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혜자원이 풍부한 산둥은 예부터 공자, 강태공, 제갈량 등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산둥인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 삼기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 이런 산둥과 한국은 고조선 때부터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어린 소녀들뿐만이 아니다. 칭다오에 놀러온 중국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바닷물을 발로 차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며 일생에 하기 드문 바다 체험을 즐기고 있었다. 내륙국가 중국의 특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닷가에 사는 중국인들은 산둥이 별로 안 신기할까. 2박3일간 기차를 타고 푸젠에서 산둥까지 온 친구는 “산둥은 온통 평야구나!”라며 감탄했다. 장저우 산골에서 태어나 산이 많은 푸젠에서 자랐기에 산둥의 넓은 평야가 마냥 색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중원 평야와 황해 바다가 만나는 곳. 산둥성은 땅과 물의 이점을 활용해 일찍부터 부강함을 자랑하던 곳이다.
東夷의 땅
산둥성의 약칭은 ‘노나라 노(정자는 魯)’ 자다. 우리에겐 공자의 고향으로 친숙한 곳이다. ‘산둥(山東)성’은 태행산(太行山)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한족들이 황하 중류, 태행산 서쪽의 중원에 살 때 동쪽에 사는 오랑캐들을 뭉뚱그려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산둥 지역은 내이(萊夷) 등 여러 이민족이 살던 동이의 땅이다.
산둥은 주나라 초기 때 중국에 포섭됐다. 주무왕(周武王)은 일등공신 강태공을 제나라의 제후로, 조카를 노나라의 제후로 봉했다. 재능이 뛰어나지만 한 핏줄이 아니라 왕실에 위협이 될지도 모를 강태공을 변방으로 보내 새 영토를 개척하게 하고, 그 중간에 친척을 둬 제를 견제하게 했다.
당시 제 지역은 한족의 미개척지였고 내이의 세력이 강해 기반 닦기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군략과 내정에 모두 뛰어난 강태공은 성공했다. 사마천이 경제를 논하며 제나라를 첫 사례로 꼽을 만큼 제의 성장은 눈부셨다.
이전에 태공망이 영구(營丘)에 봉해졌을 때, 그곳 땅은 소금기가 많고 백성이 적었다. 그래서 태공망은 부녀자들의 길쌈을 장려해 기술을 높이고, 또한 각지로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켰다. 그러자 사람과 물건이 줄을 지어 잇달아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천하에 관, 띠, 옷, 신을 공급하였고, 동해와 태산 사이의 제후들은 옷과 관을 바로하고 제나라로 가서 조회하였다.
-사마천 ‘사기’ 중 ‘화식열전’
제나라는 명재상 관중을 만나 전성기를 맞았다. 상인 출신으로 경제에 밝은 관중은 부국강병의 계책을 묻는 제환공에게 명쾌하게 답한다. “농민들의 일할 시간을 빼앗지 않으면 그들은 부유해질 것입니다. 가축을 빼앗지 않으면 소와 양이 번성할 것입니다.” 관중은 일상 영역은 자유방임하고, 당시의 핵심 전략산업인 철과 소금은 국유화해 단시간에 제나라를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다. 제나라는 춘추시대 140여 나라 중 ‘베스트 5’인 춘추오패(春秋五覇)였고, 전국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도 부강한 나라에 속했다.
한편 노나라는 주왕실과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정통성이 강했다. 노나라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변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를 살폈다. 뛰어난 정보력과 대의명분에 입각한 외교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겨 국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했다. 공자는 노나라의 역량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공자의 육예(六藝)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는 정치외교, 문화예술, 국방, 행정, 경제 등을 총괄하는 실용학문이었다.
우리 귀에 익은 태산(泰山)은 산둥성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는 1532m로 백두산, 한라산보다 한참 낮다.
