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남경필(50) 경기도지사는 조금 다르다. 5선(選) 의원을 지냈지만, 정치인 이미지보다는 벤처기업인 같은 인상이다. 답변도 ‘예스’ ‘노’가 확실해 행간을 읽으려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쾌활함은 그의 천성이다.
6월 3일 경기 의정부 경기북부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남 지사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지난 1년을 정리했다.
“사람이 참 간사해요. 지사 1년 해보니 이젠 국회 쪽 쳐다보면 ‘저 사람들 왜 저러나’ 싶어요(웃음). 국회의원일 때는 비판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았는데, 도지사는 비판을 받으며 책임을 지는 자리인 거 같아요. 내가 생각한 게 현실이 되니 책임도 느끼고 보람도 있죠. ‘도지사 좀 만납시다’를 하다보니 참 많이 느낍니다.”
▼ 도지사 좀 만납시다? 민원 상담 말인가요?
“네. 매주 금요일 오전 민원인들을 만나는데요, 사실 제가 먼저 배웁니다. 국민이 이런 걸로 고통받고 있구나, 공무원은 이런 일을 하는구나, 저 공무원은 아는 건 많은데 불친절하구나….”
▼ 억지를 쓰거나 큰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요.
“민원인의 80%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해요. 잘 들어만 줘도 80%는 해결됩니다. 민원 상담하다가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에는 유기견 3000마리를 키우는 여성 두 분이 왔는데, 현재 개를 키우는 땅이 사유지로 밝혀져 쫓겨날 판이라는 거예요. 유기견을 키울 땅을 물색해달라는 건데, 방법을 찾아봤죠.”
거대한 ‘개 파크’
▼ 도유지를 무상 임대하나요?“애견파크를 만들어보려고요. 동물과 사람의 공존, 사랑, 재미를 집어넣어 유기견도 안전하고 위생적인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개와 교감하고 분양도 받고…, 거대한 애견 파크를 만드는 거죠, ‘개 파크’. 저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공직자와 연구원들에게 던집니다. 검토 결과 ‘오케이’가 나오면 진행하는 거죠. 제대로 성사시키면 승진을 보장하는 식으로 격려해요. 그래서 ‘떼 승진’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웃음).”
▼ ‘경기 연정(聯政)’이 관심사인데요. 사회통합부지사 자리를 만들어 야당 인사에게 부지사 자리를 주고, 도의원들이 산하기관장 인사청문회도 했죠? 최근에는 시·군 상생협력토론회, 광역단체 간 협력 등 연정 범위도 확대하던데요.
“성공시켜야죠. 최근 여야의 해묵은 갈등, 당청관계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낍니다. 경기 연정은 정치적 합의라는 작은 시작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통합을 이뤄내고 그걸 바탕으로 통일을 이뤄내는 정치적 자산이 될 겁니다. 시대마다 시대정신이 있잖아요? 경제성장, 민주화시대를 지나 이제는 행복한 국민시대로 가야 해요. 민주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회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해야죠. 광역단체도 서로 만나서 갈등을 풀고, 우리가 이익을 얻었다면 나누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동북아 문제도 우리가 갈등의 핵심이어선 안 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해결자 노릇을 해야죠. 결국 남북 간 공존과 협력이 되면 우리도 아시안패러독스 당사자가 아닌 조정자가 될 수 있잖아요.”
아시안패러독스(Asian Paradox)는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협력과 상호의존 수준에 비해 정치와 안보 차원에서 갈등이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상황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다. 연정 정신을 바탕으로 당장 지방정부에서 갈등을 해결하면 남북 간,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 간의 갈등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그는 “경기 연정은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 그동안 해외 순방도 여러 번 했는데, 조정자 노릇을 했나요?
“대통령이 정상외교를 하면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 등 그다음 레벨 책임자들도 외국 인사들과 교류해야 합니다. 제가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등을 만났을 때 ‘핵이 있는 분단된 한반도와 핵이 없는 통일 한반도 중 어떤 모습이 중국 외교에 부합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할 순 없잖아요? 그럼 누군가가 대신해 외국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소통해야죠. 가끔 도지사가 왜 외교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봐요.”
▼ 경기도는 북한 접경도인데요. 북한에도 연정을….
“그럼요. ‘남남포용’부터 해야 ‘남북포용’이 되겠죠? 안보는 생존의 문제이니만큼 연정 정신은 통일을 이뤄내는 정치적 자산이 될 겁니다. 경기 북부지역은 북한과 103km에 걸쳐 맞닿아 있어요. 통일한국의 ‘코어’입니다. 저는 경기 북부에 투자를 확대해 명실상부한 통일 미래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싶어요. 자꾸 경기 북부를 강조하다보니 어떤 분들은 저를 남(南)경필이 아니라 ‘북(北)경필’이라고 하더군요(웃음).”
▼ 계파 갈등, 권력 집중과 독식이라는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연정 제안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 시작할 때 ‘한국에서 연정이 되겠느냐’며 냉소적으로 보는 일부 인사들 때문에 힘들었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잘 풀리더라고요.”
