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 하면 누구나 화려하고 아늑한 여객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 좌석도 짐칸도 없는 비행기가 있다. 그 썰렁한 공간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린다. 매끈하고 세련돼 보이는 첨단 공항의 한편, 거칠고 어지럽지만 ‘살아 움직임’을 실감케 하는 대한항공 화물터미널과 화물기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싸늘한 12월 아침. 인천공항 대한항공 제1화물터미널에 들어서자 요란한 기계음이 귀보다 가슴을 먼저 때린다. 가로 420m, 세로 130m, 높이 19.22m 총 5만460㎡의 광대한 규모.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보니 사방 끝이 까마득하다. 차근히 터미널을 둘러보자 여기저기 흩어진 짐짝들이며 난생 처음 보는 투박한 기계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심하세요!”
기계음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뒤를 돌아보니 정체 모를 노란 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비키셔야죠.”
버티고 선 건 그 차가 아니라 기자였다. 잿빛 판타지를 만난 듯 터미널의 생경한 풍경에 흥분해 불청객 신분을 잠시 잊은 터였다.
가만 보니 터미널의 활기는 그 뿔 달린 노란 차들이 주도하고 있다. ‘쌩쌩’ 바람을 가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정교하고도 민첩한 운전술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화물을 들어서 옮기는 ‘토미룩(Tomiruc)’입니다. 아래에 달린 뾰족한 부분으로 짐을 들어 올리죠. 모두 83대가 있는데, 터미널 내 공기오염을 막기 위해 전기로 충전합니다.”
26년 베테랑의 회상
대한항공 운송지원팀 곽승훈 차장의 설명이다. 이 거대한 회색 공장에서 인천공항 화물의 50%가 들어오고 나간다.
화물터미널을 방문하려면 먼저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을 거쳐야 한다. 목적지가 바다 건너 어딘가가 아닌 불과 10분 거리의 화물터미널이라고 생각하니 이날만은 공항이 애틋하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에 대한 시샘이 마음을 스친다.
여권 없이 여객터미널을 통과해 보안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출입허가증이 필요하다. 대한항공측의 도움으로 출입허가증을 받아들고 내부용 게이트에 들어섰다. 여행객들로 왁자한 바로 옆 일반 게이트와 달리 보안검색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썰렁하기 짝이 없다. 신분증과 허가증을 제시한 뒤 엑스레이 보안검색 절차를 받은 뒤에야 보안구역에 발을 내디딘다. 유니폼을 입은 여객터미널의 상주 직원들도 똑같은 절차를 거쳐 게이트로 들어간다.
“매일 이곳을 드나드는 직원들도 보안절차를 철저히 거쳐야 합니다. 법적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국외로 나온 셈이거든요. 예전에는 ‘아는 얼굴인데 뭘 그러냐’는 말이 통했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테러 문제 등으로 인해 공항 내 보안의식이 높아진 거죠.”
함께 검색을 받으며 대한항공 최형찬 대리가 설명을 덧붙인다.
대한항공 제1터미널 옆 카운터에서 화물 운송을 위해 운송장을 접수하는 고객들.
“화물터미널까지는 차로 10분 남짓 걸립니다. 직원용 차로 이동할 겁니다.”
샛노란 색깔의 앙증맞은 마티즈에 올랐다. 이곳에서는 평균 시속이 30㎞이고, 최고 시속도 50㎞를 넘어선 안 된다. 도심에선 말도 안 되게 느린 속도지만 탁 트인 활주로를 감상하기엔 딱 좋다.
