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경제제재까지 북중관계 60년

중국 개방정책 보고받은 김정일, “흑묘백묘론은 명백한 기회주의, 수정주의”

  • 손광주 데일리NK 편집인 sohnkj21@hanmail.net

    입력2006-12-13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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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9일 핵실험 이후, 북한의 운명을 가를 ‘방아쇠’를 쥔 중국의 선택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진 중국의 제스처에 얽힌 의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6·25전쟁으로 혈맹관계를 맺은 중국과 북한은 이후 반세기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경제제재까지 북중관계 60년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 주민의 농사를 돕는 광경. 1959년 중국 당국이 펴낸 사진집에 실린 장면이다.

    북중관계는 이제 60년을 맞이하고 있다. 1940년대 말 정권수립 때부터 공산주의 ‘형제국’이었던 두 나라는 6·25전쟁을 계기로 혈맹관계로 발전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자 마오쩌둥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도움)를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전선에 내보냈다. 마오쩌둥은 항미원조를 선언하면서 김일성에게 ‘12 관문’을 만들어놓겠다고 약속했다. 압록강을 내줘야 할 상황이 되면 그 다음 만주, 그 다음에는 베이징, 마지막에는 연안까지 12개 전선을 구축해 끝까지 같이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관계’라는 뜻이었다.

    마오안잉이 전사하던 날, 덩샤오핑이 ‘아들 사망’ 소식을 간단히 메모하여 회의 중이던 마오쩌둥에게 전했다. 메모를 본 마오쩌둥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신의주와 단둥(丹東)을 잇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의 중국 쪽에는 마오안잉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전쟁으로 피를 나눈 관계의 상징물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을 넘긴 지금, 북중관계는 과연 ‘혈맹’인가. 최근 김정일 정권의 미래,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해 북중관계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과정에서 중국은 대북제재 ‘찬성’에 손을 들었다. 제비 한 마리 날아들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겠지만, 이날 중국의 찬성은 과거의 북중관계를 고려할 때 분명히 ‘파격’이었다. 이후 북한의 핵실험에 이어진 10월15일 유엔안보리결의 1718호 채택에도 중국은 찬성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북중관계가 중대한 파국으로 치닫는다면, 중국이 유엔 대북제재에 처음으로 찬성한 2006년 7월15일은 양국관계의 작은 분수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북중관계가 일관된 혈맹관계로만 이어져온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1992년 한중수교는 북중관계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통상적으로 국가간의 관계는 서로의 공통성을 넓혀가면서 변화, 발전한다.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근거해 경제-사회문화-정치-군사 분야로 확대되면서 양적·질적으로 깊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중에서도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 한·미·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을 이어오면서도 파국으로 가지 않은 근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이 유지돼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개혁개방은 그전까지의 북중관계에서 ‘이제부터 너와 나는 생각(사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선언한 뚜렷한 분수령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중국 개혁개방의 연장선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 제2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바로 이웃한 북한은 아직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한때의 사상적 동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길은 이렇게 달라진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60년 가까이 같이 걸어온 양국의 협력과 갈등의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미·일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와 북·중·러의 그것은 다르다. 사상의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사상의 변화가 북중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中蘇분쟁과 김일성의 선택

    1948년 9월9일 수립된 북한 정권의 강력한 ‘동맹’은 소련이었다. 북한 정권은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위해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었다. 스탈린은 광복 직후부터 당과 주요기관에 소련 고문을 보냈다. 그해 말 소련군을 철수하면서 당과 주요 국가기관에 소련 출신 조선인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스탈린의 지원을 받고 동시에 소련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기회를 마련했다. 김일성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도 강화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승승장구하면서 압록강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만주까지 쫓겨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최고의 정예병인 팔로군 출신들을 전선에 투입했다.

    중국 지원군은 1945년 급조되어 북한에 투입된 소련 점령군과는 근본이 달랐다. 당시 북한에 투입된 소련군은 극동군 중에서도 범죄자 출신이 많아 강간, 약탈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중국 지원군은 북한 주민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아침에는 주민들의 집 마당까지 쓸어주며 마음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김일성은 정전(停戰) 후 중국 지원군이 철수할 때 환송단에 첫딸인 김경희를 내보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중·소 양다리 외교를 시작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1953년 국제공산주의의 수령인 스탈린의 사망과 중국의 도전으로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스탈린 사망 후 전개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김일성에게는 중요한 기회였다.

