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반전(反轉)’을 통해 ‘반전(反戰)’ 구사한 구로사와

영화 ‘스파이의 아내’[황승경의 Into the Arte]

  • 황승경 공연 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1-08-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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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 출장 후 바뀐 남편과 조카

    • 조카 뽑힌 손톱 받아 든 유사쿠의 분노

    • 남편이 스파이가 아닌데 제목은 왜…

    • 731부대 만행 드러냈지만 아쉬운 양심선언

    •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 부산영화제 상영작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광복을 맞은 지도 어언 76년. 강산이 수차례 바뀔 세원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골수에 맺힌 민족의 한(恨)은 지워지지 않는다. 진정 어린 사죄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데도 궁색한 일본이 올 광복절에는 어떤 메시지를 낼까. 일본 정치인들은 말할 것 없고, ‘자유로운 영혼’인 대다수 예술가들조차 과거사에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늦었지만 일본 영화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2020년 제7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스파이의 아내’가 나왔다. 물론 ‘쉰들러 리스트’처럼 휴머니즘적이지도 않고 가만히 보면 일제의 과오에 대해 여전히 오리발을 내미는 것 같지만 자칫 자신들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만주 731부대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며 1940년대 일본 시대극을 진일보시켰다는 평이다.

    사실처럼 잘 포장한 허구

    ‘스파이의 아내’는 스릴러 서스펜스로 정평이 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65)가 감독 데뷔 이래 처음으로 만든 시대극이다. 과거의 통렬한 반성을 통해 통쾌한 양심적 메시지도 기대됐지만 감독은 과거사를 끄집어 극단 세력에 경고장까지 날리지는 않는다. 오롯이 여주인공에 초점을 맞춘 스릴러 장르를 고수하며 역사와는 평행선을 달린다.

    이 영화는 구로사와 감독 특유의 빛을 조명하며 드러내지 않는 감각적 시선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먼 ‘마니아 영화’ 느낌이 강하다 보니 자칫 역사적인 벌집을 건드릴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나서는 투자사가 없었다. 이후 NHK 방송국에서 드라마용으로 제작됐고, 턱없이 부족한 저예산으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건물의 모든 창을 불투명으로 만들고 외부에서 강한 빛을 쐈다. 실제 관객은 창밖 전경은 전혀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세트 제작 비용 절감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신비스러운 극중 분위기를 자아내는 일석이조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은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고베시(市)다. 고베는 감독 구로사와의 고향이라 오마주 성격을 갖기도 한다. 아름다운 항구도시 고베는 1868년 외국에 개항돼 다른 곳보다 먼저 신문물을 받아들여 서구화된 도시가 됐고, 실제 많은 서양인들이 거주했다. 당시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일본 6대 도시이자 공업 중심지였던 고베는 1945년 미군의 집중 타깃이 돼 연이은 공습을 맞아야 했다. 전쟁 마지막 날까지 고베는 8000여 명이 사망하고 가옥은 거의 파괴돼 유령도시처럼 폐허가 됐다. 영화 말미 초토화되는 고베가 그려지는데, 다카하라 이사오(1935~2018)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도 고베 대공습을 배경으로 한다.

    스파이와 코스모폴리탄의 차이

    무역상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 분·왼쪽)와 헌병 분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무역상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 분·왼쪽)와 헌병 분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와 유사쿠.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와 유사쿠.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는 요란한 까마귀 소리를 배경으로 영국 상인 드러먼드를 연행하는 장면으로 스산하게 시작한다. 막 고베에 부임한 헌병 분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 분)는 드러먼드의 고객인 무역상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 분)의 사무실을 찾아 드러먼드의 간첩죄를 알린다. 타이지는 유사쿠에게 아내인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를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직까지 그에게는 군복이 어색할 정도로 진심이 엿보이지만 이내 그도 ‘피도 눈물도 없는’ 철저한 제국주의자로 변모한다.



    유사쿠는 최상류층 상공인으로, 일반인은 꿈도 꾸지 못할 서양식 고급 저택에서 완벽한 식단과 의상을 갖추고 위스키를 즐기는 서양 예찬론자다. 특히 미국을 동경해 꼭 가보려고 벼르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려 국민들의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절약하고 저축하라며 국민을 억압했지만 유사쿠는 전혀 개의치 않고 유유자적 삶을 즐긴다. 이 시기 사치 소비의 온상지였던 백화점이 일본에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최상위층의 소비는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유사쿠는 아내 사토코와 자신의 외조카 후미오를 주인공으로 홈메이드 단편영화를 찍고 상영회를 여는 고급 취미 활동을 한다. 일과 사랑에 모두 열정적인 유사쿠와 사토코는 어느 부부보다 더욱 아기자기하게 시간을 보낸다.

    유사쿠가 만주로 출장을 다녀오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유사쿠와 함께 출장을 떠났던 조카 후미오가 난데없이 한적한 곳에서 소설을 쓰겠다며 회사를 그만둔다. 며칠 후, 젊은 미모의 여성 시신 한 구가 바다에 떠오른다. 이 여성은 만주에서 유사쿠와 같은 날 귀국했으며 조카 후미오가 묵는 숙소에 취직한 인물이었다. 만주 출장 이후 무언가 변했음을 직감한 사토코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의심의 촉을 거두지 않는다. 깨소금 커플이던 부부가 심한 언쟁을 벌이자 사토코는 독이 오를 대로 오른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죽은 여인이 근무했던 여관을 찾은 사토코는 그 곳에서 집필 활동을 하던 조카 후미오를 만난다. 후미오는 요시찰인이라 밖에 나갈 수 없다며 번역을 끝낸 노트를 사토코에게 넘긴다. 노트를 받아 든 사토코는 남편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 하지만 남편은 만주에서 직접 목격한 참혹한 광경을 설명하며 사토코를 설득한다.