항공사라면 여객기를 우선 떠올리지만 대한항공 전체에서 화물사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2006년 전체 대한항공 매출의 29%는 화물사업본부에서 올렸다. 대한항공은 국제 화물수송 부문에서 2004~2006년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70년 화물기 1대로 시작한 화물사업이 대한항공만의 독특한 영업 전략에 힘입어 화물기 29대, 25개국 48개 도시에 운항하는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노선도 별로 없고 운송 화물도 간출했어요. 미국으로 가발·신발·옷 따위를 주로 보냈고, 일본으로는 농수산물·굴·꽃게·송이버섯 등을 실어 날랐죠. 화물기 운항도 주간 2회가 전부였습니다. 1990년대 들어 수출량이 많아지면서 화물기 사업도 활기를 띠게 됐죠. 현재 운항하는 화물기편은 무려 주간 147편이나 돼요. 어느새 세계 1위에 올랐네요….”
26년 동안 화물 운송 분야에서 근무하며 잔뼈가 굵은 전갑명 운영지원팀장이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짐의 입구 ‘트럭독’
대한항공 제1화물터미널은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수입 화물을 다루는 수입구역, 수출 화물을 다루는 수출구역, 그리고 한국을 지나 다른 국가로 옮겨지는 화물을 보관하는 통과구역이다. 수입 화물은 화주(貨主)별로 큰 덩이를 작게 나눠야 하고, 수출 화물은 비행기 적재를 위해 큰 덩이로 묶는 작업을 주로 하기 때문에 각 구역에 설치된 장비는 조금씩 다르다.
출발 전 화물터미널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온 터였다. 그러나 투박하고 복잡한 현장에 도착하자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리됐던 작업의 흐름은 순식간에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현장을 둘러보며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겠다”는 곽승훈 차장의 뒤를 열심히 따라붙기로 한다.
“외국으로 수출될 화물은 모두 이 ‘트럭독(TruckDock)’이 접수합니다.”
터미널 가장자리에 트럭 10여 대가 일렬로 서서 뒤꽁무니를 갖다댄다. 트럭독은 트럭 후미에서 화물을 바로 받을 수 있도록 높이를 조정한 공간으로, 모든 화물은 터미널 입구의 트럭독을 통해 터미널에 입성하게 된다. 트럭독과 맞물린 각 운송회사의 트럭에서는 먼 길을 떠날 화물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수출과 수입구역에 35개씩, 모두 70개의 트럭독이 있다.
여객기에 탑승하려는 승객이 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수속을 밟듯, 화물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화물기에 실려 국외로 나갈 수 있다. 화물의 수입·수출과 관련한 모든 절차가 이 화물터미널에서 이뤄진다. A부터 Z까지 작업 전부는 화물터미널관리시스템(Terminal Management System)과 화물운송시스템(C-Top)이 상호작용하면서 통제한다. 화물의 출발지, 도착지, 개수, 무게, 주의사항 등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적재적소로 운반하는 식이다.
이렇게 입성한 화물들은 바닥에 장착된 저울에 무게를 잰 뒤 보안검색을 위해 엑스레이 앞에 서야 한다. 엑스레이는 여객터미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물 역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라 철저한 보안검색이 필수다.
화물기 앞머리에는 여객기에는 없는 노즈도어(Nose Door)가 있다.
“보안검색대가 수용할 수 없는 크기의 화물은 개봉 검색을 하거나 폭발물 탐색기를 사용하는 등 별도의 절차를 거칩니다. 삼성 등 건교부가 자체 검색이 가능하다고 인정한 몇몇 기업의 화물 외에는 검색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곽승훈 차장과 함께 엑스레이 모니터를 볼 수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직원 3명이 2개의 모니터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다.
“색상과 밀도를 보니 반도체 같네요. 주로 총기, 화약 등 불법 화물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핍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직원이 말한다.
신기에 가까운 ‘빌드업’ 작업
수만개의 크고 작은 짐더미 사이, 1초 만에 허리를 굽혔다 펴는 신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차곡차곡 짐을 쌓고 있는 직원이 보인다.
“일종의 규격화 작업인 ‘빌드업’을 하는 모습입니다. 빌드업은 탑재용기인 ULD, 즉 정해진 크기의 컨테이너 또는 팔레트에 짐을 싣는 작업을 뜻합니다. 탑재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화물을 묶는 것이지요. 모든 화물은 이 빌드업 과정을 거쳐야 화물기에 실릴 자격을 얻습니다.”
