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지 오해한 게 무식?
때로는 비하적 표현
‘양두구육’ 이준석 진심
장경태 탓 토론 기회 잃다
‘선정주의 중독’ 한국사회
11월 12일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오른쪽)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아동의 집을 찾았다. [대통령실]
11월 14일 장경태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발언의 일부다. 윤석열 대통령 동남아시아 순방 일정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에서 심장질환 환아를 끌어안고 찍은 사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장경태의 발언으로 인해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가 지니는 자극성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국회의원의 품격에 적절치 않은 표현”이며 “과도하게 김건희 여사로 초점이 가는 것은 문제”라는 비판이 나왔다. 11월 16일 국민의힘은 장경태를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고, 국민의힘 소속 여성 의원들은 별도의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그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같은 날 허재현 전 ‘한겨레’ 기자가 장경태에 대한 윤리위 제소 뉴스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곁들인 촌평만 봐도 알 수 있다. 허재현은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를 모른다는 건 상식 이하 아닌가. 이 말 취지를 오해하는 것 자체가 무식을 드러내는 창피한 일”이라며, 해당 용어의 사용에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문제 삼는 쪽의 지식과 교양이 부족하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이 민주당 쪽에만 있지는 않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역시 ‘빈곤 포르노 교양설’ 편에 섰다. 11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운을 띄웠다. “우리는 얼마 전 양두구육이라는 4자 성어를 잃었고, 지금 Poverty Porn이라는 상당히 앞으로도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해봐야 하는 용어를 잃는다.”
이준석에 따르면 “빈곤 포르노는 전장연 문제만큼이나 꼭 짚어내야 하는 전근대적 문화”다. ‘빈곤 포르노’를 앞세워 미디어의 관심을 독점하는 단체들이 큰 문제고, “언젠가 타파해야 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포르노’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오래된 논쟁에 대해 한 번도 고민 안 해본 사람임을 인증”한다고 주장하며 그는 되묻는다. “한국식 먹방은 외국에서 “Korean Food Porn”이라고 한다. 그러면 먹방 유튜버들이 포르노 배우라는 것인가?”
11월 23일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 발언에 앞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뉴스1]
인류 공통 상식
진한 베드신이 나오는 일반적인 영화와 포르노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의 전개와 필요에 의해 베드신이 들어갔다면 아무리 에로틱한 장면이 들어 있더라도 영화다. 반대로 베드신을 찍기 위해 나머지 부분들을 대충 만들어 붙였거나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포르노다.포르노는 현실의 성생활을 반영하지 않는다. 섹스에 대해 사람들이 품은 판타지 중 일부를 부풀려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쩌구 포르노’ 역시 그 ‘어쩌구’의 실상을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 ‘푸드 포르노’ 출연자들은 한 번에 10인분 넘는 음식을 먹어치운다. ‘빈곤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 속에서 선행을 베푸는 누군가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자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과장하고 때로는 극적으로 연출한다.
영어권에서 ‘어쩌구 포르노’라는 표현이 쓰이는 방식은 단순하다. ‘어쩌구’의 자리에 들어가는 대상을 선정적 혹은 외설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빈곤 포르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푸드 포르노’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찍고 그것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감 포르노(Inspiration porn)’라는 개념도 있다. 대체로 극심한 장애를 지닌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좌절하지 말고 인생을 열심히 살자’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영상물 등에 따라붙는 비아냥거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쩌구 포르노’라는 화법은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게 아니다. 한국은 성적으로 폐쇄된 사회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으니 ‘어쩌구 포르노’가 가치중립적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오해한 것이다. 무언가를 노골적 성인물에 빗대는 것이 좋은 말일 수가 없다. ‘빈곤 포르노’ 같은 표현에는 빈곤, 장애, 질병 등 진지하게 접근할 사회적 의제를 선정적으로 소비한다는 비판마저 담겨 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이준석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한국의 ‘먹방’이 외국에서 “Korean Food Porn”이라 불리는 건 먹방 유튜버들이 포르노 배우라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게 좋은 뜻인가? 그렇지도 않다. 당연히 비판적이고, 때로는 비하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외신들도 ‘Food porn’ 대신 ‘Mukbang’이라는 용어를 쓴다. 먹방 유튜버가 포르노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애초에 누군가를 ‘어쩌구 포르노’ 출연자라고 하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 공통의 상식이다.