    애국과 행복을 바라는 사토코에게 남편의 대의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영화에서 유사쿠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자신은 “매국노 스파이가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말한다. 서슬 퍼런 군국주의 일본에서 자본주의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 어색하다. 영화는 양심적인 실존 자유주의자들이 현실에도 많았던 것처럼 흘러가지만 작가적 상상에 의해 창조된 허구의 인물일 뿐이다. 국가에 반기를 드는 코스모폴리탄 일본인은 1940년대에는 드물었기 때문에 영화에 빠져들수록 씁쓸함이 맴돈다.

    나치도 경악할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 ‘스파이의 아내’ 포스터.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 ‘스파이의 아내’ 포스터.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2009년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731부대가 뭐냐”는 질의에 “항일독립군인가요”라고 답해서 국민을 경악게 했다. 그만큼 731부대는 우리에게 일제의 비인간적인 잔악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손꼽히는 일례다.

    731부대는 1938년 창설돼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파괴한, 생체실험을 조직적으로 실시한 특수시설이다. 독일의 나치처럼 일본군이 731부대에서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에게 자행한 천인공노할 만행 때문에 731부대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주목했다.

    1932년 중일전쟁 이후 전선이 확장되면서 일본은 세균전을 위한 세균무기 개발과 준비를 목적으로 도쿄 군의학교에 세균연구실을 발족시켰다. 이후 나치보다 5년 먼저 만주를 포함한 중국 전역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악랄한 실험을 시작했다. 731부대는 철저하게 부대의 임무를 숨긴 채 외부에는 방역과 급수 업무를 하는 특별부대로 위장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실험의 면모를 살펴보면 나치 SS소속 내과의사로 아우슈비츠에서 각종 인체실험을 한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엽기적인 악행이었다.

    중국 하얼빈에 주둔한 731부대 특설감옥의 생체실험 희생자는 5000명가량으로 추정되는데, 독립운동가나 전쟁포로, 범죄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무고한 일반인까지 포함됐다. ‘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인 ‘마루타’로 불리는 희생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약물에 의해 가혹하게 고통받아 몸부림쳐야 했다. 전쟁 막바지에서 일본은 모든 기록을 조직적으로 파기했지만, 여러 사료의 기록과 증언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패전 이후 일본은 제대로 된 법의 심판조차 받지 않았고 자신들의 만행을 인정하기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013년 당시 아베 총리는 보란 듯이 숫자 ‘731’이 적힌 T-4 훈련기 조종석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본 밖에서는 규탄 목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일본 내에서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유사쿠와 조카 후미오의 대사와 만주의 비윤리적 생체실험을 비교적 생생하게 직접 내보이며 한 걸음 전진한다.

    부끄러운 과거사를 저격한 양심선언?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주)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의약품 조달을 위해 만주 관동군 연구소에 들르려던 유사쿠와 후미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광경을 목격한다. 관동군의 세균무기로 희생된 흑사병 환자들의 시체가 짐짝처럼 소각되는 모습을 바라본 이들은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다. 731부대의 만행을 서구에 폭로할 요량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하루빨리 미국으로 건너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이 아내 사토코에게 발각되고, 그녀 또한 영상 속 일본의 잔학상을 그대로 목도한다. 남편과 조카의 대의에 기꺼이 동참하지만 먼저 사토코는 직접 헌병대 타이지를 찾아가 자신의 남편대신 조카인 후미오를 고발해 자신이 남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붙잡힌 후미오는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뽑히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삼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는다. 헌병대에서 고문당한 조카의 손톱 10개를 받아 들고 유사쿠는 분노에 치를 떤다. 이후 아내를 바라보는 유사쿠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으며 결말을 암시한다.

    태평양전쟁으로 미국행이 좌절되자 유사쿠는 아내와 함께 731부대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망명 계획’을 세운다. 사랑을 넘어 남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던 사토코는 대의보다는 남편과 함께 무언가 도모한다는 데에 아이처럼 들떠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던 사토코의 단꿈은 처절하게 산산조각 난다. 극 초반 남편과 함께 영화놀이처럼 찍었던 단편영화 배경음악인 고바야시 기오코의 ‘덧없는 사랑’ 마지막 구절 “사랑의 고통받는 여로는 오직 외길뿐이네”가 영화의 결말을 상징한다.

    구로사와 감독은 극적 반전(反轉)을 통해 반전(反戰)을 구사하며 그가 왜 일본의 대표적 영화감독인지를 각인시킨다. 다만 공영방송이지만 우경화 논란이 끊이지 않는 NHK 제작 때문일까. 감독은 제목부터 첩자가 아닌 유사쿠를 첩자로 규정해 사토코를 스파이의 아내로 못 박았다. 모든 것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던 구로사와 감독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관객의 판단에 ‘지침’을 내린 격이라 의아하다. 그럼에도 과거사에 대한 양심선언 격의 영화이기에 감독의 수려하고 유려한 영상미를 제외하고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황승경 #스파이의아내 #731부대 #신동아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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