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겼다.
-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공순이’나 ‘식모’로 불린 수많은 소녀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기념비다.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초입에 있다.
1972년 정두수의 노랫말에 박춘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이농(離農) 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어린 노동자들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슬픔을 형상화했다. 도시로 몰려든 그 시절 가난한 한국인에게 전대미문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통해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쓰라린 슬픔을 노래했다.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 다 가도록 소식조차 없는’ 떠난 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온다. 너무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노래 밑바닥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남진의 ‘님과 함께’와는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다’는 ‘님과 함께’는 고향을 떠나온 어린 노동자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자신들의 꿈과 이상향을 노래했다. 산업화 시대에 불가능한 꿈을 노래로나마 불렀던 것이다. 힘든 야간작업을 마친 지친 노동자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로 노동 현장에서 겪는 고통과 향수를 노래하고 ‘님과 함께’를 통해 불가능할지 모르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 틀림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무했던 것이다.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평론가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두고 한국 트로트 역사에서 혁명적인 노래쯤으로 평가한다. 일본 엔카가 가진 섬세하고 유약한 여성적인 발성의 틀에서 벗어나 다이내믹한 ‘뒤집기와 꺾음’을 통해 강인한 남성상을 극적으로 구현하는, 이른바 대륙적인 울림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기실 ‘물레방아 도는데’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기러기아빠’ ‘섬마을 선생님’을 번갈아 들어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창법도 창법이지만 노래는 슬프고도 짠한, 그래서 종국에는 가슴 쓰리게 하는 노랫말로 개발시대 한국인들로부터 상상을 뛰어넘은 사랑을 받게 된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로 시작하는 가사는 ‘공순이’나 ‘식모’로 불렸던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소녀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았다.
‘공순이’는 서러웠다. 가난하니 못 배웠고, 못 배웠으니 무식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 대부분은 가부장적이고도 ‘남존여비’의 유산 속에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떠난다. 속옷에다 작은 돈주머니를 달아주던 어머니를 눈물 속에 뒤로하고 서울로 온 그들이다. 이런 까닭에 1970년대의 여공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화려한 구로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한 그 시절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여공은 국졸 혹은 국교 중퇴가 대부분. 영어로 된 라벨을 다는 것은 한글도 모르는 소녀들에게는 고역이었고 M과 W를 혼동해 작업반장에게 따귀를 맞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촌향도(離村向都) 정서를 담은 노래는 역시 나훈아가 부른 ‘고향역’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물레방아 도는데’가 떠난 이의 노스탤지어라면 ‘코스모스 피어 있고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는 고향역’은 명절을 맞아 찾은 고향에 대한 짧은 순간의 환희를 노래한 것쯤으로 이해된다. ‘흰머리 휘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이란 노랫말은 곧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슬프고 비장감이 살아 숨 쉬는 노래다. 그 시절의 분노와 슬픔이 구석구석에 꾹꾹 숨어 있다. 이 노래에 3년 앞서 1969년 패티 김이 발표한 ‘서울의 찬가’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가 즐거운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는 노래는 그 시절의 정서로 봐서는 가식적인 노래일 뿐이다.
명절날 서울에서 한아름 선물을 안고 고향에 내려온 이 땅의 공순이들의 얼굴은 하얘져 있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졸음을 바늘로 찔러가며 참아내고 공장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시달린 전쟁과 같은 밤샘근무 때문에 몰라보게 하얘졌던 것이다. 이는 곧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여도,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어도, 하얀 불빛 아래에서 새하얀 얼굴이 되더라도 미싱을 돌려야 한다’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풍경 그대로다.
‘물레방아 도는데’의 작사가 정두수 씨가 자란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옛집. 지금 귀농한 도회인이 살고 있는 옛집에는 박태기나무에 꽃이 한창이다.
