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는 열하에서 계속된다. 1780년 8월9일부터 14일까지 엿새 동안의 태학관 생활을 전과 다른 시각에서 짚어보려 한다. 베르사유 궁전보다 훨씬 은밀한 매력을 간직한 피서산장의 원림을 둘러보고, 달 밝은 밤 연암이 이국 사내들과 나눈 시적인 천체 이야기를 음미한다. 마냥 부러운 청나라 목축에 비춰 한심스럽기만 한 조선의 목축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연암의 나라 걱정에도 귀 기울여본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
궁전의 뜨락이요 사원의 뒤안
그런데 논증에 앞서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서산장. 피서산장은 알다시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강희 옹정 건륭 3대 제왕이 1703년부터 1792년까지 온 나라의 인력·재력을 동원해 건설한 것이다.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담박경성, 연파치상(煙波致爽) 같은 궁전과 보타종승지묘, 수미복수지묘 같은 사원, 그리고 열하천(熱河泉)을 비롯한 여의호(如意湖), 이화반월(梨花伴月) 같은 원림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궁전과 사원에 대해선 앞서 서술했다. 남은 하나, 원림은 궁전의 뜨락이요 사원의 뒤안이다. 연암은 8월9일자 일기에 피서산장 외곽 쌍탑산과 봉추산외포도, 열하성(熱河城)의 높이와 15km의 둘레, 그리고 담에 새겨진 가요문(哥窯紋)에 대해 기록했다. 가요문은 송대 장(章)씨 형제가 구워낸 도자기 무늬로 얼음이 깨지거나 금이 간 모양이다. 연암은 또 그 담 안으로 36경(景)이 조성돼 있노라 했다.
36경은 강희와 건륭이 고른, 궁전과 원림에서 가장 수려한 36개 지점이다. 궁전과 원림을 포함, 소위 36경은 다만 궁전의 환경을 조성한 게 아니었다. 북방 변강을 통일하고 북방 고원에 황궁과 원림을 건설함으로써 태평성대를 만방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포부의 구현이었다. 피서산장은 강희 옹주 건륭 3대 황제가 북경의 서쪽 교외에 건조한 소위 ‘삼산오원(三山五園)’의 매머드 플랜과 시기를 함께했다.
만수산, 향산, 옥천산을 일컫는 삼산은 북경의 병풍이요, 오원은 북경 서교에 건조된 황가 원림이다. 강희가 서산 동쪽 기슭, 이화원 서쪽에 최초로 건립한 정명원(靜明園), 강희 29년(1690)에 조성된 창춘원(暢春園), 1709년부터 1744년까지 조성된 원명원(圓明園), 그리고 향산에 조성된 정의원(靜宜園)과 건륭 14년(1749)부터 1764년에 걸쳐 완성된 청의원(淸·#54582;園) 등이다.
피서산장은 오원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나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가장 큰 규모이고 구색도 가장 다양하다. 564만㎢에 90년의 세월이 소요됐고, 전(殿)·당(堂)·누(樓)·관(·#53949;)·정(亭)·사(?·대 위에 세운 정자)·각(閣)·헌(軒)·재(齋)·사(寺) 등 각양각색의 인문적 건축물 100여 곳 외에 자연 원림을 포함한 36경이다. 요컨대 인문 문화와 자연원림을 융합한 피서산장은 허(虛) 속에 유(有)를 세웠고, 산속에 호수를 두어 산수를 융합했고, 원림 속에 산과 호수를 만들어 대소와 내외의 구분을 없앴다. 그뿐 아니다. 궁전의 정치와 사원의 종교, 원림의 자연, 그 세 가지가 조화된 유일성을 자랑한다.
회유와 통일
그런 점에서 피서산장은 같은 해에 건조된 영국의 버킹엄 궁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동궁과 함께 세계 3대 황가 궁전으로 불리지만 서양의 그것들과 분명 다른 특성을 보인다. 피서산장보다 약간 앞선 1689년에 완공된 프랑스 베르사유궁과도 구별된다. 피서산장과 베르사유궁 모두 제왕이 정무를 관장하고 외교를 유치하면서 원림의 풍치를 누린 점은 같으나, 피서산장은 은밀한 동방의 산수를 수렴하고 있는 반면, 베르사유궁은 화려한 서양 건축미를 외현하고 있다.