권력자는 참아야
▼ 선거에 당선돼 어렵게 잡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을 텐데요.“당연히 휘두르고 싶죠. 그러나 권력자는 참아야 합니다. (권력자는) 참고, 감시받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5월 2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경기도 의회에서 ‘독일통일 및 연정경험과 한국에 주는 조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어요. 저는 슈뢰더를 보면서 ‘보통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 지도자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소신의 사나이’로 불리는 게르하르트 슈뢰더(71) 전 독일 총리는 총리 시절인 2003년 ‘어젠다 2010’으로 불리는 국가 개혁을 추진했다. 노년층 일자리와 청년층 취업 기회를 넓히고 연금수령 연령을 높이려 한 것이다.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 노선과 달리 우파 정책을 추구했다. 당연히 소속당인 사민당(SPD)과 지지 기반인 노동계는 격렬히 반발했다. 그러나 슈뢰더는 “독일을 ‘유럽의 병자’로 전락시키는 통일 후유증을 치유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며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현재 독일 경제는 상한가를 치지만, 당시 슈뢰더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결국 ‘어젠다 2010’을 추진한 지 2년 만에 총선에서 패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슈뢰더 전 총리는 “나 역시 인기 없는 개혁을 밀어붙이면 낙선할 우려가 크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정치인은 사익보다 국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 지사는 이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 연정은 순풍인데, 남 지사가 주도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여당에서 폐지해야 한다며 논란거리가 됐는데요.
“사실, 선진화법은 제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병통치약이 없듯이 지고지순한 법도 없어요. 선진화법이 비효율적이라면 합리적으로 개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18대 국회에서 제정된 선진화법은 폭력 국회를 막으려는 치료약이었습니다. 18대 국회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을 보여줬습니까. 2008년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망치사건 기억하시죠? 18대 말에 선진화법 제정 이후 19대 국회에선 몸싸움이나 폭력이 있었습니까? 물론 야당이 이해는 되지만 너무 (선진화법을) 써먹긴 했어요. 국민은 정치권이 싸움 안 하고 협력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의원들이 연정과 같은 합의제 정치를 해나가면 선진화법은 사문화될 겁니다. 슈뢰더 총리도 지난 강연에서 ‘한국은 개헌해라. 그게 안 되면 협력해라’고 하더군요. 현재 상황에서 개헌이 되겠습니까. 협력해야죠.”
▼ ‘경기 에너지 비전 2030’은 슈뢰더 전 총리의 ‘어젠다 2010’에 견줄 만한데요(에너지 비전 2030은 전국 온실가스 배출량 1위, 전력 소비 1위 지자체인 경기도가 신재생에너지 발전 등에 집중 투자해 2030년까지 전력자립도를 7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경기도 전기 사용량의 70%는 다른 지역 주민들의 희생과 불편 속에 생산됩니다. 에너지 소비량이 워낙 많다보니 다른 시도에서 만든 전기를 당겨쓰죠. 우리가 지금처럼 전기를 써대면, 경상도와 전라도 해변가 사람들은 계속 고통받게 되잖아요? 이젠 우리가 나서서 고통을 분담해야죠. 비전을 달성하면 원전 7개는 가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업과 협력해 20조 원 이상의 에너지 신사업 시장을 열고 15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입니다. 제가 2030년까지 도지사 하겠습니까. 이 또한 연정 합의가 필요하고,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다음 지방선거에서 야당 도지사가 나와도 계속 추진되잖아요? 연정 정신이 이런 거죠.”
좋은 일자리는 ‘트리거’
“가계소득을 높이고 복지·저출산 문제, 청년 취업난 등을 해결하려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트리거(trigger·방아쇠, 촉매제)’를 때려야 연쇄 반응을 일으켜 구조가 바뀝니다. 제가 볼 때는 좋은 일자리가 트리거입니다. 일자리 없이 성장하는 사회는 소수 자본가와 창의력을 가진 소수를 위한 번영일 뿐입니다. 공유할 수 없어요. 자동화,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IoT) 등 큰 흐름 위에서 투자하고 기업 유치에 온힘을 다해야죠. 이미 판교 테크노밸리에는 5만 개의 훌륭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기창조혁신센터도 들어섰어요. 젊은이의 꿈과 열정을 현실로 이뤄줄 용광로 같은 곳입니다. 앞으로 중소·벤처기업을 위해 슈퍼맨펀드 등을 활용해 1050억 원을 투·융자하고, 중장년층의 사회적 일자리도 만들어야죠. 트리거!”
그의 말처럼 4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취업자 수는 전국적으로 21만6000명이 증가했다. 이 중 73%인 15만9000명이 경기도에서 늘었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경기도의 노력을 평가해 5월 20일 ‘2015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 평가 종합대상’을 수여했다. 앞서 ‘2014년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 전국 1위 ‘2014년 고충민원 처리 평가’ 전국 1위, ‘부패방지 시책평가’ 전국 1위로 선정되면서 경기도는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 연정과 일자리, 차기 대선의 강력한 무기입니까?
“하하. 그런가요? 모르긴 해도 앞으로 정치권 핵심 어젠다는 연정과 관련된 이슈가 될 겁니다. 2017년 대선에서도 연정의 협력정치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거고요. 그런데 지금 제가 대권을 생각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대선 출마가 제 인생의 최종 목표라고 보지도 않아요. 국민 행복을 위해 정치제도의 패러다임을 혁신해가는 길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남 지사는 인터뷰 말미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해선 정부에 쓴소리를 했다.
“국민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메르스 관련 지역과 병원을) 다 아는데, 정부의 대국민 정보 공유 방식(비공개를 지칭)은 아주 구식입니다. 메르스 관련 불안감만 키우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경기도는 최근 300병상 이상을 지닌 병원 관계자를 설득해 이미 격리병원을 확보했어요. 앞으론 경기도 차원의 일일 브리핑을 통해 알려드릴 겁니다.”
이후 정부는 ‘메르스 병원 명단’을 발표하고 지자체와의 정보 공유를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