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수원역을 출발한 택시가 도청오거리를 지날 무렵 60대 중반의 택시기사는 갑자기 실소를 터트렸다. 기자가 경기 연정(聯政)에 대해 물을 때였다.
“지난해 남경필 지사가 연정한다면서 부지사 자리를 야당에 준다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는 경기도가 좀 조용하긴 해요. 그래도 알 수 없죠. 내년 총선 때 또 멱살잡을지….”
비생산적인 한국의 정치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구 대상’이던 연정이 경기도에서 처음 그 실체를 드러냈다. 도의회와의 협력을 시작으로, 도내 각 시군 단체장과 이웃 광역단체와도 연정에 나서는 등 그 보폭도 커진다. 택시기사의 말처럼 도민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싸우지 않아서 좋다’는 반응이다.
연정은 복수의 정당이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좌우(左右) 대연정처럼 이념이 각기 다른 정당이 연합 정권을 구성하는 형태다. 세월호 정국과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등 가팔랐던 여야 대치 정국에서도 경기발(發) 연정은 조용히 그 싹을 틔웠다. 이는 지난해 6·4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한 남 지사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남 지사는 연정을 ‘연립정부’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정치를 하나로 모으는 ‘정치연합을 하겠다’는 의미로 쓴다. 구체적으로는 협의를 통해 만들어가자는 의지가 담겼다. 이걸 대한민국 인구 4분의 1이 사는 경기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정책 합의로 시작
경기 연정은 2014년 5월 11일 남 지사가 지방선거 출마선언을 하면서 시작됐다. 남 지사는 이날 연정을 처음 제안했고, 당선 이후인 6월 11일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 연정을 다시 제안하면서 출발선을 넘었다.돌이켜보면 연정 개념이 국민에게 인식된 데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이 크다. 2005년 7월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한나라당에 국무총리 자리와 권력의 절반을 주겠다”며 이른바 대연정을 제안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진정성이 의문”이라며 단호히 거절하면서 연정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런데 경기 연정은 야당이 받았다. 다만 ‘정책 합의’로 연정을 시작하자던 야당의 역제안을 도지사가 받아들였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경기 연정은 삐뚤삐뚤하지만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남 지사의 설명이다.
“200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상정을 놓고 국회에서 망치가 등장하고 소화기 분말이 뿌려지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 현장에 제가 있었는데, ‘아, 이건 진짜 아니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여야가 싸우지 않고 협력하는 정치를 보여주기 위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실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시대정신은 권력 분산이고, 연정은 권력을 분산해 힘을 합치는 협치(協治)입니다. 제가 50.4%를 얻어 당선됐는데요, 나머지 절반의 도민은 상대 후보를 찍었잖아요. 그럼 권력도 어느 정도 나눠야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만큼, 경기 연정은 서로가 하나씩 주고받으면서 길을 튼다. 여야가 정책을 공동 실천하고, 지사가 임명한 경기도 산하 공공기관장에 대해 도의원들이 청문회를 실시하고, 야당 인사인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가 보건, 여성, 환경 부문을 맡았다. 경기복지재단 등 6개 산하기관의 인사·예산권 등을 관할하는 ‘막강한 자리’를 내준 것.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 볼멘소리도 흘러나왔지만, 애초 정해진 로드맵은 없었다. 야당과 도정을 함께 이끌어간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다. 연정협상단 관계자의 회고는 이렇다.
“남 지사가 새정치연합 측에 연정을 제안하니 새정치연합은 ‘정책협의를 먼저 하자’고 역제안을 했다. 사회통합부지사 자리를 받으려면 진정성을 확인하고 명분도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는데, 우리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연정을 실현하고자 여야 국회의원과 도의원, 실무진 10명이 참여한 정책협상단은 7차례 모여 머리를 맞댔다. 여야 정책 중 이견이 크지 않은 정책부터 실천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세월호 참사 이후 화두가 된 안전 문제와 교통, 일자리, 경기북부 발전 방안, 재정 등 20개 정책을 공동 실천하는 정책합의문을 확정했다.
연정, 그 불꽃 튀는 신경전
새정치연합의 민생 공약인 ‘생활임금조례’와 무상급식 예산운영 규칙을 제정하기로 하는 등 야당 요구 사항이 대폭 반영됐고, 따복마을(따뜻하고 복된 마을공동체 조성 사업)과 빅파이 프로젝트(빅데이터 무료 컨설팅서비스) 등 남 지사 공약도 포함됐다.김문수 전 지사가 재임 마지막 날인 지난해 6월 30일, 생활임금조례 등 4대 조례안 재의결 무효확인소송과 집행정지신청을 취하하고 수정·합의해 처리키로 한 것은 눈에 띄는 진전이었다. 생활임금조례는 경기도가 용역계약을 맺는 근로자들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조례로, 6·4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민생 공약 1호였다. 이를 야당이 다수당인 8대 도의회가 통과시키자, 김 전 지사의 집행부는 ‘권한 남용’이라며 무효소송을 냈다. 극한의 갈등을 연정을 통해 끝낸 것이다. 나아가 지난 4월 2일 6차 연정실행위원회에선 생활임금조례안을 도 출자·출연기관까지 확대 적용하는 데 합의했다.