여기에 피서산장의 특성이 있다. 우선 강희와 건륭이 36경의 명칭을 시어(詩語)로 지었는데, 모두 상징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나라의 행정과 국제 외교를 관장하는 정전의 이름을 ‘욕심을 줄이고 공경과 정성으로 몸을 닦는’ 담박경성(澹泊敬誠)으로, 황제가 황후와 비빈의 문안을 받는 곳을 ‘안개처럼 자욱한 물결에 상쾌함을 느끼는’ 연파치상(煙波致爽)으로, 황태후가 거처하는 곳을 송학재(松鶴齋)로, 강희황제가 글 읽는 곳을 ‘일만 개 골짜기로부터 몰려오는 솔바람’ 만학송풍(万壑松風)으로, 호수지역에 환벽이나 여의주 같은 섬끼리 이은 둑길을 난초 핀 오솔길이나 구름 피어나는 방축, 곧 지경운제(芝徑雲堤)로 명명한 것 등이 그렇다. 그것은 다만 시적(詩的)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청나라 황제들의 반박귀진(返朴歸眞)하려는 정치 철학의 반영이다. 곧 소박과 진실로 회귀하려는 중국 전통 사상의 실현인 것이다.
1860년, 영·불연합군에게 파괴되거나 소각당한 圓明園 西洋樓의 현장.
“저 달에서도 땅놀이하겠지”
연암은 궁전과 사원뿐 아니라 그 넓은 원림에도 족적을 남겼다. 건륭의 만수절, 야외 연회가 열린 만수원(万樹園)에선 황제가 준 여지즙을 마셨고, 황제가 반첸 라마를 위한 연회를 베풀던 날은 담 너머 청음각(淸音閣)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등자 하나 놓고 오리가 횃대에 올라서듯 그렇게 구경했다.
그러나 그 영화 또한 200년을 누리지 못했다. 북경의 원림이 외적의 발굽에 짓밟히고 불에 타버린 뒤, 청나라의 대권이 여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피서산장은 은신의 어두운 동굴이 되었다. 불이 꺼지고 궁궐은 황폐해졌다.
연암의 관측, 특히 천체 관측은 매우 시적인 발상으로 시작됐다. 그 최초의 기록은 8월10일자 일기에 나타난다. 연암이 태학관에서 기풍액(奇豊額)과 함께 깊은 밤 달 구경하는 대목이다. 그날 밤도 달이 찢어지게 환했다. 연암은 달을 보며 저 달 속에도 땅이 있으리라 상상했다. 그 땅에 사람이 있다면 여기 지구의 우리처럼 난간에 기대고 서서 땅 빛이 달에 가득 비추고 있노라고, 우리가 땅에서 달놀이하듯 달에서도 땅놀이하겠지 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이다. 이 우주의 구도를 상대적으로 보고 대칭적으로 상상했다. 하늘에 떠 있는 초가집 세 칸이 아니라 천체의 하나로서 땅을 지니고 있겠거니 하며 위성으로 본 셈이다.
연암은 8월13일에 또 기풍액을 만나 달밤을 거닐었다. 태학의 중앙인 명륜당 그 난간을 거닐면서 본격적으로 달을 관측했다. 그날 밤 연암과 기풍액은 땅이 모가 나 있으리라는 ‘지방(地方)설’을 부정하고, ‘지원(地圓)설’ ‘지전(地轉)설’을 주장했는데 그 논증의 전개 또한 몹시 시적이다.
예를 들어 해와 달이 돌고 도는 것을 수레바퀴나 쐐기에 비유한 것이 그렇다. 거기에 지축이 있다는 말이요, 지축은 가만있는데 그 몸뚱이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돈다고 했다. 또 땅이 둥글다는 이치와 땅의 아침과 저녁, 그리고 봄과 가을이 바뀌는 까닭을 창 아래 햇살 비추는 자리에 맷돌을 놓고 먹 자욱을 남기는 방법으로 그 둥과 햇살의 전이를 확인했다. 등불 앞에 물레를 두고서는 물레가 돌때 물레바퀴 군데군데 등불이 비치는 것을 확인했다. 창구멍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맷돌에다 표시하면서 ‘지전’을 논증했다. 등불 앞에 물레를 놓고 그 바퀴를 돌리면서 불빛을 받는 물레로 ‘지원’을 논증했다. 천체의 자전과 공전 그 냉엄한 물리를 설명하는 데 맷돌이나 물레 같은 농가의 기구를 활용하고, 햇살이나 먹 자욱 같은 소년적 체험으로 그 변화를 증언한 것이다.