그러나 이같이 떠밀려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의 한국인을 위로했던 노래의 탄생 계기는 조금 다르다. ‘물레방아 도는데’의 작사자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두수(77) 선생이다. 노래가 탄생한 1972년은 작사자 정두수 역시 이촌향도의 거대한 물결 속에 서울에 온 지 6년째 되던 해. 하동 출생으로 부산 동래고와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다. 6년 전 작고한 시인 정공채 선생의 동생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는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끌려간 삼촌을 그리는 조부의 마음을 생각하며 붙인 노랫말이다. 동경 유학생이던 집안의 기대주 삼촌은 학병이라는 띠를 두르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징검다리 건너갈 땐 손을 흔들며’ 떠났지만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다. 감꽃이 떨어지던 날, 하얀 천에 휘감긴 상자로 돌아온 삼촌을 보고 울음을 삼키던 조부를 회상하며 지은 노래다.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지리적 배경은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마을 주민 대부분이 하동 정씨다. 금오산 자락에 안긴 성평리는 주교천이 휘감아 흐르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물레방아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어린 정공채, 정두채(정두수의 아명) 형제가 뒹굴던 그 옛날의 집은 지금도 건재하다. 박태기나무에는 붉은 꽃이 만발하고 넓은 마당에는 작약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정강채(83) 할아버지는 공채, 두채 형제의 먼 친척, 아득한 그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아름답기로 치면 하동 포구를 따라올 데가 조선 천지에는 없다”는 그는 지금은 주교천(舟橋川)으로 불리는 배다리까지 ‘왜정 때에는’ 섬진강을 끼고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물산이 풍부한 하동 포구에 사람이 몰렸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빼어난 풍광 덕분에 공채, 두채 형제가 이름을 날리게 됐다는 것이 강채 할아버지 나름의 분석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하동 정씨라 살아생전에 가끔 찾아왔지만 작고한 이후에는 현대그룹 사람들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고 서운함을 내비친다.
그러나 노래의 주인공쯤 되는 물레방아는 없고 흔적만 남았다. 옛날 자리에서 옮겨져 복원된 물레방아는 마을 입구 조그만 기념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언덕 밑을 감아 흐르는 배다리천 징검다리는 그 시절 노랫말에 등장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다. 때마침 고전초등학교에는 봄철 부락 대항 운동회가 열렸다. 황토 운동장에는 솜사탕 기계가 돌아가고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인다. 아, 얼마 만에 보는 만국기이던가! 만국기 아래 고전면 일대 마을 대표들이 윷놀이에, 줄다리기에 열심이다. 선수래야 육칠십대 노인이 대부분이고 젊은이는 이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득한 시절, 이곳 초등학교에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했던 코흘리개 그들이 60, 70년이 지난 오늘,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다시 운동회를 하는 모습에 묘한 기분이다. 가슴이 울컥해진다.
물레방아 도는데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 봄이 오기 전에 잊어 버렸나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이 다가도록 소식도 없네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작사가 정두채(두수) 선생의 친척인 정강채 할아버지(83). 여든 넘은 나이지만 손수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나들이를 할 만큼 젊음을 자랑한다(왼쪽). 손수건을 달고 입학했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칠팔십 노인이 되어 운동회에 참석했다. 1929년 개교한 하동군 고전면 고전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경남 하동군의 ‘물레방아’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내가 세상에 나와 그때까지 봤던 것 중에 제일 높은 것.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는 대우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여명 속의 거대한 짐승 같은 대우빌딩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쳐다본다.”
작가 신경숙의 말이다. 작가 신경숙은 열여섯 살에 처음 서울을 경험했다. 1970년대 중반 전북 정읍에서 상경한 시골 소녀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 맨 처음 본 건 거대한 갈색 빌딩. 들판만 보고 자란 소녀에게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은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작가는 그때의 충격을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이와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일면식도 없지만 신경숙을 좋아한다. 그가 가진 그 시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얼마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금이 있는 자리’ 등 그의 초기 작품을 읽노라면 이 땅의 가녀린 어린 딸들이 지난 시절, 이촌향도의 거센 풍랑 속에 얼마나 곤고한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에게 억누를 수 없는 송구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나의 마음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들으며 가짜 풍요가 넘치고 넘치는 오늘 문득 비감해진다. 그러나 고향의 물레방아는 더 이상 돌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은 갔다.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