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호

3월, 봄보다 먼저 피어나는 야구의 시간

[에세이] 실패를 안고도 다시 ‘야구처럼’

  •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lunapiena7@naver.com

    입력2026-03-14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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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이면 야구팬의 마음은 먼저 깨어난다. 아직 공기는 차갑고 겨울의 그림자는 길게 남아 있지만, 야구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어딘가에서 조용히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선수들의 얼굴, 새 유니폼을 입고 찍은 단체사진, 그리고 ‘올해는 다르다’는 익숙한 문장. 해마다 반복되는 이 풍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세월이 쌓일수록 이 반복은 의례처럼 느껴지고, 그 의례는 어느새 한 해를 넘어서는 문턱이 된다. 2026년 프로야구 개막을 앞둔 지금, 야구팬은 다시 야구의 시간을 맞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묻게 된다. 왜 우리는 이 오래된 스포츠를 여전히 기다리는가. 왜 야구는 늘 인생과 닮았다고 느껴질까. 봄보다 먼저 피어나는 것은 언제나 그라운드의 흙냄새다. 손끝에 닿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냄새는,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됐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다. 우리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야구의 시간은 단순한 경기 일정이 아니라, 마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또 누군가는 청춘의 잔상처럼 그 시간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즌의 시작은 늘 새로운 봄의 첫 문장이 된다.

    야구는 실패를 전제로 설계된 스포츠

    야구장은 독특한 공간이다. 네 개의 베이스가 이어 만든 다이아몬드 형상 위, 단순한 질서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난다. 투수는 어떻게든 주자를 내보내지 않으려 하고, 타자는 어떻게든 1루에 도달하려 한다. 단 한 걸음, 단 한 베이스를 둘러싼 수싸움. 이 짧은 거리 위에서 벌어지는 긴장은 기술을 넘어 심리와 인내, 판단과 용기의 경쟁이 된다.

    투수의 손끝에서 떠난 공은 18.44m를 날아 포수 미트로 향한다. 타자는 그 찰나에 모든 계산을 끝낸다. 치느냐, 보내느냐, 참느냐, 버리느냐. 이 선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꾸고 때로는 한 선수의 인생을 뒤흔든다. 투수의 팔은 계절을 가르고, 타자의 방망이는 시간의 속도를 바꾼다.



    그라운드 위에서 공 하나가 날아가는 동안, 관중석의 수천 명은 동시에 숨을 멈춘다. 아무 말도 없지만, 모두가 같은 박동을 느낀다. 그것은 ‘함께 살아 있음’의 리듬이다.

    야구에는 정답이 없다.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결과는 예측을 비켜간다. 완벽한 투구가 안타로 이어지기도 하고, 빗맞은 타구가 담장을 넘기도 한다. 그래서 야구는 불확실하고,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한 원로 선수는 말했다. “야구는 실패를 전제로 설계된 스포츠다.” 이 말대로다. 열 번 중 세 번 안타만 쳐도 리그 정상급 타자가 된다. 일곱 번 실패를 끌어안고 서 있는 것이 실력이다. 이 통계는 야구의 본질이자 인생의 이름을 닮았다.

    우리는 매 순간 완벽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한 번 실수는 무능의 증거처럼 여긴다. 그러나 야구는 속삭인다. “매번 잘하지 않아도 된다.” 삼진 다음엔 홈런이, 실책 다음엔 호수비가 기다린다. 실패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는 순간에도, 그라운드의 흙은 여전히 따뜻하다. 이 흐름이 주는 위안은 깊다. 실수할 권리, 다시 시도할 기회, 만회의 가능성. 야구는 이를 규칙 속에 품는다. 투수 손끝의 흙가루처럼, 실패는 흔적이지만 더 큰 이야기의 장치다. 그라운드에 떨어진 공처럼, 실패도 다시 떠오를 순간을 기다린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그 기다림은 삶의 온기로 우리 안에 자란다. 그 온기가 겨울의 차가운 손끝을 녹이며, 다시 한번 공과 방망이를 쥐게 만든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서사

    야구는 늘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패자가 아니라고. 이 메시지는 경기장 밖의 삶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너무 일찍 포기한다. 한 번의 실패로, 한 번의 좌절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그러나 야구는 끈질기게 말한다. 아직 한 번 더 기회가 남아 있다고.

    이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바로 “9회 말이 끝날 때까지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다. 이 말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인물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다. 뉴욕 양키스 시절, 그는 수없이 많은 극적인 역전승을 경험했다. 한 경기에서 양키스는 8회까지 6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관중 상당수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황에서, 그는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야구는 늘 마지막에 대답해.” 그리고 그날, 양키스는 9회 말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은 그날 이후 하나의 격언이 됐고, 야구의 상징적 언어가 됐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 속에도 이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셀 수 없이 많다. 9회 말 투아웃 이후 터진 끝내기 안타, 연속 사구(死球)와 볼 넷, 그리고 믿기 힘든 만루 홈런.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함성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그 장면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집단적 감정의 분출이 된다. 우리는 그 순간, 패배 직전의 절망과 승리의 환희가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를 체감한다. 야구는 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기 전까지, 언제든 새로운 서사가 시작될 수 있다.

