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한 말입니다. 같은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노동 현장은 신분제 사회나 다름없습니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고용 형태가 어떠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거칠게 말하면 시대를 잘 만났거나 운이 좋은 이들은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안정된 삶을 삽니다. 저 같은 비정규직은 드라마 대사처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장그래는 상사와 동료에게 같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니 그나마 행복한 편입니다.
고용노동부가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려 ‘장그래법’이라는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당사자인 비정규직들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은 현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탁상에서 만들어낸 실효성 없는 대책이라는 것입니다.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최장 4년까지 늘리는 게 핵심 내용인데,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것을 오히려 막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그래를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릴 것이라고 봅니다.
“고통 연장하는 것일 뿐”
저는 30대 초반입니다. 정부가 밝힌 대로 4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요. 숙련도가 높아져 기업이 채용할 것이라고 하던데, 비정규직이더라도 노동력을 제공할 숙련된 노동자는 널린 게 현실입니다.
이 글을 쓰느라 인터넷을 검색해 비정규직 실태를 알아봤습니다. 대기업 노동자 100명 중 20명이 파견·하도급·용역 등 소속 외더군요. 15명은 기간제 노동자고요. 10명 중 4명 가까이가 비정규직인 것입니다. 이것을 정상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을까요.
4년 후에는 나이가 더 많아집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집도 장만해야 합니다. 4년 후에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또 다른 4년을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되겠죠. 그러면 제대로 된 급여는 한 번도 받지 못하고 40대가 돼버리는 겁니다. 40대를 정규직으로 채용할 회사가 과연 있을까요.
사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대책은 딱 하나입니다.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반드시 정규직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기간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거듭 말하건대 4년으로 기간을 늘리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보수 정서가 강한 지역에서 태어나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이었으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보수 정권은 국민보다는 기업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최근 개정판이 새로 나온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읽었습니다. 1980년대 노동자의 고난이 고스란히 담겼더군요. 말이 안 되는 얘기겠지만, 시집을 읽으면서 차라리 그 시절이 행복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때는 노동자가 모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신분이 나뉘어 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파견·하도급·용역 제도가 아예 없었다고 합니다. 다 같은 노동자였던 것이죠.
정규직 노동자와 대공장 노조에 가진 불만도 없지 않습니다만, 주제가 흐트러지는 것 같아 글로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서 정규직 ‘직영’이 1등 노동자라면 2등은 ‘하청’ 노동자입니다. 직영은 대기업 소속 노동자로 사회의 중간 이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 교육도 제대로 시킵니다. 1980년대에 입사한 사람들은 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직영 아래 신분이 하청입니다. 대기업이 하청을 준 회사 소속으로 일하는 겁니다. 직영과 하청은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신분만 다른 겁니다.
“촉탁 노동자를 아십니까”
저는 하청으로 일하다 3등 노동자가 됐습니다. 다시 하청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촉탁 계약직 노동자라는 말을 모르는 분도 있을 듯합니다. 저는 1년 계약직인데, 더 짧게 계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촉탁’은 하청보다 더 근무환경이 열악합니다.
사람을 실력이나 성과에 따라 평가해 급여를 주는 게 아니라 신분에 따라 삶이 나뉘는 게 온당한 일인가 싶습니다. 대공장이 엄청난 성과를 내더라도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바뀌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직영이 되는 것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입니다.
나이 지긋한 직영은 한 해 8000만~9000만 원을 벌기도 합니다.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정규직은 300만~500만 원, 하청은 200만 원 이상, 촉탁은 200만 원 미만을 월급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퇴직금이나 각종 복지를 고려하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직영, 하청, 촉탁은 소득만 다른 게 아니라 사는 곳 등 삶의 방식도 다릅니다. 새로 지은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직영을 보면 솔직히 부럽습니다. 하청이나 촉탁은 전셋집이나 임대 아파트에 사는 경우가 많고요. 열심히 일하는데도 원룸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남편이 직영인 어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아이들의 신분마저 나뉘는 게 올바른 사회일까요. 저는 잘못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사용하는 통근버스 승차권이 다른 회사도 있습니다. 출퇴근하면서도 자괴감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4인 가족 소득 16만 달러?
대통령, 정치인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저건 아닌데 싶습니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삼으면 연 소득 16만 달러 시대가 온다는 것인데, 저와 제 주변을 보면 다른 나라 얘기일 뿐입니다. 4만 달러라는 숫자보다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 없이 누구나 같은 사람으로서 사는 세상이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업 수익만 늘려 4만 달러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이 기업에도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회사, 내가 만든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생산한 제품은 아무래도 다를 겁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해 기업 이득만 높이는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의 미래가 어떨까요. 저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품을 잘 만들어도 그 제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인 나라가 정상적인가요.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는데, 근본적 해법을 마련할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습니다.
저도 언젠가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말했듯 장그래법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남들보다 잘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게으르게 살거나 나쁜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고 싶다는 게 과한 욕심인가요. 일하는 사람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선진국이 될 수도 없거니와 소득 4만 달러 시대가 되더라도 사람들의 삶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