태산, 황하, 공자
산둥성은 ‘제노의 땅(齊魯之地)’으로서 제나라의 하드 파워와 노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드넓은 평야에 황하와 제수(濟水)가 흐르고,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농수산업이 중국 내 1위, 인구가 9637만 명으로 2위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금, 은, 유황, 석고 매장량이 중국 1위, 석유는 2위다. 풍부한 자원 덕에 예부터 기초산업과 교역이 발달했다. 지리적 요충이기도 해서 내륙으로는 중국의 양대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고, 해외로는 한국, 일본과 통한다.
인재도 많다. 800년 주나라의 역사를 연 강태공, 제나라를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든 관중, 지략의 대명사 제갈량은 중국사 최고의 명재상이다. 뛰어난 사상가도 많아 유가의 공자와 맹자, 묵가의 북자, 병가의 손무 · 손빈 · 오기 등 제자백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산둥에서 활약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신비한 자연은 도교와 문학에도 영향을 줬다. 전진교를 발전시킨 구처기 등 전진칠자(全眞七者), 중국 최고의 재담가로 손꼽히는 동방삭, 판타지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쓴 포송령도 산둥인이다.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중국 어린이들(위). 아래는 중국 전통 건축물과 근대 독일 건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개성을 발산하는 칭다오.
이처럼 산둥은 자랑거리가 많다. 그러나 호방한 산둥인은 한마디만 한다. “하나의 산, 하나의 강, 하나의 사람!” 하나의 산이란 산의 대명사 태산이요, 하나의 강이란 중화 문명의 젖줄인 황하요, 하나의 사람이란 지고무상의 성인 공자를 가리킨다. 중화의 정수가 모두 산둥에 있다는 말이다.
‘갈수록 태산’ ‘걱정이 태산’ ‘티끌 모아 태산.’
태산에 대한 말은 너무나 많아서 마치 옆 동네 산처럼 친근하다. 높은 산의 대명사인 태산은 얼마나 높을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높다면 해발 3000m? 5000m? 의외로 태산의 정상 높이는 1532m에 불과하다. 백두산, 한라산은 고사하고 덕유산, 태백산보다도 낮다. 북한을 제외하고 남한의 산만 따져도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높이다.
그렇다면 왜 태산이 산의 대명사가 됐을까.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고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원인에게 황해가 시작되는 산둥반도는 세상의 끝이었다. 태산은 화북평야에 우뚝 서서 태양이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본다. 삼라만상을 기르는 태양에 소원을 빌기에 완벽한, 천연의 제단이다. 진시황이 태산에서 천하통일을 완수했음을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봉선의식을 행한 이래 한무제, 광무제, 당고종, 강희 · 건륭제 등 걸출한 황제들이 태산에서 천하의 안녕을 빌었다.
게다가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유학이 동아시아의 지배사상이 되자 태산은 중화문명의 정수가 깃든 곳으로 승화한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강희제는 “태산의 맥이 장백산에서 온다(泰山山脈自長白山來)”고 주장했다. 태산은 한족의 산이고 장백산은 여진족의 산이지만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한족과 여진족은 한집안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근본은 장백산이듯 여진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태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 문화적 상징이 된 ‘중국의 올림푸스’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듯이, 바다를 보면 웬만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고, 성인을 만나면 웬만한 말이 말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맹자의 말은 산둥인의 호방함을 대변한다. 산둥인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고, 바다를 봐서 큰물을 알며, 공맹의 가르침을 받아 의로움을 안다. 호연지기 가득한 대장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중국에서 산둥인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로 사귀기에 좋다”고 정평 나 있다. “남방인은 한 푼의 돈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산둥인은 한 마디의 말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산둥인은 체격이 커서 대장부다운 풍모가 더욱 돋보인다. ‘산동대한(山東大漢)’답게 공자는 9척6촌, 제갈량은 8척의 장신이었다. 튼튼한 체력에 강인한 생활력을 갖춘 산둥인은 난세에는 난리를 일으키는 도적이 되기도 으뜸이고, 난리를 평정하는 군인이 되기도 으뜸이다. 평화로울 때는 척박한 땅을 앞장서 일구는 개척자이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꾼이 된다.