보안검색 다음의 과정이 바로 빌드업 작업이다. 토미룩과 사람이 나눠서 이 작업을 맡는데, 인력으로 들 수 없는 화물은 토미룩이 운반하고 소형 화물은 수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지하로 푹 꺼졌다 위로 솟기도 하는 ‘워크스테이션’에서 이뤄진다. 워크스테이션은 작업자가 키 높이에서 편리하고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 정해진 화물을 적당한 모양으로 쌓아 올리고 너트로 단단히 고정하면 작업이 마무리된다. 워크스테이션에서 화물을 정돈하는 데 열중한 대한항공화물조업사 KAS(한국공항) 직원 이승재씨에게 다가갔다.
“보통 2명이 팔레트 하나를 맡습니다. 노하우라면 큰 화물은 아래에 놓고, 가볍고 위험한 화물은 위로 올리고, 부피는 최대한 줄일 수 있게끔 공간 배치를 잘해야 하고…회사에서 나오는 매뉴얼만 익히면 일은 금방 손에 익습니다.”
큰 화물들 사이 빈틈에 작은 화물을 집어넣으며 이씨가 말을 잇는다.
“팔레트에는 모두 고유번호가 있어요. 팔레트에 어떤 제품이 얼마나 실렸는지 표시하는 거죠. 그리고 그 정보는 모두 화물운송시스템으로 전송돼 그 자료를 토대로 화물기에 팔레트를 어떻게 배치할지를 결정합니다.”
이씨에게 이야기를 듣던 중 한 직원이 다가와서 기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벌써 일곱 번째다. 지나갈 때마다 경비관리 직원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등 뒤에 꽂혔다.
“노란 보안선 보이시죠? 그 선을 따라 경비관리 직원들이 서 있지 않습니까.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안전선이지요. 대리점 직원들도 노란 선 밖에서만 짐을 내리고 포장상태를 살필 수 있어요.”
넓고 어수선한 화물터미널은 도난과 테러 등 안전사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 제1화물터미널은 45개 감시카메라를 24시간 가동하며 모니터링룸에서 세 명의 직원이 상시 감시하고 있다. 제1화물터미널처럼 규모가 크고 관리가 엄격한 곳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해외의 소규모 대리점이나 터미널에서는 반도체 같은 고가의 화물이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화물 안에서 물건만 쏙 빼가고 감쪽같이 포장을 봉합하기 때문에 화물을 받아본 뒤에야 도난사실을 발견하는 곤란한 때도 많다.
화물기 내부. 바닥의 롤러처럼 생긴 장치가 화물을 옮긴다.
“화물은 내용물에 따라 ‘위험’ ‘조심’ 등을 표시합니다. 따로 특수화물 보관창고를 만들어뒀는데, 냉장고, 냉동고, 항온항습창고, 귀중품보관창고 등이 있습니다.”
곽승훈 차장을 따라 0~5℃로 온도를 유지하는 냉장창고에 들어섰다. 냉장창고라지만 겨울이라 오히려 바깥보다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창고 한켠에 100상자는 족히 돼 보이는 캐나다산 랍스터가 잔뜩 쌓여 있다.
냉장고와 붙어 있는 영하 18℃의 냉동고에 들어서자 찬 공기가 훅 끼친다. 강렬한 오한이 순간 몸 전체를 관통한다. 함께 있던 일행 4명 모두 으스스 몸을 떨며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냉동고 구석에서 얇은 점퍼를 걸친 채 화물을 살피는 직원을 뒤로하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미래’를 보는 눈
떠날 채비를 마친 수많은 화물은 잠시 터미널 곳곳으로 흩어져 대기해야 한다. 먼저 덩치가 큰 화물들은 ‘ETV(Elevator Transfer Vehicle)’로 운반된다. 터미널 입구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맞은편 벽을 따라 거대한 화물보관함이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게 엘리베이터식으로 화물을 움직여 보관하는 ETV다. 소형 아파트 혹은 초대형 양계장을 닮은 웅장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ETV는 모두 1048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사람이 운전하지요. 넘쳐나는 화물을 바닥에 보관할 수 없어서 칸막이 형식의 화물 보관 장소를 만든 겁니다.”