    넓은 의미에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복잡한 이론투쟁으로 볼 수 있다. 핵심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가는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도기’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지의 문제와, 이와 연동해 스탈린이 창시한 수령론(개인숭배)을 계속 인정할 것인지 여부였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의 소련 공산당은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과도기를 끝내고 이때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개인숭배를 약화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속돼야 하며 개인숭배를 약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베트남, 알바니아와 함께 중국 편에 섰다.

    김일성은 공산권의 이 같은 정치사상적 변화의 흐름을 타고 6·25전쟁을 계기로 가까워진 중국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독재체계를 굳건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상징이 1955년 12월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주체사상이 형성되는 ‘맹아’였다. ‘주체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이 연설은 쉽게 말해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식대로 해나가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게 구현하자는 주장이었지만, 국내 정치적으로는 김일성의 개인 권력강화를 의미했다. 중소 이념분쟁 속에서 김일성은 소련·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방법으로서 ‘주체’를 내건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내부의 중요한 파벌이던 소련파, 연안파(중국파)를 모두 제거하고 1958년 말 독재체계를 거의 수립했다.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며 북한의 외교노선은 중국과 소련 어디에도 결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 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이용한 이른바 ‘주체외교’를 편다. ‘주체외교’라고 해서 어떤 고도의 이론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나라가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최대한 증진시키자는 것이다. 국익을 최우선한다는 것은 사실 모든 국가의 외교노선이 마찬가지다. 이는 오히려 김일성이 창시한 주체사상을 숭배하기 위한 국내용 성격이 강하다. 최근 김정일이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면서도 6자회담 등에서 러시아를 활용해보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뿌리도 여기에 닿아 있다.

    ‘자주성을 옹호하자’

    중국과 북한은 1960년대를 거치며 각각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이는 양국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인민공사, 대약진운동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무려 3000만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일어났으며 1966년 촉발된 문화대혁명은 전국을 광기(狂氣)의 계급투쟁으로 몰아넣었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혁명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었다. 당시의 문화대혁명은 거듭된 실책으로 수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한 마오쩌둥이 권력을 만회하기 위해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을 숙청하는 권력투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일성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문화혁명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굶주림과 핍박을 피해 북한으로 도피해온 중국 사람들을 보호해줬다. 그러자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다. 이에 김일성은 1966년 8월 ‘자주성을 옹호하자’는 ‘로동신문’ 논설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로, 중국을 ‘교조주의’로 동시에 비판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은 중국 문화혁명의 분위기를 이용해 독재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국방경제 병진(竝進)을 추진하면서 군국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3월 당중앙위 4기 15차 전원회의를 비밀리에 열고, 군사력 증강을 줄이고 인민경제를 중시하자는 갑산파들을 모조리 숙청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 김정일간 권력투쟁의 산물인 ‘유일사상체계’도 이때 등장했다. 유일사상체계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수령독재를 더욱 강화해 김일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중국의 문화혁명 기류를 이용해 1967년 ‘5·25 교시’를 통해 지식인 계급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 전역에는 중국의 문화혁명과 같은 극좌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기간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절정에 달했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1967~69년 김영주와 김정일이 경쟁적으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하면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일성에 대해 ‘수령’이라는 호칭을 붙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김일성을 절대 우상화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처음 작성됐고, 1974년 김정일이 공식후계자가 된 이후 북한사회는 공산권 국가 중 유례없이 기형적인 사회로 변질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은 문화혁명의 극심한 폐해를 스스로 극복하고 덩샤오핑의 깃발 아래 1979년부터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아갔다. 사실상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74년 이후 김정일 세습후계체제가 되면서 더더욱 달팽이관 속으로 기어들었다. 양국 사이는 차츰 멀어졌다. ‘혈맹’의 피가 묽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부당한 정세보고서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북중관계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1980년대 초 북한 외교부 1국(중국담당)은 김정일에게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대한 간단한 제의서(보고서)를 올렸다.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발언에서 유래했다. 김정일은 제의서를 보고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흑묘백묘론은 명백한 기회주의이며 수정주의다. 되놈들이 사회주의 근본원칙을 버리고 개판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도 있으니 공식적으로 ‘까지’(비판하지) 말고 외교관들에게 주의를 주라”고 지시했다.

    당시까지 북한의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국은 역시 중국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주요 정책을 평가하고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외교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경제를 앞세운 남한이 공산권 진출에 성공하면서, 또 소련과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1988년경에 이르러 중국의 개혁개방은 북한 정권에 위협적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1988년 10월, 외교부에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그 결과에 대하여 보고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정세보고서를 김정일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게 된 경위, 중국이 달성한 일련의 성과, 그리고 북한의 관점에서 본 중국 개혁개방의 폐해와 교훈 등이 분석돼 있었다. 통상적으로 보고서가 올라가 김정일이 마음에 들면 ‘잘 되었음’ ‘전적으로 동의함’ ‘동의함’이라고 표지에 쓰고 이름과 날짜를 적는다. 이름과 날짜가 같이 적혀 있으면 그대로 ‘법적 문건’이 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고로 보았다는 뜻으로 날짜만 쓴다.

