혁명의 당위성, 새로운 정부의 창출, 인간의 천부인권을 간결명료하게 천명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이 유명한 대목의 ‘자명한 진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타고났다. 이 권리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돼 있다. 인류가 정부를 조직한 것은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이런 목적을 파괴하는 정부는 변혁시키고 폐지할 수 있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
여기에 개진된 생각이 제퍼슨이나 당시 미국인들이 창안한 것은 물론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 수천년 동안 삶의 예지로서 여러 사람이 주장해오던 것이 시대의 공의로서 선별되어 집약됐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독립선언서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은 존 로크의 계몽주의 정치철학, 고전 공화주의 이념, 기독교 전통 세 가지다. 로크의 계몽주의 정치사상은 선언서의 전반부에, 공화주의 이념은 조지 3세의 ‘해악과 전횡’의 리스트에, 그리고 기독교 정신은 선언서의 첫 문장과 결론 부분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실용으로 수렴된 이상과 계몽
제퍼슨 자신은 독립선언서를 ‘미국정신의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그것은 미국정신의 발현이면서 또한 제퍼슨 정신세계의 이념적 좌표이기도 하다.
선언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은 미국사회가 지향할 국가적 이념을 밝힌 것으로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제퍼슨의 숨결을, 그 내밀한 이념적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구절은 생명과 자유의 향유 못지않게 재산권이 인간의 기본권임을 밝힌 로크의 ‘정부론’ 제2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제퍼슨은 재산권을 행복의 추구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복리도 인간의 기본권임을 상기시키는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제퍼슨의 이상주의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돈키호테적 이상주의인 것은 아니다. 제퍼슨 연구자 코메이저(Henry Steele Commager)에 따르면, 행복의 추구란 표현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사회의 진보는 국가의 물리적 힘의 증강이나 문화의 창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행복의 실현에 있다. 둘째, 삶의 초점은 지금 현재에 있는 것이지 과거나 후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행복의 보장에 대한 요구는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입헌적 권리이다. 요컨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사회적 진보가 학문과 예술의 발달 혹은 관습과 도덕의 세련을 뜻했다면, 제퍼슨은 그것이 일반 국민의 물질적 풍요, 건강, 가족의 안락과 같은 행복의 실현이 아니면 무의미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행복의 추구란 표현은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주의적인 울림이 크다 하겠다.
제퍼슨은 계몽주의의 미국 쪽 적장자(嫡長子)이다. 그러나 그는 계몽주의를 추상적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구체성 속에서 수용하고자 애썼다. 계몽주의 정치철학이 미국에서 민주주의 정치체제로 개화해 정착된 것이라든지, 유럽에서 추상적 이론으로 한때 반짝했다가 시들어가던 중농주의 이론이 미국 땅에서 공화주의와 접목돼 국가 경영의 한 원리로 제도화한 것이라든지, 국가와 종교의 확고한 분리나 보통교육이 유럽에 앞서 미국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제퍼슨적 실용주의의 매개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퍼슨은 독립선언일에 온도계를 처음으로 사서 그날의 최고기온이 76℉라고 기록해놓은 사람이다. 그가 일생 건축에 매료된 것도 이념과 실용의 조화를 추구한 삶의 태도의 발로인지 모른다. 건축이야말로 예술 중에서 실용성과 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장르가 아니겠는가.
몬티첼로는 처음에 장방형의 거실을 중심으로 북쪽에 식당, 맞은편인 남쪽에 침실, 이층에 서재와 침실을 갖춘 구조였다. 1768년에 기초 공사를 하고, 1769년에 짓기 시작, 그 이듬해 남쪽 침실이, 이어 2년 뒤인 1772년에 북쪽 날개의 식당이 완공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처음의 몬티첼로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의 2분의 1 정도 규모였으나, 당시 인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건축 양식이었다.
고대 로마의 향취를 담다
현존하는 설계도면을 보면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조지 왕조식 건축 양식을 거부하고 고전 로마식을 본떴다. 그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의 건축서(Four Books of Architecture)를 참고해 직접 설계했다.
제퍼슨은 남쪽 침실이 지어진 1770년 섀드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고, 이어 집이 마무리된 1772년 윌리엄스버그의 부유한 명문가의 딸로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마사 웨일스 스켈톤(Martha Wayles Skelton)과 결혼해 이곳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7세에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17세에 윌리엄스버그로 나와서 생활한 제퍼슨은 마사와의 결혼으로 비로소 가정생활의 안락과 심리적 안정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782년 마사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깊은 상실감과 실의 속에서 지내던 그는 2년 뒤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가 돼 파리로 떠났다. 이 프랑스 체험이 몬티첼로를 단순하면서도 우미(優美)하고, 절제돼 있으면서도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물로 탈바꿈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제퍼슨은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로마의 고전 건축과 그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안목을 높이고 더욱 고상하고 세련된 취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님므의 ‘메종 카레’를 보고서 마치 연인을 보는 것처럼 건물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겼다고 쓰기도 했다. 여기서 본 아치와 심미안을 투영해 그가 본격적으로 몬티첼로의 리모델링에 착수한 것은 1796년부터다. 이때 그는 워싱턴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한 뒤 잠시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그는 스스로 작성한 설계도에 따라 2층을 헐어내고 아래층 좌우 날개의 폭을 두 배로 넓혀 내부 공간을 확장하고 그 위에 규모를 축소해 다시 2층을 얹고 지붕은 둥그런 돔으로 장식했다. 그 결과 몬티첼로는 팔라디오 양식과 로마의 신전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고전풍 건물로 변모했다.