받침대가 달린 노란 전차가 천천히, 그러나 충실히 출입구와 ETV 사이를 오간다. 컨테이너와 팔레트에 실린 규격화된 화물을 ETV까지 옮기는 ‘TV(Transfer Vehicle)’다. 자동화시스템에 의해 어떤 팔레트가 ETV의 몇 번째 칸에 보관됐다는 기록이 화물운송시스템에 전송된다고 한다. ETV 한 칸에는 최대 13.6t 무게의 화물이 실린다.
무게가 가벼운 화물의 보금자리는 천장까지 뻗은 장롱 모양의 ‘AS/RS (Auto-mated Storage and Retrieval System)’라는 장치다. 주로 화주별로 해체작업을 마친 수입 화물들이 보관된다. 부피가 작은 귀중품은 ‘MSS(Mini-shipment Storage System)’로 운반된다. MSS에 바짝 다가가 내부를 살폈다. 보통 책상 서랍보다 조금 큰 크기의 서랍 형태 트레이(Tray) 210개가 빼곡하다. 이렇게 각기 무게가 다른 화물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화물기에 오를 때를 기다린다.
오후 4시. 화물이 밀려드는 시간이다. 3층 사무실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화물터미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맨 오른편의 수출구역 쪽 토미룩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진다. 남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는 조그마한 점들에 시선이 흐트러진다.
화물기는 주로 저녁 시간대에 뜬다. 화물이 트럭독에 접수된 뒤 화물기가 출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4시간. 화주들이 주로 오전에 화물을 접수하기 때문에 일을 착착 진행하면 자연히 저녁발 화물기가 많아지는 것이다.
2006년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제선 화물운송(FTK·Freight Ton Kilometer) 화물부문 10대 항공사는 1위 대한항공, 2위 루프트한자 항공(독일), 3위 싱가포르 항공(싱가포르), 4위 케세이퍼시픽 항공(홍콩), 5위 페덱스(미국), 6위 차이나에어라인스(대만), 7위 에어프랑스(프랑스), 8위 카고룩스(룩셈부르크), 9위 에바항공(대만), 10위 에미리트항공(아랍에미리트) 순이다.
화물 정보를 점검하는 직원들. 화물기의 무게중심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전사고가 날 수 있다.
“노선을 효율적으로 짜는 게 최우선입니다. 그쪽에서 들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물을 얼마만큼 채워서 돌아오느냐가 수익을 좌우하기 때문이지요. 현재 ‘서울-뉴욕-오슬로-서울’ ‘서울-델리-브뤼셀-서울’처럼 수요가 있는 여러 도시를 둘러오는 노선을 확대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화물노선팀 최정재 과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는 2004년 오스트리아 빈 노선에 화물기를 투입한 일이 꼽힌다. 주요 기업의 생산기지가 동유럽으로 이전하는 동향을 읽은 즉시 빈 노선에 화물기를 띄웠고, 기대 이상으로 많은 물량이 몰려 매일 운항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 정확한 시장수요와 과감한 정책 결정이 빚어낸 성과였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몰려 있던 공장들이 인건비가 비싸지면서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트렌드를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경쟁력의 시작은 ‘이원권’
처음 도전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 노선 개척에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른다. 정도근 인천화물운송지점장의 말이다.
