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막이 오르기도 전에 벼락같이 암전이 된 기분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보여준 집은 주차장을 만들 수도 없고, 남편의 사무실로 쓰기에도 너무 후미진 곳에 있었다. 마뜩찮아 하는 내게 다른 집을 가리키며 “이 집도 나와 있지만 1억이 더 비싸요” 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햇빛이 집 전체를 감싸듯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후광을 봤다.
그저 살아낼 뿐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사건은 간혹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되기도 한다.결혼 초 남편은 ‘5년 후에는 우리 집을 짓자’ 했다. 나는 집을 짓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남편이 그러자니 그래야 하나보다, 했다. 어쨌든 삶의 목표를 세운다는 것이 좋았고, 왠지 로맨틱하기까지 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물으면 “5년 후 우리 집을 짓기로 했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약속은 ‘10년’으로 수정됐다. 맞벌이를 하며 두 아들을 키우느라 정신 없었기에 약속 따윈 잊고 살았다. 그냥 살아내고 있었다. 그사이 세 번 이사를 했고, 우리 가족은 여전히 빚을 떠안고 아파트에 살았다.
10년도 물 건너갔다 싶을 때 우리는 다시 ‘15년’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아이들 교육과 편리함이라는 논리에 허영이라는 마음을 보태 슬쩍 안주하고 싶었다. 그냥 남들처럼 아파트에 사는 게 좋지 않나? 그런 내가 신혼의 약속을 떠올린 건 회사 그만둘 준비를 하면서부터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는 것은 처절한 삶이다. 나도 그런 처절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지쳤고, 나와 아이들 사이에 신뢰가 무너지려는 적신호가 켜졌다. 큰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 지금이 아니면 아이와 대화하지 못하는 엄마가 돼 영영 후회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불안감이 목까지 꽉 차올랐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맞아, 우리 집을 짓자고 했지! 남편은 한 번도 잊지 않았지만, 나는 애써 잊고 지낸 우리의 로맨틱한 목표!’
맞벌이를 하다 외벌이가 된 후 생활비가 줄어든 상황에서 아파트 대출이자를 내는 것이 아까웠고, 남편의 건축사무소 임차료도 아까웠다. 사무소 임차료면 공사비 이자를 감당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가진 돈으로 땅을 사고 공사비로 발생한 대출이자는 사무소 임차료로 갚으면 되겠네. 남편은 ‘땅을 잘 고르면 임대 공간도 나올 수 있다’며 나를 꼬드겼다.
일상에 찌든 내게 로맨틱한 상상이 스멀스멀 찾아들었다.
온갖 집에서 남편을 보다
아이들과 함께 한강변 수영장에서 해가 기울 때까지 노닐 때나 빨간 자전거를 타고 동네 이곳저곳을 누빌 때, 요리 강좌에서 배운 요리로 아이들이 감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를 절로 읊조렸다.
그러나 목표가 섰으니 뒹굴뒹굴 일상을 잠시 멈춰야 한다. 나는 때때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산책을 좋아하는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때로는 아이들을 다 데리고 서쪽 마포부터 강남 끝 일원동까지 참으로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사실 우리의 레이더망은 서울에 국한되지 않았다. 과천부터 분당, 양평, 하남 등 남편이 설계하고 공사하는 곳들을 순례하듯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하루 잠도 자보고 근처 학교와 식당에도 가보고, 인근 산에도 올라가보고.
집 주인들은 ‘설계를 잘해줘 고맙다’며 함박웃음으로 우리 가족을 맞아줬다. 집을 지으면 10년은 늙는다고 다들 만류하는데 그것도 다 옛말인 건지, 아니면 우리 남편이 잘해서 그런 건지. 그림과 모형으로 보던 집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동안 잘 챙겨보지 못한 남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뿌듯했다.