연암은 기풍액에게 ‘만물개원(萬物皆圓)설’을 역설했다. 땅 위의 모든 것은 둥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오해와 착각을 먼저 불식했다.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사계절이 오고 가고 하는 기존의 ‘천원지방(天圓地方)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면서 해와 달과 땅은 허공에 둥둥 뜬 별임을 주장했다. ‘일지월등, 부라대공(日地月等, 浮羅大空)’이라고. 이는 물론 연암이 김석문(金錫文·1658~1735)의 ‘삼환부공(三丸浮空)설’을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적 감흥과 실학적 진취
물론 연암이 천체 관측의 일인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200여 년 앞서 조선 선조 때 조선 실학의 선두인 이수광(李?光·1563~1628)이 1603년 몇 나라로부터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万國全圖)’라는 세계 전도를 조선에 들여오고, 정두원(鄭斗源·1581~?)이 1631년, 후금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구나 ‘서양건상도(西洋乾象圖)’ 등을 가져오면서 서양의 천문학과 접촉을 벌인 바 있었다.
조선은 1653년 서양 역서(曆書)를 수용하면서 이제까지 개천(蓋天)설·혼천(渾天)설 등 전통 형이상학적 구조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김석문을 비롯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 등의 지전설과 지원설이 실학파 학자들에게 유포됐다. 연암은, 그러한 각성이 일기 시작한 18세기 초, 이른바 제왕지학(帝王之學)이라 하는 조선 전통의 천문학에 ‘지동설’이 알려진 시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발견은 다만 김석문이나 홍대용 학설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그만의 시인적 감흥과 실학적 진취성에 따른 전신적 투입이랄 수 있겠다.
承德府學(일명 열하태학관)자리에 承德市 제8중학교가 있었다. 2007년 8월 현재 부학을 복원키 위해 제8중학은 이사를 갔다.
그날 밤 닭이 두 번째 홰를 치도록 나누던 방담에 우리를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방담의 일부가 ‘황교문답(黃敎問答)’에 실렸는데, 황교는 티베트 지방에 성행하는 라마 불교의 별칭인바 ‘황교문답’은 그에 관한 역사·교리·현실 등을 문답식으로 풀이한 부록이다. 조선인으로서 황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터. 그래서인지 연암은 그 벽두에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겪는 여섯 가지 어려움을 설파했다. 그것은 단순히 황교 입문의 어려움일 뿐 아니라 외국 문물 고찰에 따르는 보편적인 어려움일 것이다. 필자는 이를 ‘출국고찰6난(出國考察六難)’이라고 요약해보았다.
연암은 먼저 덜렁이 외국 여행자를 비꼬았다. 외국에 나가 대강대강 둘러보곤 ‘적정(敵情)을 잘 살폈다’느니 ‘풍속을 알았다’느니 큰소리치는 덜렁이를 야유했다. 그러고는 여섯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길잡이를 찾기 어려움이요, 둘째는 통역을 얻기 어려움이요, 셋째는 중국과 외국인 사이에 형적이 다름이요, 넷째는 말이 옅거나 깊어도 실정을 알기 어려움이요, 다섯째는 묻지 말아야 할 일을 물어서 정탐의 혐의를 받는 어려움이요, 여섯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할 수 없듯 그 나라의 금역을 알아야 그 나라의 도를 말할 수 있는 어려움이다.
일곱 가지 한심한 일
한 시민, 한 벼슬아치가 외국에서 겪는 어려움과 지켜야 할 매너를 조선의 일개 비공식 수행원 박지원이 230년 전 입김으로 밝혔다. 당시의 국제 매너를 짚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나 연암은 오늘처럼 국제간의 질서와 친목이 당위시되고 또 오늘처럼 국제간 경쟁과 반목이 치열해질 것을 미리 내다본 셈이다.