후한말 청주(靑州 · 당시의 산둥)에서는 황건적이 크게 활개쳤다. 조조는 토벌한 황건적을 청주병(靑州兵)으로 조직해 휘하에 거느렸다. 청주병은 조조의 최정예 부대로 조조가 삼국시대 최대의 세력이 되도록 도왔다. 송말 산둥의 양산박에서는 송강 등 36인의 도적이 날뛰었다. 송 조정은 도적 토벌에 성공했지만, 금나라에 밀려 강남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산둥의 잔존 관군과 도적을 충의군(忠義軍)이라는 유격부대로 만들어 금나라의 후방을 교란케 한다. 훗날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수호지’의 모티프가 됐다.
저력이 된 식민 유산
청말에는 의화단운동이 산둥에서 시작됐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산둥 출신 장군이 많아 군내 산둥 인맥이 산둥방(山東幇)이라고 불렸다. 산둥인은 평화로울 땐 성실한 일꾼이었다. 청대 베이징은 급수 시설이 좋지 않아 물장수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산둥인이어서 “산둥인이 장사 안 하면 베이징 우물물 모두 마르리”라는 노래가 있었다. 동북3성 개발 전에는 많은 산둥인이 그곳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개간했다. 영국은 홍콩을 통치할 때 남부 중국인보다 체격 좋고 규율이 잘 잡힌 산둥인을 홍콩 경찰로 많이 채용했다.
칭다오 여행 중에 만난 항저우 사람은 “칭다오가 항저우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인은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특히 항저우는 “하늘엔 천당, 지상엔 항저우가 있다”고 할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항저우에서 온 사람이 이토록 칭다오를 칭찬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 칭다오가 항저우 사람들을 감탄시킬 만큼 변한 것은 독일 덕분이다. 빌헬름 2세는 중국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할양받고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중국 공략을 위한 핵심 군항이자 무역항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에서였다. 붉은 지붕, 화강암 벽의 독일 고전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칭다오에 온 캉유웨이는 “붉은 기와에 푸른 나무, 파란 바다에 쪽빛 하늘, 중국 제일이로다(紅瓦綠樹,碧海藍天,中國第一)”라고 찬사를 보냈다.
칭다오와 독일의 인연은 뿌리 깊다. 독일이 1903년 세운 칭다오 양조장은 중국의 대표 맥주 ‘칭다오 맥주’가 됐고, 비스마르크 병영은 중국해양대학교가 됐다. 개혁 · 개방 시기 칭다오의 한 중소기업은 독일 립헤르(Liebherr)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만들었고, 훗날 립헤르의 중국식 발음으로 이름을 고쳤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백색가전 회사 하이얼이다.
“칭다오에선 홍수 날 염려가 없어요.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금세 빠져나가죠. 옛날에 독일인들이 지어놓은 하수도는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답니다. 독일인들이 100년 전에 지은 건물도 여전히 튼튼해요. 그런데 중국인이 지은 건물은 입주하기도 전에 금이 가고 무너진다니까요.”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는 칭다오 여성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칭다오 사람이 독일에 느끼는 친근함은, 대만인이 일본에 느끼는 친근함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굴욕적인 역사로 식민지가 됐지만, 식민 유산은 훗날 저력이 됐다. 강제 개항된 중국 조계 항구의 특성을 칭다오 역시 갖고 있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인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산둥성을 방문해 이곳이 자기 조상의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盧)씨가 강태공의 강(姜)씨에서 나온 성씨라는 의미였지만, 중국 언론은 “나무의 키가 1000척을 넘어도 잎사귀는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樹高千尺落葉歸根)”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산둥과 한국의 인연을 희극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산둥 술집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화된 상점이 혼재하는 칭다오, 1970년 중국에서 설계·건조한 최초의 구축함인 지난함(중국해군박물관), 칭다오 바닷가(왼쪽부터).
