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호

박지원 ‘X파일’ 발언은 文정권 이중성 화룡점정

[노정태의 뷰파인더]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통치’란 무엇인가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2-06-18 10: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나를 건드리면 뭔가 터뜨릴 것이다’

    • 스캔들을 ‘찌라시’로 만드는 효과?

    • 김종필이 구상한 중앙정보부의 골격

    • 합법성과 불법성의 경계에서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6월 10일 “국정원에 보면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 모든 분들 존안 자료, ‘X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6월 10일 “국정원에 보면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 모든 분들 존안 자료, ‘X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국정원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들 존안 자료, ‘X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

    6월 10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 원장이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정치인은 ‘어디에 어떻게 해서 돈을 받았다더라’ ‘어떤 연예인과 섬싱이 있다’ 이런 것들”이 담겨 있다는 선정적 내용이다.

    박지원의 ‘국정원 X파일’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6월 11일 JTBC에 나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파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국정원법 위반하면 제가 또 감옥 간다, 한 번 갔다 왔으면 됐지 또 가야겠느냐”고 한 발 물러서는 듯하더니, 결국은 “그러니 디테일하게는 얘기 못 하지만 근본적으로 있다”고 답했다.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법적 조치를 거론했고, 김형동 국민의힘 수석대변인 역시 “박 전 원장이 윤 대통령의 X파일도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내세우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국정원 역시 보도자료를 통해 “사실 여부를 떠나 국정원장 재직 시 알게 된 직무 사항을 공표하는 것은 전직 원장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공개 활동 과정에서 국정원 관련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경고했다.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특성상 퍽 이례적인 일이다.

    박지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치 9단’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정치를 오래 해왔을 뿐 아니라, 국정원장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많은 경험을 쌓아온 원로급 인사다. 그런 박지원이 대체 왜 이런 발언을 한 것일까. 그의 의도가 어찌됐건 이 발언이 낳은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 여파를 우리는 어떻게 예상하고, 바라보며, 해석해야 할까. 더 나아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국정원이라는 ‘은밀한’ 조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2021년 6월 국정원은 새 원훈(院訓)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공개했다. [국가정보원]

    2021년 6월 국정원은 새 원훈(院訓)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공개했다. [국가정보원]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라 하더라도

    박지원으로서는 본인의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를 느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 돼버린 지금,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라면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국정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환기시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나를 건드리면 뭔가 터뜨릴 것이다’라는 시그널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효과는 단지 박지원 본인만을 지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가까운 미래, 민주당 국회의원 혹은 정치권 인사의 스캔들이 터졌다고 가정해 보자. 박지원의 ‘국정원 X파일’ 발언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그런 뉴스의 출처를 의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대중이 그렇지는 않더라도, 해당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 혹은 민주당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건 국정원의 공작이다’라는 식의 반발을 가장 먼저 꺼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박지원의 ‘내부 고발’은 정치인의 신변과 관련한 모든 논의를 ‘국정원발 찌라시’로 여기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서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자. 국정원에 이런 식의 오명을 미리 뒤집어 씌워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국정원이 그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저질러온 여러 악행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 불법 개입했다는 의혹처럼 이미 드러난 것만 해도 죄과가 작지 않다.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합치면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워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를 들이대더라도, 방금 사직한 국정원장이 공적인 매체를 통해 ‘국정원에는 정치인의 사생활이 담긴 파일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부적절하다. 누군가의 정치적 욕심이 과도하다는 수준을 넘어, 한 국가 기관의 작동 원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부정적 인식이 대중에게 퍼지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美 CIA와 日 내각조사부 결합한 부서

    국정원이 국내 주요 인사들에 대한 공적, 사적 정보를 취합해 파일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다. 전 세계 모든 정보기관 역시 비슷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정보기관이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다양한 정보, 특히 사람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정리해 국익에 부합하도록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영화 ‘007’ 시리즈 등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정보기관의 주요 업무는 ‘액션’이 아니라 ‘다큐’에 가깝다는 소리다.

    한국은 그런 경향이 더욱 도드라졌다. 5·16 군사정변 이후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종필이 중정을 만들 때, 바로 그런 기능을 중점적으로 수행하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부를 결합한 부서’, 그것이 오늘날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중앙정보부의 설계 이념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미국의 CIA는 해외에서 반공, 방첩 활동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둔 조직으로 국내 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있다. 반면 내각조사부는 일본 국내외를 통틀어 정보 조사를 한다. 단, 한국의 국정원처럼 직접 조사 인력을 거느린 거대 조직이 아니라, 수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이며 정부 산하 여러 조직에서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 총리에게 보고한다.