이렇게 여러 집을 다녀보며 우리는 어떻게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지, 우리에겐 어떤 집이 필요한지 얘기를 나눴다. 마당에 화덕을 만들고 날마다 바비큐 파티를 여는 것은 예사였다. 사우나와 벽난로가 있는 핀란드식 집, 거대한 계단 옆에 서가와 미끄럼틀이 있어 동네 아이들 놀이터가 되는 무한궤도 집, 미로처럼 온 집이 얽혀 있는 집…. 각 가족의 입맛에 맞게 개성으로 똘똘 뭉친 집들을 보고 있자니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던 중 손위 시누이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 분당 아파트에서 죽 살다가 두 아이가 대학에 가자 미리 사둔 중구 장충동 동국대 아래 다세대주택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룸과 투룸, 상가, 그리고 꼭대기에 스리룸이 공존하는 월세용 건물인데, 그곳 맨 꼭대기 스리룸을 남편의 설계로 리모델링해 입주했다. 폴딩도어에 대리석 바닥, 옥상 한 켠에는 멋진 오디오실도 있어 친구들과의 파티 장소로 애용한다.
보통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이라고 하면 ‘추워서 난방비가 많이 든다’ ‘구질구질하다’ ‘주차가 불편하다’ 같은 부정적인 얘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님네 다가구주택은 춥지도, 주차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구질구질하기는커녕 럭셔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월세가 나온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회사를 그만두니 심심하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비록 성과는 없지만 매우 분주했다. 우리 집을 짓기 위해 이것저것 관찰하는 것이 더없이 흥미진진했다.
일단 땅을 찾자
그래서 내린 결론이, ‘좁더라도, 손바닥만한 마당조차 없을 가능성이 많더라도,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는 도심에서 살자’였다.
남편과 나는 수많은 관찰과 검토 끝에 지역을 좁혀보기로 했다. 그렇게 경복궁 근처 서촌, 창경궁 근처 혜화동, 그리고 서초구 방배동으로 후보지를 추렸다.
서촌(옥인동부터 청운동, 부암동까지)은 예전보다 땅값이 많이 올랐지만 더욱 문화적인 동네로 변했기에 재미있는 구석이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았고, 신분당선 연장 얘기도 있으므로 교통도 더 편리해질 가능성이 있다. 무수히 발품을 팔다보면 우리에게 딱 맞는 땅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혜화동은 대학 다닐 때, 2002년 월드컵 때의 추억이 깃든 곳이고, 우리 부부가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이기도 해 고향같이 푸근하다. 또한 문화적인 에너지가 가득해 심심할 틈이 없는 곳이다. 게다가 성균관대와 서울대병원이 있어 안정적으로 월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반면 방배동 땅은 네모반듯해서 50평 이하 작은 땅,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멀리 전학 간다는 느낌 없이 적응하기 좋은 곳이다. 다행히 그때 방배동은 재개발이 해제된 곳도, 진행 중인 곳도 있어 어수선했고, 그 틈에 매물이 많아 잘만 찾으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선에서 검토한 곳이 100군데가 넘고, 자체 검열을 거쳐 최종적으로 남편과 함께 찾아가 살펴본 집만 해도 20곳이 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향(向)이 나쁘지 않고 넓이도 어느 정도 되면 주차장을 만들기 어렵다거나, 큰길에서 가까워 위치는 마음에 드는데 사무실과 우리 집을 동시에 해결하기에는 좁았다. 방배동에서 찾은 한 다세대주택은 크기도 적당하고 위치도 좋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신축이 어렵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가 사용할 지하와 맨 위층만 리모델링하고, 임대도 절반 정도는 월세 아닌 전세를 놓아 비용을 충당해야 할 것 같아서 이리저리 재는 맘이 앞섰다.
이렇게 집 보러 다니던 2014년 즈음은 부동산 가격이 크게 움직이는 때가 아니었기에 느긋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인가 결심을 굳히고 부동산 중개소에 연락하면 이미 팔렸다는 집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촌에서 2군데, 방배동에서 2군데.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두근두근 인생의 서막이 오르기도 전에 벼락같이 암전된 기분이 들었다. 여유롭게 산책하듯 둘러볼 때가 아니다.
인터넷을 살펴보거나 아는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해 확인하는 식으로 집을 찾던 방식에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돈이 풍족하면 맘에 드는 집을 선택하면 되지만, 돈이 여유롭지 않으니 적당한 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이마저도 안 되겠다 싶으면 지역이라도 바꿔야 한다.
이제는 경매 물건도 보기 시작했고 마포까지 눈을 넓혔다.