8월14일, 연암에게는 뜻 깊은 날이었다. 아침에 생각 없이 대문을 나섰다가 목동 하나가 수숫대 한 개비로 수백 필 말 떼와 30~40마리 황소떼를 고삐나 그물은커녕 코도 뿔도 꿰지 않은 채 몰고 가는, 그 유유한 행렬을 보고 감탄했다. 평소 가슴에 묻어뒀던 가축 몰이나 말 기르기에 대한 생각이 부스스 일어났다.
목축에 대한 이야기는 길다. 앞에서 천체 관측이 달구경에서 시작하듯 목축에 대한 이야기는 수백 필 말떼와 수십 필 소떼, 수십 마리 당나귀가 수숫대 한 개비와 막대기 하나에 질서가 잡히는 것을 보고 시작됐다. 그렇게 방목하는 열하의 가축을 보고 연암은 숙소로 돌아왔다. 집 밖에 매어둔 말 꼴을 보니 그 몰골이 더욱 초라하고 한심했다. 그래서 조선의 명목을 지키는 제주도 목장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목장의 여덟 가지 한심한 일(我東牧場, 八大寒心事)’을 비롯, 축목상의 금기, 번식 방법, 행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풀었다.
이야기는 탄력이 붙어 목축은 단순한 목마(牧馬)에 그치지 않고 목민(牧民)을 간접 암시하거나 직접 설파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을 백성으로 대체했을 때 그 뜻이 뜨겁게 달궈졌다. 아니, 연암의 이 글은 당장 정치 담론으로 훌쩍 탈바꿈할 수도 있었다.
그중에도 ‘칠대한심사’는 절묘하다. 목축이란 측면에서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임은 물론이요 그 지적의 비유나 상징의 패러독스가 튕기듯했다.
첫째, 조선 최대 목장인 탐라의 말들은 원나라 때 방목한 종자인바, 사오백년을 두고 개종하지 못한지라 느림뱅이 꼬마 말로 변했거늘, 이 느림뱅이 꼬마 말로 대궐을 지키고 적진을 찌르겠다니 한심한 일이요. 둘째, 대궐용 준마가 대부분 요동·심양 등지서 사들인 말이요, 토산이란 한 마리도 없거늘 어느 날 요동·심양길이 막히면 말의 공급원이 없어져 한심한 일이요. 셋째, 백관이 말을 빌려 타거나 나귀로 대신하거늘 이런 꼴로 궁궐의 위엄을 갖출 수 없어 한심한 일이요. 넷째, 옛날 문관이나 대부의 지체를 수레나 말로 시위했는데 지금 조선 대부의 마당에 수레 열 채는 고사하고 단 두 채가 없음이 한심한 일이요. 다섯째, 높은 무관은 졸개 100명쯤은 거느릴 터에 말 한 마리조차 삯말을 내어 전장에 나간다는 소문이 한심한 일이요. 여섯째, 무관이 이럴진대 기병은 어이할까. 기병조차 이름만 지닐 뿐 실상이 없음이 한심한 일이요. 일곱째, 토산 말인 데다 쌍가마를 끌고, 쌍가마엔 잔뜩 무거운 짐을 싣고 교자꾼조차 말에다 몸을 싣듯 붙어서 가거늘 말이 달릴수록 짐이 짓누르니 말이 죽지 않으면 병들 수밖에 없는 일, 어찌 한심치 않으랴.
연암의 한탄은 계속된다. 말이야 죽든 말든 산더미처럼 짐을 싣고, 먹이느니 더운 여물죽이요, 시도 때도 없이 흘레붙이거늘 정강이는 힘을 못 쓰고 발굽이 말랑하여 풍기 들고 망가질 뿐 한심한 일이 어찌 이뿐이랴. 그야말로 불행의 극치요, 말로의 징후다. 모두 주인의 무지와 과욕이 빚은 결과다.
뜨거운 여물에 소금을 뿌려주니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明倫堂 지붕이다.
연암은 말을 사람으로 보았다. 사람이 고달프면 쉬고 배고프면 먹이를 찾듯,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편한 옷가지를 선호하고 그 어떤 굴레에서도 벗어나고 싶듯 말도 그러하다. 말도 지치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시원한 데를 찾고, 배고프면 들녘에서 잡초를 뜯고 싶다. 한시라도 굴레를 벗어나서 견마잡이의 관제를 뿌리치고 마음대로 긁고 마음대로 뒹굴고 싶다.