    매번 새로운 서사를 선사하는 야구, 그중에도 한국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 야구는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는 반복되던 노동과 긴장 속에서 시민들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열어주었다. 라디오와 흑백 TV를 통해 전해지던 경기 중계는 가족이 함께 모여 앉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매개가 됐고, 어린 시절 아버지 옆에서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점수판을 상상하던 기억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 리그를 넘어 하나의 생활문화로 자리 잡았다. 특정 팀을 응원하는 일이 더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일부가 돼간다. 미국 메이저리그나 유럽 프로축구가 12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이어져 내려온 팀 사랑으로 한 집안의 역사를 만들어왔듯 한국에서는 야구가 이제 그 길 위에 서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손을 잡고 처음 야구장을 찾았던 아이들은 이제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같은 자리에 앉는다. 유니폼은 대물림되고, 응원가는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그렇게 팀에 대한 기억은 가족의 기억이 되고, 공동체의 서사가 된다.

    야구장에서 우리는 독특한 공동체적 경험을 한다. 각자의 삶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같은 색 유니폼을 입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 선수마다 정해진 등장곡이 울려 퍼질 때, 관중석은 하나의 거대한 합창단이 된다. 이름 모를 이들이 동시에 손을 흔들고, 동시에 숨을 멈춘다. 이 집단적 리듬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함께 있음’의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야구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례 공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경기 시작을 앞둔 구장에는 다양한 얼굴이 모인다. 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 오랜 친구와 함께 온 중년 부부, 혼자 자리를 지키는 노신사까지.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이 공간에서 잠시 겹친다. 낯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장면에 동시에 숨을 멈추는 경험. 야구장은 그렇게 낯선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의 감동은 더욱 크다. 우리는 그곳에서 혼자가 아니다.

    2025년 9월 4일 오후 경기 수원시 KT위즈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 뱅크 KBO리그'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경기에서 관중이 응원하고 있다. 뉴스1

    2025년 9월 4일 오후 경기 수원시 KT위즈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 뱅크 KBO리그'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경기에서 관중이 응원하고 있다. 뉴스1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봄

    2024년 KBO 리그는 사상 최초로 1088만 관중을 돌파했고, 2025년에는 1231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야구가 다시 우리 삶의 중심으로 돌아왔다는 신호다. 한때 ‘느리고 복잡한 스포츠’ ‘젊은 세대와 멀어진 종목’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야구는 더 단단해진 이야기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기록보다 얼굴, 성적보다 과정. 부상에서 돌아온 투수의 첫 등판, 무명 신인의 데뷔 첫 홈런, 은퇴를 앞둔 베테랑의 마지막 시즌. 우리는 숫자보다 이 장면들을 기억한다. 

    야구의 인기는 선수들의 몸값 상승이라는 또 다른 풍경도 만들었다. 일부 스타 선수들의 연봉은 20억 원을 훌쩍 넘고, FA 시장은 해마다 최고 기록을 경신한다. 그러나 화려한 숫자 뒤에는 소수의 선수에게만 보상이 집중되는 구조와 선수 다수가 여전히 불안정한 현실이 공존한다. 한 번의 성과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환경 속에서 성장의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하지만 야구가 요구하는 힘은 훨씬 느리고 조용하다. 투수는 몇 해에 걸쳐 투구를 다듬고, 타자는 수천 번의 헛스윙 끝에 단 한 번의 완벽한 타이밍을 얻는다. 이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투지가 아니라 인내다. 남보다 빠르기보다,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지는 태도. 야구는 이 느린 성장을 존중한다. 그래서 야구는 빠르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시대에 더욱 귀하다.

    물론 이 열기에는 그림자도 있다. 인기 경기는 매진되고, 암표 거래는 일상이 됐다. 웃돈 없이는 좋은 자리를 얻기 어려운 현실은, 야구가 모두의 스포츠라는 원칙을 다시 묻게 한다.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국민 스포츠라 할 수 있다.

    3월 12일, 시범경기의 첫 공이 던져지는 순간부터 야구의 시간은 시작됐다. 신인의 첫 등장, 베테랑의 마지막 불꽃, 부상에서 돌아온 선수의 재기, 예상을 깨는 반전. 이 모든 서사는 다시 다이아몬드형 그라운드 위에서 다시 펼쳐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의 삶과 닮은 한 장면을 발견한다. 야구가 좋은 이유는 단순하다. 야구는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실패를 견디는 법을 보여주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기 때문이다. 9회 말이 끝날 때까지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이 단순한 진실은, 인생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한 번의 시즌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이미 절반쯤은 행복해진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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