연어는 아니지만 강남을 떠난다
아이를 둔 보통의 가정에서 주거환경을 바꾼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특히 아이들이 잘 적응해줄지, 학군은 괜찮은지 걱정이다. 우리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10년째 살고 있었다. 당장 집을 지으려면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잠원동 단독주택 지역은 너무 비싸고 덩치도 크다. 작은 집을 찾는다 해도 자칫 은행이 주인이 되는 집, 전세로 꽉 찬 집에 우리가 얹혀사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주차장, 사무실 문제가 함께 해결되면서 지속가능한 우리 집이 되려면? 아이들을 전학시킬 수밖에 없다!이사 가기로 마음먹고 이 사실을 주변에 알렸을 때 사람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생빚을 내서라도 강남으로 내려올 판에 연어도 아닌데 왜 역류하려는 거냐며 다시 생각해보라는 쪽이 대다수였고, 사교육의 덫에 걸려 힘들어하던 부류는 우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줬다.
“좋은 학교 보내서 상위권 유지하는 거 힘든 거 알지? 그런 학교에 가도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못 들면 선생님 관심 밖이고, 워낙 사교육에 치중하다보니 학교에서는 야간 자율학습도 안 시키고 책임도 안 져. 어차피 고등학교 때 족집게 과외비로 월 200만 원 이상 쓸 거 아니면 지금 잘 판단하는 게 아이들에게도 좋을 수 있어.”
사실 이것도 해볼래, 저것도 해보고 싶어, 여기 꼭 좀 보내줘 하며 공부에 욕심내는 아이들이었다면 정말 이사하자고 결정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아이들은 축구와 피구와 달리기를 좋아하고, 하루 종일 레고 놀이에 빠져 있다가 숙제해 가는 것만도 감사해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초딩 남자아이 둘이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는 아이가 못미더워 학원 갈 시간이 되면 전화로 체크하고, 아이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학원을 빼먹기 일쑤였다. 둘째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먹이면서 “엄마, 나 데리러 학교에 오면 안 돼?” 하고 전화를 했다. 날마다 전쟁. 우리 가족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고 편안해지는 연습이 공부보다 급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집이 내게 왔다
그날이 정확히 며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 3월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벌써 땅을 보러 다닌 지 6개월째. 몇 개의 집을 놓치고 급한 마음이 들던 차에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오늘은 혜화동이다! 인터넷에서 본 매물을 확인하고 다른 괜찮은 건 없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부동산 아저씨는 최근에 매물이 많이 빠지고 있다면서, 인터넷에 올린 물건을 보여주겠다며 길을 나섰다.혜화로터리에서 아남아파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차가 들어갈 수 없어 후미진 곳이라 할 수도 있는데, 갑자기 차 소리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는 길이었다. 신혼 때 남편과 자주 산책하던 골목길이기도 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차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골목이 넓어졌고 다시 더 좁은 골목 안으로 구불구불 들어갔다. 최소 50년은 됐음직한 한옥이었다. ‘이건 아닌데…. 주차장을 만들 수 없고 사무실로 쓰기에도 너무 안쪽이잖아.’
아저씨는 옆집처럼 지으면 원룸이 족히 10개는 나온다며 아주 괜찮은 물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되짚어 나오면서 코너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이 집도 나와 있어요. 아까 집과 면적은 비슷하지만 1억 더 비싸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조용한 골목길, 지금은 주차장이 없지만 신축하면 주차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집. 햇빛이 집 전체를 감싸듯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원룸이 아니다. 사무실, 우리 집, 그리고 주차장을 해결할 수 있는 집이다. 바로 남편에게 주소를 찍어 보냈다. 남편에게서 곧 연락이 왔다. 도로로 2m 잘리기는 하지만 잘리는 면이 짧은 면이라 다행이고 북쪽 도로가 어쩌고 도로사선이 어쩌고 저쩌고….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면 후광이 비친다고 하던가. 나는 그 집에서 후광을 봤다. 서막이 열리기도 전에 암전되는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희망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땅 보러 다닐 때 눈여겨보세요!만약 당신이 많지 않은 돈으로 도심에 집을 짓고자 한다면, 구도심에서 작은 땅을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구도심 땅을 볼 때는 공원이나 작은 산, 괜찮은 운동시설, 재래시장 등의 위치를 확인하며 생활이 불편하진 않을지 체크해봅니다. 요즘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지도를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얻기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 부부는 먼저 인터넷 지도 거리뷰 보기로 살고 싶은 동네의 모습을 확인하고, 틈날 때마다 그 동네에 가서 산책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땅을 볼 때 꼭 명심해야 할 건축법이 있습니다. 다음 사항들은 땅 보러 다닐 때 꼭 유념하세요!