“한국과 다른 국가 간 노선을 개설할 때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3국간 수송 때 필요한 권리인 ‘이원권’ 문제가 얽힐 경우 협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대한항공이 중국-유럽 간 운송 영업을 하면 해당 국가에서 반기지 않는 것이지요. 대한항공 화물기는 제3국간 수송 비율이 높습니다. 이 부분을 잘 활용하면 품격 있는 영업이 가능해지니까요.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00t을 운송하는데, 중간에서 상하이를 찍고 오면 200t을 운송할 수 있게 되는 식입니다.”
미국과 인도처럼 ‘Open Skies Agreement’, 즉 상호 국적 항공사가 언제 어디고 상대국가로 취항할 수 있다는 협정을 맺어 자유롭게 제3국간 운송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규제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나라도 있다. 이원권을 관할하는 건설교통부 처지에서는 우리 항공사가 이원권을 따면 외국 항공사에도 호혜조건으로 시장을 내줘야 하는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항공사로서는 양쪽 다 개방해 네크워크 경쟁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게 정 지점장의 설명이다.
또 다른 성공비결로는 지역별 할당량을 둬 고정 물량을 확보하는 영업전략을 들 수 있다.
“한국 30%, 미국 20%, 동남아 20%, 중국 20% 식으로 지역별 할당량을 구분해 둡니다. 포트폴리오 구성을 안정적으로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전략에 따르면 국내 상황이 좋지 않아도 큰 타격은 피해갈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 때 여객사업에 비해 화물사업이 건재했던 것도 이 때문이지요.”
‘뭐든지 한다’는 고객 위주의 서비스 정신도 대한항공 화물 운송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고객이 원하는 지역에 원하는 때에 신속하게 화물기를 투입해 ‘믿음직한 서비스’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 이런 일념으로 1992년 44t의 열병합 발전소용 터빈을 수송해 중량 기준 세계 최고 기록을, 2007년 8월 42t짜리 발전기 장비를 수송해 2위 기록을 세웠다.
특유의 ‘군인정신’으로 이름난 대한항공 화물기가 소화할 수 없는 화물도 있을까.
“멸종 위기에 놓인 야생 조류의 수송은 ‘야생 동식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에 의해 금지돼 있습니다. 돼지, 염소, 발 냄새가 나는 과일 두리안 같은 종류는 냄새 문제 때문에 제한하고 있고요. 반면 사람의 시신은 탑재가 가능합니다. 2007년 6월 캄보디아 프놈펜 항공기 추락사고 때는 대한항공에서 특수화물 전문가 2명을 파견해 13개의 컨테이너를 이용해 시신을 수송했습니다.”
단골 고객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대형 화주로는 삼성전자, LG전자, LG필립스, 델, 노키아, 나이키, IBM, AMAT, 록웰 등이 있다. 그러나 화주와 직접 거래하는 것은 아니다. 화주와 운송사 가운데는 대리점이 있다.
“대리점이 화주와 운송회사를 중간에서 이어주는 방식이 99%입니다. 삼성전자처럼 물량이 많은 회사는 여러 대리 회사가 운송을 맡고 있지요. 항공 화물 대리점 가운데 삼성전자로지텍, 범한판토스, DHL글로벌포워딩, 코스모항운 등의 실적이 높은 편이지요.”
전 팀장은 “항공화물 시장 역시 서비스가 핵심이라 더 나은 서비스로 고정 고객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고 했다.
4개월 걸친 대수술
화물터미널 앞마당의 주기장으로 나가니 화물기 일곱 대가 대기 중이다. 탁 트인 활주로를 배경으로 선 모습이 늠름하다. 이 가운데 두 대의 화물기에서 화물 적재 작업이 한창이다. 대한항공 제1, 2터미널 주기장에는 16대를 주기할 수 있다. 건너편 아시아나 화물터미널과 외항사 화물터미널 앞마당에도 같은 수의 주기공간이 있다.
“오른쪽 화물기와 왼쪽 화물기의 차이점이 뭔지 아시겠어요?”
“글쎄, 크기와 모양은 같아 보이는데요.”