    보고서가 외교부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겉표지에 “누가 이따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정형을 보고하라 하였는가?”라고 씌어 있었다. 이로 인해 외교부 강당에 전 외교관이 참가한 가운데 ‘대논쟁’(사상투쟁)이 벌어졌다. ‘대논쟁’에 들어가면 사상투쟁 대상자는 거의 초죽음이 된다. 해당 책임자를 비판대에 올려놓고 길면 몇 달씩 가는 사상투쟁 무대다. 1국장은 “지도자 동지의 하해와 같은 배려에 배은망덕하게 보답했다”며 자신을 비판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개인숭배(수령론)를 부정한 것이다. 개인숭배가 부정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약화된다. 그런 점에서 마오쩌둥 체제에서는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은 덩샤오핑 체제가 되어, 즉 개인숭배가 부정되면서 비로소 개혁개방책을 추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물론 개인숭배 부정에 성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인숭배를 그대로 두고서는 결코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개인숭배 부정은 개혁개방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를 권력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는 김정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서기 어려운 이유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김정일은 특히 1989년 12월 루마니아 군부가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데 심한 충격을 받았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군대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5분 후 총살됐다. 김정일은 이 사실을 보도한 프랑스 A-2TV 녹화테이프를 그날로 공수받아 시청했다. 1991년 12월 김정일은 최고사령관이 되면서 군을 바탕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김일성 사망 후 군 중심 통치가 더욱 강화되면서 이른바 ‘선군정치’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덩샤오핑의 분노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진보할수록 북중관계는 퇴보했다. 그중 1992년의 한중수교는 북중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무렵 남한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방정책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한중수교가 물밑에서 상당부분 진행되자 김일성은 김영남 외교부장을 중국에 보냈다. 김일성은 한중수교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도 정식 수교만큼은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중국에 통사정하다시피 했다. 김영남 외교부장은 덩샤오핑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에서 항상 ‘하나의 중국’ 노선을 견지해왔다. 우리도 하나의 조선 정책을 펴왔고 중국도 이를 지지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두 개의 조선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인구 13억의 중국과 한 줌도 안 되는 대만과의 양안(兩岸)관계가 어째서 남북한 관계와 같단 말이냐”며 벌컥 화를 냈다.

    중국은 1992년 7월29일 한중수교 교섭이 완전히 마무리되어 양측이 협정서에 가서명한 시점에서도 한 달 동안 발표를 미뤘다. 당시 첸치천(錢其深) 중국 외교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 한중수교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고 대만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을 막기 위한 조치라며 북한을 달랬다.

    2년 뒤인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이후 김정일은 문을 닫아걸고 3년간 이른바 ‘유훈통치’를 계속했다. 외부세계는 도대체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식량난이 닥쳤다. 1998년까지 무려 300만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이어졌다. 김정일은 내부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국제기구의 지원요청도 미루다 1997년에야 유엔재해국 승인을 받아내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을 받았다.

    이후 북한은 1998년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한반도 주변에 군사적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1993~94년 1차 핵위기를 조성하면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내 지원을 받아낸 후, 김정일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매개로 외부의 지원을 받아 연명하고 또 핵개발을 진척시켜 지원을 받아내는 ‘돌고도는 순환고리’를 만들어냈다. 2000년 이후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중국의 경제지원으로 연명해왔다. 2002년 10월 2차 핵위기가 촉발된 후에는 협상을 위장한 6자회담을 이어오다 끝내 핵실험을 강행했다.

    김정일의 관점에서 보자면 핵실험은 길게 잡으면 1950년대 이후부터의 ‘숙원사업’에 중간 마침표 하나를 찍은 것이다. 북한은 핵실험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후 김정일은 앞으로 핵을 매개로 평화전술, 위협전술을 섞어가며 한미동맹 파기라는 ‘최종 숙원사업’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능력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그것이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존립 근거이기 때문에 이 방향에 노선 수정은 어렵다.