연암은 또 조선의 말잡이가 말을 잘 먹이지 못한다며 분개했다. 말은 본디 익힌 음식을 싫어하고 찬물을 좋아함에도 조선의 목마꾼들은 그걸 몰랐던 것. 기껏해야 뜨거운 여물에 콩을 삶고 거기다 소금을 뿌려주었으니…. 그러한 까닭에 말이 신열을 보이면, 신열을 없앤다고 또 더운 죽을 먹였다. 냉수를 먹으면 정강이와 발굽이 단단해지는데 말이다. 결국 느림뱅이 꼬마 말이 되고 마는 것은 삶은 콩을 넣어 끓인 죽 탓이다. 얼마나 엉터리 목축인가.
연암은 애써 말을 잘 기르기보다 좋은 씨 받는 일이 관건임을 주장했다. 그는 먼저 중국의 ‘주례(周禮)’나 ‘예기(禮記)’의 ‘월령(月令)’ 편 기록을 빌려 번자(蕃·#54870;) 방법을 피력했다. 그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당나라 때부터 중국 서북 변방인 감숙 땅에 목마장을 개설하고, 정관(貞觀) 연대에는 70만 필로 불어났고, 개원 13년(725) 명황이 태산에 제사할 때 그 행차에 동원된 수만 필 말의 대열이 비단필처럼 휘황찬란했다고 인용 술회했다. 말은 과연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다.
기껏해야 베갯머리 울리고
부국강병의 상징인 말은 그냥 생기거나 퍼지지 않는다. 우생학적인 연구를 따라 넓은 목장에서 충분한 영양 공급을 하고 운동을 시켜가며 길러야 한다. 연암은 말이 크고 건장한 데다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작은 종자에 취약한 체질, 노둔한 신경은 못쓰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종자를 개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기운과 혈기 넘치는 흘레 말을 확보해 늦은 봄 3월쯤에 암놈이 있는 목장에 풀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수놈을 거세하고 말이 새끼를 배었을 때는 수놈의 접근을 막으라고도 했다. 연암의 종자 개량을 위한 진흥은 자질구레하다 싶을 만큼 구체적이다. 옛 선왕의 ‘순시육물(順時育物)’, 곧 자연의 시순을 따라 만물을 육성한다는 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연암의 이용후생을 통한 우국우민의 발로였다. 오늘에 태어났더라면 ‘목축입국(牧畜立國)’이란 표어를 내놓았을지 모른다. 그가 8월14일자 일기에서 고백했듯 연암이 황해도 연암에 낙향한 것은 목축에 뜻을 뒀기 때문이다. 거기 첩첩 산중, 수초가 좋은 편편한 골짜기가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고, 나아가서 조선이 가난을 벗지 못한 까닭은 바로 목축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연암은 조선 목축의 현주소와 목축을 관리하는 관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질타했다. 개종도 하지 않고 수입도 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둔다면 조선의 말은 모두 당나귀가 될 거라 내다봤다. 꼬맹이 말을 연암은 ‘침마(枕馬)’라고 했다. 지독한 풍자다. 늦가을에 난 서리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으면 꼬마 닭이 되는데 그 새끼의 울음이 기껏해야 베갯머리를 울린대서 ‘침계(枕鷄)’라 했다. 마찬가지로 말 종자가 작아져 베갯머리의 담배통을 구유로 쓸 수 있겠다면서 ‘침마’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했다. 감목(監牧)이란 자가 있지만 말을 먹이거나 말에 관한 허드렛일은 하지 않았다. 목마에 대한 지식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하인을 부렸다. 말을 알고 말을 만지는 관원은 오히려 좀스럽다는 비방을 면치 못했다.
“달밤이면 당신 생각에 어찌 견디랴”
그날 오후, 세 명의 조선 사신이 대성전을 참배했다. 연암은 많은 성철 가운데서도 유독 주자의 위패를 주목했다. 주자의 석차가 열한 번째로 올랐더라 했다. 위패마다 붉은 운문단 휘장을 늘였고 작은 향로 한 개씩을 세워두었다. 그 외벽에는 황제의 훈시와 학규들이 빗돌에 새겨 있었다고 했다.