“자세히 보면 왼쪽 화물기에는 창문자국이 있는데 오른쪽 화물기는 말끔합니다. 왼쪽은 여객기를 화물기로 개조한 것이고, 오른쪽은 원래 화물기로 제작된 거죠. 개조를 해도 창문 자국은 그대로 남습니다. 화물을 싣고 내리는 문의 개수도 다릅니다. 개조기의 상단부(main deck)에는 기체 앞머리의 노즈도어(Nose Door) 없이 측면에만 2개의 문이 있지만, 화물기에는 3개의 문이 있습니다.”
여객기를 화물기로 개조하는 작업은 사람으로 치면 대수술에 해당한다. 기체 하단부를 제외한 상단부, 즉 여객기의 승객이 탑승하는 부분을 모두 떼어내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한 대의 화물기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항공기 정비 분야의 전문 인력 200여 명이 4개월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공을 들여야 한다.
“화물기 개조는 세계적으로 싱가포르, 이스라엘, 중국 세 나라만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만큼 어려운 기술입니다. 대한항공의 주력 기종인 B747-400 화물기 개조에서는 보잉사와 이스라엘의 IAI가 대표주자입니다. 보잉사는 직접 개조한다기보다 수주해 수행 업체인 중국 샤먼의 TAECO와 싱가포르 에어라인즈에 일을 맡기는 식이고요.”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는 2006년 7월부터 민간 항공기 개조사업에 진출해 지금까지 2대를 개조했다. 1호기는 중국 TAECO에 맡겼고, 2, 3호기는 부산 김해공장에서 직접 개조를 마친 뒤 운항 중이다.
길이 70m, 폭 65m, 높이 20m의 점보기를 개조하려면 비행기의 신경계통인 전원과 각종 전자 장비를 제거한 뒤 4만개의 부품을 바꿔야 한다. 개조하는 동안 기체의 변형을 막기 위해 50군데 이상에 받침대를 받쳐 안정적인 구조를 만든다. 그 뒤 여객기 안의 모든 기물을 남김없이 들어내는 작업이 진행된다. 좌석, 오디오 등 승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던 자리는 화물을 움직이고 고정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가 대신하게 된다.
여러 장치 가운데 핵심은 화물을 옮기고 고정하는 화물이송 장치. 화물기 바닥에 깔린 롤러처럼 생긴 장치들을 사람이 버튼으로 조작하면 원하는 위치로 화물이 운반되고, 팔레트와 화물기 바닥의 록(lock)이 맞물려 단단하게 고정되는 원리다.
화물기를 개조하는 이유는 경제성 때문. 항공기 1대의 개조 비용은 약 3000만 달러인 데 비해 B747-400 신형 화물기를 구매하는 데는 1억5000만달러가 든다.
한 화물기의 활짝 열린 노즈도어로 화물이 속속 들어간다. 노즈도어가 열린 모양은 꼭 먹이를 탐하는 상어 같다. 긴 모양의 특수화물은 기체 앞머리의 노즈도어를 통해서만 실을 수 있다. 최대 113t까지 적재가 가능하다. 가끔 특수화물을 수송해 화제가 된 뉴스를 본 기억이 났다.
“2000년 초반까지 동물원용 악어, 돌고래, 아나콘다 등을 활발하게 수송했어요. 2001년에는 코끼리 9마리를 안전하게 수송하기도 했고요. 최근에는 애완용 및 기능성 동물의 수송이 늘고 있는데, 가령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 싼야(三亞)에서는 닥터피시를,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서는 관상용 잉어를 들여옵니다. 생동물 수송은 특수포장이 중요한데 잉어 수염이 자꾸 비닐을 찔러 수염을 아예 짧게 깎고 있지요.”(전갑명 팀장)
고양이 현상금 100달러!
