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주도하는 맥주, 한국에선 보기 힘들어
편의점 ‘네 캔 만 원’ 마케팅의 폐해인가
지금까지의 성공은 마케팅에 의한 착시?
유통망 개선 어려우면 온라인 판매라도…
집 앞에서 헤이지 IPA를 살 수 없는 이유
5월 17~1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맥주산업박람회(KIBEX)에는 전국의 맥주 애호가들이 모여들었다. [오홍석 기자]
특히나 국내 양조장에서 만든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헤이지 IPA’가 인상 깊었다. 두 맥주는 현재 세계 수제 맥주 시장을 주도하는 장르다.
스타우트는 볶은 맥아를 사용해 색이 어둡고 도수가 7에서 8도 사이의 맥주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18세기 영국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수출하기 위해 만든 맥주다. 당시 영국인들은 긴 바닷길을 건너는 동안 맥주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맥아와 홉을 기존 스타우트보다 훨씬 더 많이 첨가했다. 이로 인해 단맛이 더 강해지고 알코올 도수는 10도에 육박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스타우트가 탄생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전 세계 맥주 애호가들이 맥주를 평가하는 ‘레이트비어(RateBeer)’에서 5월 31일 기준 상위 랭킹 10종 중 7종을 차지하고 있다.
현장에서 기자는 국내 양조장이 만든 바닐라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헤이지IPA를 시음했다. 최근에는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유당, 바닐라, 커피, 초콜릿 등을 넣어 디저트같이 만드는 게 유행이다. 바닐라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이런한 트렌드를 반영한 맥주였다. 두 맥주는 해외 유명 양조장에서 만든 수입 맥주와 비교해도 맛과 풍미가 뒤처지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평가는 옛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헤이지 IPA는 현재 전 세계 수제 맥주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맥주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미국 맥주의 패권은 서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IPA가 쥐고 있었다. 서부식 IPA는 홉의 씁쓸한 맛과 향이 느껴진다. 잔에 따르면 대체로 투명한 갈색을 띤다. 가벼운 보디감이 특징이다.
그러던 중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새로운 맥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홉의 쓴맛을 최대한 줄이고 향은 극대화했다. 과일향이 나고 보디감은 묵직해 주스 같다. 서부식 IPA와 가장 대비되는 점은 잔에 따르면 뿌연 황금빛 보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탁한(hazy) IPA라고 한다. 2018년을 계기로 IPA의 패권이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갔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비어 페스티벌 사상 최초로 헤이지 IPA 출품 수가 서부식 IPA를 제치면서다.
이 맥주들은 왜 이리 사기 힘들까?
서부식 IPA(왼쪽)와 헤이지 IPA. 외관으로 보이는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맥주의 투명도다. [Big Ditch Brewing Co.]
한국수제맥주협회가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수제 맥주 시장규모는 1096억 원이다. 이 중 소매시장 비중은 67%다. 2019년 34%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음식점과 펍 같은 도매시장이 붕괴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소매시장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판매 경로는 맥주를 만 원에 네 캔씩 파는 편의점이다.
문제는 편의점이 네 캔 만 원으로 10년 가까이 균일가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편의점 처지에서 맥주 네 캔은 직접적인 수익원이 아니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여러 점주의 말을 종합해 보면 네 캔 만 원으로 파는 맥주의 마진은 한 캔에 500원에서 700원 정도다. 마진율이 높지 않은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편의점이 사시사철 네 캔 만 원 행사를 진행한다. 맥주가 고객을 끌어오는 미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편의점은 고객이 맥주를 사러온 김에 안주로 과자나 오징어도 사가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캔 만 원 할인 행사가 10년 가까이 지속되다 보니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A 양조장 대표는 “인건비, 원자재 가격이 지속해서 오르지만 편의점 유통사는 균일가를 고수한다. 그렇기에 좋은 맥주를 편의점에 공급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A 대표는 “맛은 기호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에 어떤 맥주가 더 맛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좋은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간 신선한 맥주가 좋은 맥주라고 한다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맥주는 좋은 맥주라고 평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헤이지 IPA는 모두 생산 단가가 높은 맥주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부재료가 많이 들어간다. 헤이지 IPA는 여느 맥주보다 홉이 많이 들어간다. 홉은 신선도가 생명이다. 고온에 노출되면 쉽게 갈변되고 맛이 변하기 때문이다. A 대표는 “네 캔 만 원 균일가에 트렌드를 주도하는 맥주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GS25 관계자는 “수제 맥주 행사는 납품업체와 충분한 협의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며 “발주 물량을 맞출 수 있는 생산 역량을 가진 양조장을 우선순위로 선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맥주’와 ‘곰표 밀맥주’로 대표되는 밀맥주가 성공을 거두면서 ‘수제 맥주 전성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수치상으로 수제 맥주가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2018년 600억 원이던 시장규모는 2024년 3000억 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전체 맥주 시장의 6.2%에 해당하는 규모다.
성장세에도 양조장들은 할 말이 많다. B 양조장 대표는 “최근 편의점에서 거둔 수제 맥주의 성공은 맛으로 거둔 성공이라기보다는 마케팅의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며 “두 맥주(제주맥주와 ‘곰표 밀맥주’)는 낮은 생산 단가에 맞춰 상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품질이 좋을 수 없다. 기존에 있던 맥주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흥행을 계기로 라거 일변도인 국내시장에 변화가 생긴 건 긍정적인 면이지만 창의적이고 맛있는 맥주를 소비자들이 접할 기회가 없는 점은 안타깝다”고 부연했다.
양조사의 개성과 철학이 묻어나는 맥주
맥주 전문 잡지 ‘트랜스포터’의 신우철 발행인은 “수제 맥주는 태생부터 대기업이 만드는 대량생산 맥주와 차별화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네 캔 만 원에 갇혀 차별성 없는 맥주를 대량생산하면 수제 맥주 고유의 특징을 잃어버린다”며 “수제 맥주의 핵심은 양조사의 개성과 철학이 묻어나는 맥주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렇다면 다양한 개성의 수제 맥주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업계는 온라인 판매 허용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편의점의 균일가 유통에 대항하기보다는 우회하겠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네 캔 만 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자칫 가격을 올리자고 요구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현재 한국에서는 지역 특산물로 만든 주류와 식품명인이 만든 전통주에 한해 온라인 판매가 가능하다.
그러나 온라인 판매 허용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여성가족부가 반대하고 있다. 여가부는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면 미성년자의 주류 구매가 더 쉬워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이해관계 당사자인 유통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인터뷰에 응한 수제 맥주 업계 관계자들은 “시간이 지나 수제 맥주 산업이 좀 더 성장하면 상황이 달라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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