여야 협상단 관계자들은 “협상 과정은 불꽃 튀는 신경전의 연속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정책합의문 15번에는 ‘도의회가 참여하는 경기 재정 전략회의를 신설한다’고 명시해 예산 심의 이전에 야당이 예산 편성에도 참여하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자 여당은 비정규직과 보육교사 처우개선 등에 예산이 집중될 경우, 지출 한도를 정한 ‘연정 가계부’를 통해 적절히 제어하자며 ‘경기 연정 예산가계부’를 만들자고 주장해 반영했다. 연정은 이런 식이다. 주거니 받거니 한다. 한 여당 관계자의 회고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 양당 실무자끼리 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야당 중진의원들을 찾아 설명하는 등 인내의 연속이었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물론, 김 전 지사 측 인사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때는 ‘이렇게까지 연정을 꼭 해야 하나’하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한 야당 의원은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니들이 생활조례를 알아?” 하고는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고, 여당 의원도 “나도 연정 안 해”라고 발끈하면서 좌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러한 ‘인내의 터널’을 지나 정책 합의를 이룬 만큼 차기 도지사, 차기 도의회 원구성이 바뀌어도 합의된 정책을 번복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은 춤추지 않는다’는 점은 연정의 장점이다.
도의회 인사청문회도 치열하게 진행됐다. 도지사가 임명하는 산하 공공기관에 대해 국회처럼 의회가 인사청문회를 열어 도덕성과 자질을 따져 묻도록 한 것이다. 경기도시공사 등 6개 주요 기관장이 되려면 도덕성검증위원회의 도덕성 검증(1차)과 각 소관 상임위원회의 직무적합성 검증(2차)을 통과하도록 했다. 광역단체장이 정치적 빚을 갚는 보은(報恩) 인사나 측근을 임명하던 과거와 달리 임명권자는 인선 단계부터 바빠졌다고 한다. 남 지사의 말이다.
“흔히 본 ‘흠집 내기 청문회’가 아니라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는 명실상부한 청문회를 하자고 당부했다. 그런데 의원들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지적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사를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경기도는 지난해 말까지 경기도시공사 사장 등 6명의 산하기관장을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했다. 그 과정에서 2명의 후보자가 낙마했다. 남 지사는 부적격 의견을 낸 인사에 대해 임명을 보류, 재공고를 했다. 비공개 도덕성 검증 방식은 ‘신상털기’와 ‘망신주기’로 얼룩진 기존 인사청문회와 대비되면서 국회와 다른 광역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사회통합부지사는 경기발 연정의 핵심이지만 ‘부지사로 가는 길’도 험난함 그 자체였다. 도의회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경기 연정 주체는 새정치연합 경기도당이 아니라 경기도의회”라며 도당이 부지사 추천 가부 결정과 추천권을 행사하려 한 데 반발했을 땐 자칫 부지사 선출이 무산될 뻔했다. 결국 도의회가 연정 주체를 명시하면서 의원들 사이에 서서히 부지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슈뢰더 前 총리 “경기 연정 인상적…성공 믿는다”
“정권을 잡았는데 왜 권력을 넘겨주느냐는 의원도 많았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연정을 하기로 한 이상 수없이 참을 수밖에. 연정은 곧 정책 합의인 만큼, 당 대 당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정책적으로 접근하니 일이 잘 풀렸다. 연정을 통해 배운 점이다.”
결국 지난해 12월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가 취임하고, 경기 연정실행위원회를 꾸리면서 연정은 본격 레이스를 시작했다. 연정실행위원회는 사회통합부지사와 양당 교섭단체가 위원장을 맡고, 도의회 의원 등 11명이 위원을 맡았다. 연정 정책과제를 발굴하고 재정전략회의의 토대를 만드는 ‘연정 컨트롤 타워’다.
지금까지 7차 실행위원회 회의를 거치면서 연정은 역주할 태세다. 경기도와 31개 시·군이 함께 하는 ‘1박2일 상생협력 토론회’와 강원도 등 광역단체 간 협력사업을 진행하는 등 ‘연정 2.0’ ‘연정 3.0’ 버전을 보여줄 정도로 보폭이 빠르다. 4월 3~4일 경기 안산에서 열린 경기도와 시군 토론회는 화성 공동화장장 건설, 상수원보호구역해제 등 갈등을 빚는 분쟁 시군과 도 공무원이 참여해 ‘그룹 토론’을 벌였다. 나머지 시군은 도와 재정제도 개선 토론회를 열어 실질적인 상생협의를 했다.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의 설명이다.
“시군과 소통하는 ‘시군 연정’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광역단체가 신규 사업을 벌이면 시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예산을 대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는 그런 일 안하겠다’는 걸 보여준 거다. 맏형답게, 시군의 어려움을 듣고 소통하는 또 다른 연정이었다. 집행부와 도의원,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재정전략회의를 마련해 투자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재정 연정’도 진행 중이다. 우리는 도민과 국민을 위해 함께 가는 거다.”
경기도는 이제 연정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남북한과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 간의 갈등 문제를 풀어나갈 ‘연정 4.0’ ‘연정 5.0’ 버전을 준비 중이다. 경기 연정이라는 작은 정치 실험이 이제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한국 정치의 대안을 향해 2인3각 레이스를 펼치는 셈이다.
5월 22일 경기도의회에서 연설을 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이러한 정치 실험을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연설에서는 힘들지만 경기도가 2인3각 레이스를 펼쳐야 할 이유를 읽을 수 있다.
“협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같이 일한다는 겁니다. 소수 의견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죠. 여러분이 서로 다른 의견을 없애는 게 아니라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그와 관련된 법안을 마련한다면 연정의 근간은 탄탄해질 겁니다. 다만 차이에 대해서는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세요. 저는 경기 연정을 상생의 정책을 펼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만일 연정과 관련해 법적인 토대가 없다면 정치적인 합의에 기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볼 때는 경기 연정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첫 시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