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플래닛의 ‘플래닛X 데모데이’에서 직원들이 벤처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있다.(왼쪽) SK플래닛이 지원한 사내벤처 ‘아이마그넷’.
1990년대 후반 ‘닷컴 열풍’이 불자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사내벤처 제도를 도입했다. 우수 인력 유출을 막고 IMF 외환위기에서 탈출하게 해줄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내 ‘닷컴 버블’이 사라지면서 대기업의 사내벤처 제도는 이름만 남았다. 하지만 최근 창조경제를 독려하는 새 정부 흐름에 따라 사내벤처 제도가 부활할 조짐이 보인다.
SK텔레콤 출신의 직장인 백은수 씨는 지난해 SK플래닛의 지원을 받아 사내벤처 ‘아이마그넷’을 창업했다. ‘아이마그넷’은 모바일 미술 큐레이션 애플리케이션으로 신진 미술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유통한다. ‘아이마그넷’은 창업 1년차에 매출 2억3000만 원을 기록했다. SK텔레콤 취업 전 벤처 창업 경험이 있는 백씨는 “대기업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늘 ‘나만의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회사의 도움으로 꿈을 이뤘다”고 말했다.
사내벤처 ‘네이버’를 성공시킨 삼성SDS도 2011년부터 벤처기업 발굴 프로그램인 ‘에스젠(sGen)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삼성SDS 측은 독립적인 사무공간과 분야별 멘토링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한때 싸이월드를 필두로 온라인 커뮤니티 업계를 이끌던 SK커뮤니케이션즈 역시 최근 사내벤처 전담팀 ‘미근동 공작소’를 선보이며 사내벤처 지원에 열을 올린다. 또한 온라인 기업인 다음커뮤니케이션도 최근 자동차 애프터마켓 관련 사내벤처 ‘카닥’을 분사했다.
창업을 꿈꾸는 직장인에게 사내벤처는 꿈과 같다. 사내벤처로 선정되면 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고용을 보장받으면서 기업가로서 자유롭게 창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 한 사내벤처 지원자는 “창업을 하면 가장 어려운 것이 투자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인데 모기업이 투자해주거나 혹은 투자자를 찾아주기 때문에 가장 큰 걱정을 덜게 된다”고 말했다.
SK플래닛의 지원을 받은 사내벤처 ‘아이마그넷’은 웹과 모바일을 통해 신진 미술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유통한다.
기업 처지에서는 사내벤처를 통해 우수 인재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내벤처라는 제도를 통해 작은 투자로 신규 사업 성공 여부를 타진할 수 있어 이익이다. 게다가 성공할 때에는 장기적인 신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다수 기업이 급속한 성장 이후 ‘챔피언의 저주’에 빠져 혁신을 중단하는데, 사내벤처는 이를 막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사내 기업가 정신 분야의 전문가인 도나 켈리 미국 뱁슨대 교수는 지난해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의 인터뷰에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효율성이 중요해지면서 기업가적 정신이 사라지기 쉽다”고 경계하며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리스크를 적극 감수하는 도전적 인재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내벤처는 어떻게 선정될까? SK플래닛의 경우 투자할 사내벤처를 선정하기 위해 일종의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을 도입했다. 회사는 격월로 ‘플래닛X 데모데이’를 열어 사내벤처 지원자를 받고, 공개 발표를 하게 한다. 이는 회사 모든 구성원에게 공개되고, 이후 구성원들과 전문평가단에게 60% 이상 지지를 받은 제안서는 인큐베이션 단계로 넘어간다. 최장 90일간 사업 구체화 과정을 통해 ‘재평가’를 받고, 여기서 70% 이상 지지를 받으면 본격 창업이 가능하다. 2년간 공개 발표된 아이디어는 총 30여 개. 그중 6개 벤처가 창업했다. SK플래닛은 CEO 직속으로 사내벤처 전문팀을 신설하는 등 사내벤처 제도를 적극 지원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대기업에 사내벤처 제도는 ‘그림의 떡’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5월 직장인 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신사업을 독립적으로 추진하는 사내벤처제를 도입한 기업은 6.7%, 아이디어를 제공한 직원에게 사장 권한을 부여하는 ‘소사장제’를 도입한 기업은 2.4%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상공회의소 측은 “한국 특유의 상명하복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 때문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본래 회사의 직원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데, 사내벤처는 직원에게 다른 아이템으로 창업할 길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이처럼 태생적으로 사내벤처라는 제도 자체는 모순적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당장 변화가 아니면 죽는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지만 현재는 체제가 안정적이어서 대기업들이 굳이 사내벤처 제도를 도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재 ‘창조경제’의 기치를 든 정부에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형식적으로 사내벤처 제도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문 강원대 경영학과 교수 역시 “대기업들은 2000년대 초반 우수 인력이 유출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사내벤처를 적극 지원했지만, 이제는 원하면 언제든지 우수 인력을 뽑을 수 있다. 회사로서는 사내벤처에 큰 지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대학 협력 ‘신 사내벤처’
이 때문에 상당수 대기업이 운영하는 사내벤처들은 ‘용두사미’ 식으로 사라진다. 2000년대 초반부터 SK텔레콤은 “업무시간의 10%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데 투자하자”고 직원들을 독려했지만 사업화로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결국 2011년 SK텔레콤의 사내벤처 제도는 자회사인 SK플래닛에 모두 이관됐다.
그렇다면 ‘네이버’와 같은 사내벤처 신화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경험 없는 직원의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화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한국산업기술대 박 교수는 대기업 벤처와 대학 연구소가 협력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내벤처 제도를 제안했다. 그는 “대기업이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대기업의 틀 안에서 최대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게 대학 연구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들이 유연한 고용구조 및 협력 체제를 이용해 시너지 효과를 냈듯, 대기업 사내벤처도 대학 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사업 성공률을 높이라는 것.
강원대 박 교수는 “사내벤처는 모기업이라는 ‘울타리’ 덕분에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 결과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경고하며 “사내벤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모기업 역시 사내벤처에 대한 지원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명시화하고, 그 안에 분사(스핀오프)할 수 있도록 주력하라고 덧붙였다. 제2의 ‘네이버 신화’를 위해서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21세기형 사내벤처’가 절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