살아 있는 동물은 수염까지 챙길 정도로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 이 때문에 생동물을 수송할 때는 사육사나 수의사 등 관리인이 함께 탑승하는 경우가 많다. 고가의 미술품도 생동물 못지않게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모네, 샤갈, 고흐 등 명화 전시가 있을 때 대한항공이 수송 협찬을 합니다. 고가 미술품 역시 수송하는 과정에서 손상될 것을 우려해 관계자가 함께 탑승하곤 하지요.
그렇게 특별한 화물을 옮기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도 자주 생깁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방콕에선 독사가 포장을 뚫고 나와 찾느라 애먹은 적이 있어요. 김포공항 시절에는 소가 활주로로 뛰쳐나가 직원들이 혼비백산한 경우도 있고요. 참, 고양이 사건도 있어요. 여객기 승객의 애완용 고양이가 없어진 거예요. 외국 승객이었는데 울며불며 고양이 찾아주는 사람에게 100달러의 현상금까지 걸더군요. 결국 창고 구석 생선 화물 근처에 있는 걸 찾아냈죠. 그러고 보니 사건사고는 모두 동물과 관련됐군요.”
터미널에서 나온 화물들은 운반차인 달리(dolly)가 비행기로 옮겨 나른다.
화물기의 꽃, 탑재관리사
개조된 ‘KE237’ 댈러스행 화물기 계단을 오른다. 상상한 대로 화물기 안은 막 이사할 채비를 마친 집 같다. 기내 양옆으로 나 있는, 날씬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날 만한 통로를 제외하곤 커다란 짐짝들이 공간을 꽉 메웠다. 체격이 큰 편인 안내직원 한 사람이 비좁은 통로를 지나느라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차곡차곡 채워진 짐 사이를 지나 기체 뒤편으로 이동한다. 이쪽은 아직 적재 작업이 한창이다. 팔레트 위에 실린 집채만한 짐짝이 귀신 춤추듯 저 홀로 움직이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건지 묻자 곽승훈 차장이 답했다.
“옆 벽면에 부착된 버튼 보이시죠? 조업원들이 이 버튼으로 팔레트를 제 위치로 옮기는 겁니다. 기체 바닥의 롤러같이 생긴 바퀴가 팔레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요.”
한창 작업이 진행되던 중 ‘쿵’하는 굉음이 울렸다. 팔레트를 바닥에 고정하기 위해 라커를 채우던 중 아귀가 맞지 않은 것이다. 곽 차장은 “안전한 수송을 위해서는 팔레트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됐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모든 화물은 라킹을 비롯한 최종 안전작업을 반드시 수작업으로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고유번호를 가진 팔레트는 반드시 ‘제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화물기 운항에서 가장 중요한 무게중심과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무게중심을 맞추려면 상하, 좌우의 무게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상단부분(main deck)과 하단부분(lower deck) 칸 사이의 균형, 수십 개칸으로 나뉜 평면 포지션의 균형이 맞아야 안전한 운송이 가능하다. 공간의 제한 때문에 부피도 고려해야 한다.
“화물터미널을 거친 화물은 탑재관리사의 지시에 따라 화물기에 탑재됩니다. 보통 14명의 직원이 화물기 한 대의 화물 적재를 맡고 있죠. 탑재관리사는 화물탑재의 전 과정을 통제하지만, 그 가운데 화물기의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 핵심입니다. 이 때문에 탑재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집중력과 섬세함이 필수적이고, 그래서 여성에게 잘 맞는 업무이기도 합니다.”
대한항공에는 70명의 탑재관리사가 있다. 탑재관리사는 대한항공 직원 가운데 2주간 전문교육을 수료해야만 자격이 주어지며, 2년마다 보수교육을 받아야 한다. 각 화물기를 총괄할 탑재관리사는 화물기 출발 하루 전에 지정된다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니 조종석과 좌석 8석, 그리고 간단히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아담하지만 아늑하진 않은 이 공간이 조종사들이 비행하는 동안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스튜어디스는 물론 탑승하지 않으며 기내식은 여객기와 같다. 화물기 조종사는 2명. 노선에 따라 교환조를 짜 넣기도 하지만, 기장과 부기장 2명이 탑승하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이 비행기의 탑재관리사인 수출팀 박예훈 과장이 조종실로 들어간다. 조종사에게 화물 목록과 적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다. 조종사는 화물 배치표를 보고 보조 날개 각도를 바꾸는 등 조종에 참고한다.
