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26년을 대북정보 및 공작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천안함 폭침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적화야욕은 여전한데 우리의 대북 인식은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제 경력에 맞는 국민운동을 펼치고 싶어 연구소를 설립했죠.”
그의 말처럼, 그는 대북특수공작원 양성 등 국군정보사 여단장을 거친 대북정보통이었다.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시절에는 2년간 군 관련 첩보만 1300여 건을 수집할 정도로 최고 무관이었다. 미국연방수사국(FBI)과 미군보안사령부(NSC) 관계자들은 사방팔방 쏘다니며 첩보를 수집하는 그를 ‘inquisitive officer(꼬치꼬치 캐묻는 장교)’라 부를 정도였다. ‘로버트 김’ 사건도 이런 대북활동 과정에서 발생했다. 로버트 김 사건은 미해군정보국(ONI) 소속 컴퓨터 전문 문관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이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비밀 문건을 건네주다가 1996년 9월 FBI에 체포돼 9년형과 보호관찰 3년을 언도받은 사건. 로버트 김이 건넨 문건 중 ‘시크릿(SECRET·비밀)’ 표시를 지운 문건이 ‘독이 든 사과’가 됐다.
“(로버트 김 문건에) 중독되니 내가 ‘화이트(White·활동국의 정보기관에 신상이 알려진 스파이)’라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북한의 무기구매 첩보 같은 민감한 내용도 있었죠.”
이 사건 뒤 백 대령은 사실상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 돼 귀국했고, ‘조용히’ 첩보부대장을 지내다 2001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그러더군요. ‘(무관으로) 안 갔다 와도 진급될 사람이었는데…지금은 너를 진급시키면 한미 해군 간 군사협력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뭐, 옛날이야기죠.”
예편 이후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대학원 초빙 강의를 했다. 2009년에는 (사)해룡을 설립해 2년간 경북 울진~독도 간 220㎞ 릴레이 수영 횡단 사업을 추진했다. 수영 횡단에는 주로 예비역 해군 출신이 참여했는데,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다.
“(사)해룡 대표이사도 물려줬어요. 이젠 국민과 직접 만나서 국가안보와 애국헌신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국론을 분열시키고 이적(利敵)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의식전환 강의도 할 겁니다. 안보나 국익은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아니잖아요?”
사건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미국 비자 발급이 거부되는 등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미 양국 정부에 비자 발급을 수차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국에 있는 아들의 대학 졸업식과 결혼식에도 참석 못했어요. 어쩌겠습니까. 언젠가 저의 충정을 알아주겠죠. 김 선생(그는 로버트 김을 이렇게 불렀다)도 어렵게 사시는데…. 김 선생은 연구소를 만든다고 하니까 ‘참 잘됐다’고 하셨어요.”
그는 연구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뜻을 같이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모아 제대로 된 ‘안보 싱크탱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시스템이 갖춰지면 안보관련 정책보고서를 만들어 정책에 반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연구소가 들어선 건물 새 주소가 호국로(護國路) 777-17번지입니다. 행주산성과 북한산성, 김명원(조선 중기 문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임진강 방어전 전개) 선생 묘 등 곳곳에 호국 관련 문화재가 있어 이름 붙여졌대요. 저와 호국은 정말 인연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