1종 일반주거지역, 2종 일반주거지역
모든 땅에는 지역, 지구라는 것이 있는데, 이에 따라 같은 동네라도 건폐율(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 면적의 비율), 용적률(대지 면적에 대한 지상 건축물의 연면적 비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구청이나 인터넷에서 ‘토지이용계획확인원’을 발급받으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독주택이 들어설 수 있는 주거지역을 예로 들자면 전용주거지역 1종과 2종, 일반주거지역 1, 2, 3종으로 나뉩니다. 건폐율과 용적률은 지상에 지어지는 건축물의 규모를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므로 꼭 확인해야겠지요! 30평 땅으로 면적이 같더라도 2종 일반주거지역은 용적률이 200%이므로 지상에 60평까지 지을 수 있지만, 1종 일반주거지역은 용적률이 150%이므로 45평까지만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건축 가능한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조권
우리 부부가 작년에 땅을 살 때만 해도 ‘도로사선’이라는 규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규제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일조권’만 유의하면 어느 정도 건축 가능한 규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조권이란 인접 건물에 일정량의 햇빛이 들도록 보장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북쪽에 있는 뒷집에 햇빛이 들게 하려면 우리 집을 남쪽으로 붙여 지어야 하기에, 좁은 땅에서 건축할 때 일조권은 매우 민감한 사항입니다. 일조권은 앞·뒷집 대지 각 부분의 높이와 방향에 따라 복잡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땅이 좁으면 일조권 때문에 4층으로 건물을 올리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그런데 4층 건물 짓기에 유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선 북쪽으로 도로, 공원, 하천이 있는 경우입니다. 일조권이 도로나 하천의 건너편에서 시작하므로 4, 5층까지 일조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북쪽 대지가 높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 두 대지의 가중평균으로 일조권을 적용받기 때문에 건물 높이를 올리는 데 유리해집니다. 또한 남북 방향으로 길쭉한 대지가 유리합니다. 일조권을 적용받더라도 남쪽으로 건물을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북동쪽에 도로가 있고, 북서쪽 대지가 높고, 남북으로 조금 더 긴 땅이라 일조권 적용에 유리했습니다.
막다른 도로
일조권과 함께 건축면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는 막다른 도로가 있습니다. 차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면 후진해서 나와야 하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이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건축법은 35m 이상 되는 막다른 도로의 최소 폭을 6m로 규정합니다.
이는 내 땅이 35m 이상 되는 막다른 도로에 접해 있다면, 지적도상 도로 중심선에서 좌우로 3m씩 후퇴한 곳이 신축하는 땅의 대지 경계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길이가 35m 이상이고 폭이 2m인 막다른 도로에 대지가 8.1m 접해 있다면 우리 집이 2m, 맞은편 집이 2m의 땅을 도로 용도로 내놔야 합니다. 즉, 2m×8.1m=16.2㎡만큼 대지 면적이 줄어든다고 보면 됩니다. 16.2㎡는 4.9평으로 웬만한 크기의 안방 하나가 사라지는 셈입니다. 슬프게도 우리 집 이야기입니다(ㅠㅠ).
이상은 우리 집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한 것입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안을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일조권, 건축선 후퇴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주변 대지를 측량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비용이 들더라도 전문가에게 상담 받아보기를 권합니다.
이 재 혁
‘놀이터 같은 집’을 모토로 삼는 건축가. 재미있는 공간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서울시 공공건축가이자 한국목조건축협회에서 시행하는 5-star 품질인증위원으로 활동한다. 2004년 신인건축가상, 2008년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프라자 리모델링으로 서울시건축상을 받았다.
홍 현 경
‘가드너’로 불리고 싶은 전직 출판편집자.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20년 동안 해오다 2014년 가을 퇴직했다. 요즘 정원 일의 즐거움에 푹 빠져 ‘시민정원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