제퍼슨의 혁신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주거용 건축물로서 몬티첼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건물의 양편에 L자형 테라스를 설치하고 그 밑에 마구간, 부엌, 낙농실, 훈제실 같은 여러 가지 부속시설과 노예 숙소를 만들어 그것을 본채의 지하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자유와 절도의 공존
몬티첼로는 적어도 135명 이상의 노예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숙소와 작업 공간이 테라스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본채의 현관이나 정원은 대식구가 거주하는 집답지 않게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편 테라스가 집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통로로 활용돼 건물의 고전미가 배가됐을 뿐만 아니라, 부속 건물이 모두 전천후로 본채의 지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편리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한 제퍼슨의 특징적 사고가 창의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런 심미안과 기능성의 결합은 실내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기둥과 벽 그리고 천장과 벽의 이음새에도 고전적 장식을 도입하면서도 창문을 널찍하게 만들고 지붕에 현창을 내 편리함을 도모했다. 제퍼슨은 파리에서 가져온 수많은 예술품과 가구들을 실내에 적절히 배치하고 더 필요한 가구는 자신이 직접 스케치한 도안을 보내 윌리엄스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심지어 런던에까지 주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생활에 편리한 도구를 비치하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령 작은 집무실에 비치된 편지등사기(polygraph)는 좋은 예다. 그는 일생 동안 무려 2만여 통의 편지를 썼는데, 편지를 쓸 때마다 자신이 만든 이 등사기를 이용해 사본을 남겼다. 덕분에 우리는 그의 광활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내를 구경하고 응접실을 통해 정원으로 나오니 제퍼슨이 조성한 타원형의 화단에 만발한 꽃들이 미소로 맞이한다. 사면이 터진 넓은 잔디밭에 바람이 시원하다. 잔디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걷노라니 자연의 품에 안긴 포근함과 동시에 탁트인 산정이 주는 활달함과 개방성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자유롭고 독자적이면서도 그 폐쇄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무애(無碍)의 경지, 이것이 바로 제퍼슨이 추구한 삶의 이상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또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사회의 생활 윤리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 정신이란 마땅히 억압 없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방종과 무질서로 빠지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년에 주도해 세운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 이념도 이것이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의 학칙과 운영 방침을 정하면서 필수과목이나 학년 개념을 없애고 학생들은 무슨 과목이든 원하는 대로 수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한과 억압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대학총장 등 행정기구를 두지 않고 모든 것을 교수와 학생이 협의해서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버지니아 대학은 이 원칙에 따라 1904년까지 총장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한 대학의 건물과 배치도 정신의 무한한 자유와 절도의 균형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퍼슨은 몬티첼로처럼 팔라디오 양식을 변용해 지붕에 돔을 얹은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로텐다를 중심으로 장방형의 사면에 강의실과 기숙사를 배치함으로써 저마다 독자성을 지니면서 또한 가운데에 형성된 내정(內庭)을 통해 만남과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제퍼슨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자신의 혼이 배어 있는 이곳 몬티첼로에서 1826년 7월4일 사망했다. 정확히 독립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몇 시간 뒤 북쪽 보스턴에서 평생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그의 선임(2대) 대통령 존 애덤스 또한 유명을 달리했다.
사람들은 건국의 주역인 두 거인이 같은 날, 그것도 나라의 건국 기념일에 함께 사망한 것에 어떤 섭리를 느꼈다. 이것이 이들은 물론 다른 건국의 조상들까지 신화 속으로 밀어올리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계몽주의의 일상적 실천
남쪽 테라스 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산하는 길에 제퍼슨이 잠든 묘지에 들렀다. 그의 바람대로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요,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제안자요, 버지니아 대학의 창설자인 토머스 제퍼슨, 이곳에 묻히다’라는 묘비명이 기다란 잿빛 묘석에 박혀 있다. 묘비명은 물론 묘석의 외형과 크기까지 제퍼슨 자신이 도안해놓은 그대로 제작된 것이다.
다소 투박한 묘석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죽음까지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고인의 도저한 신념을 짙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신념이나 집념도 운명의 변덕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제퍼슨은 말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때문에 혼을 쏟아 부어 건설한 자신의 성채를 보존할 수 없으리라는 초조감에 시달렸다.
대통령직을 사임했을 때 이미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그는 기대했던 바와 달리 농장의 수입으로는 이를 갚아나갈 수가 없었다. 연금제도가 없었던 때라 농장의 작황이 좋지 않으면 빚을 얻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누적되는 채무를 갚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제퍼슨은 10만달러가 넘는 빚을 딸 부부에게 남긴 채 세상을 떴다. 딸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노예를 포함해 몬티첼로의 값나갈 만한 소장품들을 경매에 부쳤다.
그것으로도 빚을 다 갚을 수 없었던 그녀는 몇 년 뒤 결국 몬티첼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수차례 주인이 바퀴면서 몬티첼로는 옛 모습을 잃고 퇴락 일로에 접어들었다. 1923년 제퍼슨 재단이 창립되어 몬티첼로를 인수하면서 인수해 비로소 옛 모습을 되찾고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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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담대히 알려고 하라’라는 명제로 계몽주의 정신을 요약한 바 있다. 유례를 찾기 힘든 제퍼슨의 다양한 지적 관심과 왕성한 탐구열, 그리고 실험 정신은 그를 계몽주의의 권화(權化)로 여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제퍼슨의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사변적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실천을 통해 탐구하고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미국적이다.
그는 이념 지향적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일상적 필요와 삶의 복잡성을 늘 고려하는 실용주의자였다. 몬티첼로는 바로 그러한 실용적 계몽주의를 미국의 나아갈 길로 제시한 한 거인의 삶의 발자취로서 오늘날 미국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유산의 하나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