100t 기준으로 모든 화물을 싣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30분. 조종사, 탑재관리사, 화물기 담당 직원들이 서로 화물 전부가 실렸다는 사인을 착착 주고받은 뒤 순식간에 화물기 문이 닫힌다. 적재 작업을 하는 동안 비행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퀴에 걸었던 쇠사슬을 풀면 비로소 토잉카(Towing Car)가 비행기를 서서히 활주로로 밀어넣는다. 다음 순간, 화물기 안의 화물들은 바다 건너 어느 땅에 있을 주인을 찾아 번개처럼 떠났다.
산업이 바뀌면 화물도 바뀐다
현재 서울발 화물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공항으로는 뉴욕 JFK, 로스앤젤레스, 프랑크푸르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뉴욕 JFK와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대한항공이 자체 터미널을 운영할 정도로 물동량이 많다. 현지에서 출발하는 화물은 홍콩 첵랍콕, 상하이 푸둥, 로스앤젤레스 공항 순으로 물동량이 많다고 한다.
2000년 미국 동부지역의 지속적인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지은 대한항곡의 뉴욕 신화물청사는 연간 20만t의 화물처리능력을 갖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화물터미널은 화물시스템을 미국 세관 시스템과 연결해 화물 도착 이전에 사전 통관이 가능하다.
대한항공은 2008년부터 중국의 항공화물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중국 내 최대 물류회사인 시노트랜스 유한공사와 합작해 톈진에 여섯 번째 터미널을 만들 예정이다. 전갑명 팀장은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진출 방향을 모색하던 중 시노트랜스가 노하우를 갖고 들어와 합작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시노트랜스는 물류회사이고 대한항공은 항공 운송 기술을 갖고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리라 생각했다. 또 중국 내에서 영업하는 데 필요한 네트워킹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화물운송 가격은 형식적인 공시가격이 있을 뿐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1kg당 공시가가 5930원인 유럽행 화물기의 경우 시장가는 3000원 정도. 최형찬 대리는 “단골 고객들 또는 물량 규모에 따라 디스카운트를 해주기도 한다. 가격은 포괄 계약 형태로 사전에 대리점과 항공사 간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고 귀띔했다.
1974년 태평양 노선에 B747화물기를 취항시키려 하자 “가발, 스웨터 등 의류가 주종인 대한민국 수출상황에서 100t급 화물기를 띄우는 건 무모한 시도”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화물기 대부분은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의 전자제품과 모피류가 채웠다. 1980년대에는 우리나라 전자제품과 자동차가 해외시장에 얼굴을 알리며 컴퓨터·반도체·자동차 부품이 주력 화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반도체와 컴퓨터에 더해 휴대전화·LCD 등 IT제품이 항공화물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008년을 맞는 현재 대한항공 화물기는 국제 화물운송 연속 4년 1위를 노리며 전세계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다.
날이 어둑해졌지만 화물터미널 어디에도 완벽한 어둠은 없다. 화물을 주인에게 안기기까지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터미널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이곳의 변천사가 곧 우리나라 산업발달의 역사다’라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화물터미널의 철문을 열고 나오니 흰색 조명의 말끔한 사무실이 나온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공간은 그렇게 달랐다. 다시 노란색 마티즈를 타고 여객터미널로 돌아오니, 물리적으로는 불과 수백m의 거리지만 어느 때보다도 먼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기분이랄까.
그 순간, 멀리 하늘 위로 세계 1등 화물기가 세계 1등 반도체를 싣고 어둠을 가르며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