독일인들이 1934년 세운 성 미카엘 성당. 칭다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다.
그럴 수밖에. 백령도와 산둥 청산터우(成山頭)의 거리는 불과 180km다. 서울~전주 간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인천에서 닭이 울면 산둥인이 잠에서 깬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산둥과 한국은 서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에 퍼진 화교의 상당수는 푸젠과 광둥 출신이지만, 한국의 화교는 산둥 출신이 많다. 1944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 화교의 약 90%가 산둥 출신이다.
산둥은 우리 식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추김치와 짜장면은 산둥에 빚을 지고 있다. 배추는 산둥이 원산지이고, 단어 자체도 중국어 ‘바이차이(白菜)’에서 파생됐다. 짜장면이 인천부두에서 일하던 산둥 노동자의 끼니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역으로 한국인도 산둥에 많이 산다. 칭다오에서 우연히 한국인 한 사람을 만났다. 10년째 칭다오에서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칭다오에선 한국인 만나기도 쉽고 한국 간판도 많이 볼 수 있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말했다. “인천광역시 칭다오구죠”
산둥은 중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동북3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조선족이 사는 지역이다. 2013년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35만 명의 한국인 중 8만 명(23.8%), 조선족 222만 명 중 20만 명(9.2%)이 산둥에 산다. 그만큼 교역도 활발하다. 2012년 기준, 한국의 중국 성 · 시별 직접투자 누계액 비중에서 산둥은 22.1%를 차지해 1위인 장쑤(22.3%)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가까운 만큼 다투기도 쉽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치기 위해 창해군을 설치할 때 산둥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창해군을 설치하기 위한 인프라를 마련하려면 인근 지역인 산둥의 인력과 물자를 크게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산둥은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한 핵심 지역이다. 중국은 전국을 총 7개의 군구(軍區)로 나눠 관리한다. 군구별 전투력 순위는 수도인 베이징 군구가 1위, 북한 ·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선양군구가 2위, 산둥의 지난군구가 3위다. 특히 지난군구엔 중국의 최강 해군인 북해함대 본부가 있다. 지도를 보자. 수도 베이징이 중국의 목구멍이라면, 그 목구멍을 감싸며 보호하는 이빨은 산둥 · 랴오둥 반도이고, 입술은 황해와 발해(渤海)다. 산둥반도는 베이징을 방어하는 해양 저지선인 동시에,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진 기지다. 반대로 점령군의 처지에서는 중국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요충지다.
산둥인은 ‘술 바다’ 선원
산둥과 한국은 너무나도 가까워 평화적이든 적대적이든 교류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모쪼록 언제나 화목하게 술잔을 나누는 사이이기를 바란다. 사실 산둥과 한국의 공통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엄청난 대주가였다. ‘논어’에서 공자는 “술의 양에 제한이 없지만 취하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는 증언이 나올 정도다. 삼국시대 조조가 곡물 부족 때문에 금주령을 내리려 할 때, 공자의 20대손인 공융은 금주령에 반대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술의 덕을 찬양해야 할 것이오. 요 임금께서 1000잔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태평천하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공자도 10말의 술을 들지 않았다면 성현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오. 홍문의 회합에서 한 고조를 구한 번쾌가 돼지고기와 1000잔의 술이 없었다면 어찌 용맹함을 떨칠 수 있었겠소. 한 고조가 술에 취해 백사를 베지 않았다면 어찌 큰 뜻을 펼칠 수 있었겠소. 이로 보건대, 술이 어찌 정치를 저버린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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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손답게 오늘날의 산둥인도 술을 사랑한다. 오죽하면 “산둥의 경제는 술의 바다 위에 떠 있고, 산둥 사람은 이 바다의 선원”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매년 8월 칭다오에서는 맥주축제가 열린다. 호방한 산둥인과 술을 마시며 친구가 돼보자. 중국의 엄청난 인파는 감당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