‘양두구육’이냐 ‘포샵질’이냐
이준석을 언급한 김에 ‘양두구육 논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소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준석은 대통령 후보 윤석열을 과대포장했다는 뜻으로 양두구육이라는 사자성어를 꺼내들었다. 주지하다시피 양두구육이란 ‘양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 윤석열은 졸지에 ‘개고기’에 비유되고 말았다.이준석은 이 표현이 정당하다고 항변했다. 11월 16일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짐작해볼 때, 그 억울한 마음은 지금도 여전한 듯하다. 그렇더라도 이준석에게 윤석열을 비판, 혹은 폄하할 마음이 없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윤석열을 국민 앞에 과대포장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꼭 양두구육을 거론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맥락에서 이준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윤석열이라는 복학생 형이 소개팅을 나가고 싶다고 하기에 프로필 사진을 열심히 포샵질해 주었다.’ 과대포장이라는 뜻만 놓고 보자면 ‘양두구육’이나 ‘포샵질’이나 같은 말이다. 독자 여러분도 느낄 수 있다시피 이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 일단 사람을 개고기에 비유하고 있지 않다.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이 깔려 있다. 또한 필자 노정태를 아무리 포샵질해도 배우 차은우로 보이게 할 없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포샵질로 부풀렸다’고 말하면 그래도 원판이 어느 정도는 된다는 칭찬 아닌 칭찬도 담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이준석은 양두구육에 꽂혔고 지금도 양두구육 타령이다.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모르기는 어렵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일상 언어는 수학 공식이나 논리 부호가 아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그 미묘한 뉘앙스와 맥락을 살려, 같은 말이지만 다른 뜻을 담아내는 것이 수사법이며 그 중 핵심 기법이 바로 비유다. 김건희가 캄보디아 환아를 ‘병풍’ 혹은 ‘소품’ 삼아 화보를 찍었다고 말하는 것과, 그가 ‘빈곤 포르노 화보’를 찍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전혀 다른 뜻일 수밖에 없다. 마치 ‘양두구육’과 ‘포샵질’이 같은 말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고 버틸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어느 날 이준석이 ‘SNS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사흘 만에 다시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그 모습을 본 A와 B는 모두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했다.
A: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B: 개가 똥을 못 끊지.
이 두 속담은 분명히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버릇이 들면 바꾸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A와 B는 전혀 다른 말이다. A는 이준석을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그의 SNS 중독을 ‘개 줘야 할 나쁜 버릇’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B는 이준석을 개, 그것도 똥 먹는 개로 취급한다. 이준석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A를 들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겠으나 B만큼 불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론화 위해 피해야 할 어휘
장경태가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을 운운한 의도와 맥락을 우리는 모를 수가 없다.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빈곤 포르노를 거론한 것은 대선 전부터 ‘쥴리’니 ‘술집여자’니 하는 식으로 음해 받았던 김건희를 향한 여성혐오적 공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장경태가 “아동을 이용해 가난과 아픔을 홍보 수단으로 삼은 점”을 진지하게 문제 삼고 싶었다면 빈곤 포르노 같은 자극적 어휘는 오히려 피했어야 한다. “가난을 대상화하지 말라” “빈곤국의 환아를 소품처럼 사용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자와 후자는 완전히 다른 표현이다. 담고 있는 뜻과 뉘앙스가 또렷하게 구분된다.
장경태가 빈곤 포르노라는 표현을 사용한 탓에 우리는 진지한 토론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유명인사, 특히 정치인이 가난‧질병‧장애를 소품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취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대중의 관심이 필요하며,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나서서 이목을 끈다면 지원을 받기 수월해진다는 논리다. 게다가 김건희와 화보를 찍은 캄보디아 어린이는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그러한 이벤트로 인해 약자가 직접적 도움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결국은 좋은 일 아니겠는가.
물론 일리 있는 말이지만 필자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싶다. 선정적이거나 작위적인 장면을 동원해서라도 대의를 위해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위험성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운동권 세력은 고(故) 윤금이 씨, 고 심미선‧신효순 양, 그밖에 주한미군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은 사람들의 끔찍한 장면을 정치 선동을 위해 활용해 왔다. 오늘날의 감수성으로 보면 용납되기 어려운 일 같지만, 지금도 운동권 더 나아가 정치권 일부는 동일한 습속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좋은 의도로 찍는 홍보용 사진을 이런 경우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바탕에 깔린 논리는 동일하다. 선정주의(Sensationalism)다. 센세이셔널한 장면을 통해 대중을 동원한 후 그 힘을 선한 의도로 쓰면 되는 것 아니냐는 사고방식이다. 문제는 선정주의가, 마약성 진통제처럼, 사안의 근본적 해결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마저도 점점 둔감하게 한다는 데 있다.
한국의 정치,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선정주의에 중독돼 있다. 장경태의 빈곤 포르노 발언 자체가 언어적 선정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발화였다고 말해야 한다. 선정주의는 정치, 사회적 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악의 걸림돌이다. 다만 약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싸잡아 선정주의라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선한 의도’를 들이대며 선정주의를 적극 동원해온 맥락과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그럼에도 더 사람다운 사회를 우리가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