    ‘화평’의 걸림돌

    중국 처지에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북한 스스로 평화롭게 개혁개방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를 덜게 될 뿐 아니라 북중관계는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개혁개방으로 나올 경우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김정일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경제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할 때는 외부세계에 마치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처럼 위장하고 또 북한의 개혁개방을 원하는 중국 지도부를 의식해서 광저우 등 개방지구를 둘러보는 ‘프로파간다’를 해왔다.

    북한의 중국 의존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북한은 교역에서 40%, 원유 90%, 곡물 30% 정도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또 장마당은 중국제가 거의 장악했다. 장마당에서 북한 원화와 중국 인민폐는 같이 쓰인다. 만일 11∼3월 겨울철에 중국이 대북 원유를 완전히 끊어버리면 북한은 불과 몇 개월을 버티기 힘들다. 김정일 정권의 운명을 사실상 중국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일 정권은 현재 중국에 일종의 ‘꽃뱀’ 노릇을 하고 있다. 핵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탈북자를 만들어내며 북한 인권 문제 때문에 중국 인권도 같이 거론된다. 중국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경제지원을 ‘당당한’ 자세로 요구하고 받아먹는다. 이런 김정일 정권을 중국은 왜 ‘해치우지’ 못하는 것일까.

    현재 중국의 대외전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표현은 화평굴기(和平屈起), 도광양회(韜光養晦)다. ‘지금은 미국보다 힘이 없으니, 미국과 평화롭게 지내며 실력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 일어서겠다’는 것이다. 현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는 2020년까지 ‘소강사회(小康社會)의 전면적 건설’을 목표로 중국의 GDP를 2000년의 4배 수준(약 4조3000억달러)으로 증가시키고,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7%대로 유지하며, 1인당 GDP를 3000달러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한림대 김태호 교수). 따라서 현재 중국 지도부에 가장 절실한 문제는 다름 아닌 ‘안정’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이 ‘화평’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이다. 때문에 중국은 한반도가 현 상태로 지속되는 것에 가장 강력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김정일이 핵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지만, 북한 정권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한반도 비핵화 정책이 깨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 중국의 생각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미 자체 생산기반이 붕괴됐기 때문에 동북아에 분란을 일으켜야 경제지원을 받아낼 틈새가 생기고 한미동맹 파기라는 대남전략에서 계속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현재의 북중관계에서 쌍방간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북중 쌍방간 이해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미국과 남한의 존재다. 중국도 김정일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미 대(對) 북·중의 관계에서 북한지역이 힘의 완충지대로서 쓸모가 있다. 사실 이것이 중국이 김정일 정권을 해치우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과 현 북한체제는 이미 공통점을 많이 잃었지만 한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이 압록강을 바로 두고 대치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중국은 잘 알고 있다.

    도광양회 해야 할 중국에 인권 종교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그대로 유입될 경우 동북지방 안정에 이로울 리 없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통일한국의 민족주의가 동북3성(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꽃뱀’이긴 하지만 김정일이 미국과 한국에 일정 수준 ‘독사’ 노릇을 해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다.

    복원될 길 없는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 북중 경계는 중국에 국경 개념보다 ‘변방’ 개념이 강했다. 변방지역에서의 업무도 공안(公安)이 해왔다. 그러나 2003년 9월 국경지역 공안업무는 정규군 담당으로 바뀌었다. 이는 외형적으로는 탈북자를 막고 국경지역에서 발생하는 북한군의 월경(越境)과 강력사건에 대처한다는 것이지만, 이 지역에서 발생할지 모를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측면도 포괄돼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해왔고, 중국식 시장사회주의로 대성공을 거뒀다. 현재의 빈부격차, 부패, 관민 갈등, 금융부실 등은 이 과정에서 빚어진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부작용이 큰 반작용으로 성장해 중단기적으로 중국에 또다시 문화혁명식의 계급투쟁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중국식으로 천천히 결별하면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더욱 뒷걸음쳤다. 이에 따라 북중관계도 멀어졌다.

    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경제제재까지 북중관계 60년
    손광주

    1957년 대구 출생

    고려대 불문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이념연구센터장

    現 북한전문 인터넷 뉴스 The DailyNK 편집인

    저서 : ‘김정일 리포트’ ‘다큐멘터리 김정일’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공저) 등


    김정일 정권이 본격적인 개혁개방 노선을 선택하지 않는 한 북중관계가 과거의 동지관계로 복원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정일은 스스로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 게 현실이지만, 김정일 정권을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주역은 중국이다. 따라서 북한 정권의 운명을 결정할 주도권도 중국에 넘어간 형편이다. 한·미·중 3국이 김정일 정권 처리 문제와 북한의 개혁개방을 놓고 대타협을 해야 할 시기도 점차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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