어스름 저녁, 연암은 황제로부터 다음 날 북경을 거쳐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물론 불시다. 연암이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곳을 다음날 바로 떠나야 했다. 울분을 삭일 수 없었다. 북경으로 입성하라는 날도 그랬거니와 열하로 오라는 날도 조선 사절이 정한 일정이 아니었다. 들고 나고, 만나고 물러서는 모든 의전을 청나라 황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밤이 이슥하도록 떠날 채비에 바빴다.
지난 엿새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최고의 학습이기도 했다. 연암은 중국의 학자 왕민호(王民?, 호는 곡정(鵠汀)), 학성(?成, 호는 장성(長城)), 윤가전(尹嘉詮, 호는 형산(亨山)), 기풍액(奇豊額, 호는 여천(麗川)) 등과 천문·음악·종교·경전·역사·정치·풍속 등을 토론했는가 하면 많은 것을 참관했다. 거리에 나가 요술을 구경했고 원림에 들어 희곡을 보았다. 사원에 가선 정각 꼭지에 세운 황금색 호로병을 구경하기도 했다. 조선 사신이 황제에게 올리는 3배9고두를 보았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꼼짝없이 활불 반첸을 뵈러가는 사절의 무거운 발걸음도 보았다.
어찌 보면 욕스럽기도 했지만 이전까지 열하에 와본 조선 사절이나 선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만 더 묵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연암은 무엇보다 엿새 동안 교유했던 중국 친구들이 떠올랐다. 당장 그날 밤, 고별 인사를 해야 했다. 만주 사람(원래는 조선계)으로 귀주(貴州) 안찰사인 기풍액, 강소 사람으로 과거를 준비 중인 왕민호, 안휘흡현 사람으로 산동도사(山東都司)인 학성, 그리고 박야(博野) 사람으로 대리사경(大理寺卿)에서 은퇴한 윤가전을 차례로 찾아갔다. 학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만났다. 갑작스러운 이별의 슬픔을 누르지 못한 채 모두 눈물을 뿌렸다. 모두가 ‘달밤이면 당신 생각에 어찌 견디랴’했다. 기풍액과 윤가전, 두 사람과는 북경에서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연암의 그림자 위에 살포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내끼리, 통역을 세우거나 필담을 나눈 달빛 속 만남이 그토록 아쉬운 눈물을 빚을 줄이야. 필자는 두 나라 문학사 속에 한·중 문인이 만나서 포옹하고 헤어지며 감루하던 장면을 여럿 기억하고 있지만 연암의 그것처럼 영롱하고 짙은 물방울이 얼마나 더 있을까 싶다.
필자는 열하의 승덕부학(承德府學)에 서 있었다. 연암이 말한 태학관이다. 태학은 북경에 있는 최고학부를 일컫는다. 그러한 명칭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이번처럼 천체의 관측이나 목축에 대한 논증, 그리고 중국 선비들과 대담했던 곳, 말하자면 그 무대의 중심에 서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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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민호와 함께 악기를 구경한 시습재, 수백 필의 말떼를 만난 태학관 문 앞, 윤가전과 함께 목축을 토론한 수업재, 세 명의 조선 사신이 공자사당을 참배할 때 주자의 위패를 본 대성전, 달을 보면서 천체를 논했던 명륜당 난간, 열하에 입성하던 날 밤 연암이 교교한 달빛 아래 같이 놀 사람 없어 슬퍼한 명륜당 뒤뜰…. 그 모두가 부학에 모여 있었다.
그것들은 아직 자취가 완연했다. 대성전은 아직도 우뚝하고, 명륜당 시습재 수업재의 지붕과 추녀, 벽돌담은 역연했다. 한 늙은이가 뼈는 남은 채 살이 삭듯, 오직 그때의 모습으로 남았으리라 믿어지는 것은 명륜당 뒤뜰의 고목들 그 짙푸른 그늘이었다. 필자는 요 몇 년 동안 연암의 그림자 찾기에 미친 이처럼 쏘다녔다. 여기서만은 연암의 그림자 위에 내 그림자가 얹혔으리라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