    내각조사부의 성격이 그렇다보니 CIA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기능을 갖게 됐다. 정부의 다양한 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 의견, 내부 동향 등을 파악하고 종합해 보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권력의 눈’이 된 셈이다. 앞서 말했듯 CIA는 국내 정보 수집이 금지돼 있는 반면 내각조사부는 그렇지 않다. 단지 정보 수집만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통치 기구로 작동한다.

    그러니 김종필이 만든 ‘CIA와 내각조사부를 합친 조직’은 실로 막강한 힘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북한과의 투쟁을 위해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면서, 수사권을 갖고 국내로 침투해오는 간첩들을 파악, 추적, 체포, 심문하기까지 하며,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각 부처의 보고를 받아 대통령에 직보하는 희대의 권력 기관이 탄생하고 만 것이다.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 국내 사안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정치인들의 사생활을 포함한 ‘동향’이다. 이는 꼭 야당 의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독재자일수록 여당 정치인, 주요 장성, 재력가 등 권력 내부자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이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박지원이 말한 ‘국정원 X파일’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고, 지금껏 축적돼 왔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집권’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겠다?

     2021년 6월 4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정원 개혁성과보고회를 마친 후 박지원 국정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

    2021년 6월 4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정원 개혁성과보고회를 마친 후 박지원 국정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

    국가가 존재한다면 어떤 식으로건 통치(governance)가 이뤄져야 한다. 통치를 위해서는 주요 인물, 기관, 정부 조직의 의견을 수렴하고 동향을 파악해 최고 의사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판단을 돕는 기능이 어떤 식으로건 작동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 국가라면 이런 기본적 정보 유통 자체를 죄악시·금기시하지는 않는다.

    가령 미국의 경우, 대통령의 책상에는 매일 아침 CIA가 만든 대통령 일일 보고서(President’s Daily Brief)가 놓인다. 미 국방부의 국방정보국(DIA), 국무부의 정보조사국(INR), 연방수사국(FBI), 국가안보국(NSA) 등 다른 정보·수사기관 역시 비정기적으로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백악관에 전달한다.

    이런 보고서의 작성 과정이나 내용이 과연 100% ‘결백’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개혁’을 이유로 정보기관들의 팔을 꺾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이 한국보다 민주주의를 덜 소중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국가 운영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합법성과 불법성의 경계를 오가는 일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상황이 다르게 전개됐다. 민주화 이후 정보기관의 힘은 꾸준히 줄어들었고, 문재인 정권은 그러한 행보의 정점을 찍었다. 2017년 6월, 국내 정보 담당관 제도를 폐지했다. 국정원 정보관이 부처, 기관, 단체, 언론 등을 출입하며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해온 기능을 중단했다. ‘국내 정보’ 기능을 삭제한 것이다.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은 명백한 불법 행위다. 그러한 행위를 용인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 재산, 사생활을 보호하는 국가의 존립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대공수사기관이면서 동시에 ‘통치 수단’인 국정원의 규모와 힘이 기형적으로 컸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국정원이 담당해 왔던 고위공직자 신원조회 및 존안자료 관리 등의 기능을 경찰이 사실상 독점 수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정권까지 정부 공직자의 인사 검증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이 담당했다. 국정원이 민정수석에 제공되는 정보의 주요 출처 중 하나였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예상 가능한 일이다. 대외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니나, 문재인 정권의 연이은 인사 실패는 바로 그 연결 고리를 파괴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 역시 불가능하지 않다. 선거에서 이기고 ‘집권’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겠다는 이중적 태도가 민주당 정권의 실패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폭풍은 윤석열 정부가 떠안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정원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오가며 일하고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지만, 법무부나 인사혁신처의 직원들은 그런 ‘애매한’ 일과 거리가 있다. 대통령이나 인사 결정권자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가 제대로 수집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고위직 인사들의 노골적 행태

    문재인 정권은 ‘국정원 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좀 더 차분한 논의 하에 진행됐어야 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그 마지막 국정원장 박지원이 저지른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는 최후의 화룡점정처럼 느껴진다. 고위직 인사들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국가 기능을 파괴하는 일을, 나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본 기억이 없다. 국정원 문제, 더 나아가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통치’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폭넓은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할 이유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