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전국시대 열리다

난세의 개혁자로 떠오른 조양자·문후·서문표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11-11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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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열리다
    중국역사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는 통일국가가 명분 없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던 난세로 알려져 있다. 도덕보다는 실력 본위로 갈라서 약육강식이 횡행하던 시대이니, 사회·문화도 보잘것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그 밝은 측면도 자주 거론된다. 낡은 명분에 구애하지 않는 ‘다양성 속의 자유경쟁’으로 발전이 한층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 시대구분도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로 엇갈린다. 하나는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라는 주장이다. 다른 견해는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잡는다.

    그런데 기원전 475년은 명목상 천하를 다스린다는 주(周) 왕조의 분가이기도 했던 강대국 진(晉)나라로부터 그 신하 격인 한(韓)·조(趙)·위(魏) 3가(家)가 반란을 일으켜 주가(周家)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분할한 해다. 또한 기원전 221년은 서북지방의 강대국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뤄진 해다.

    한편 기원전 403년은 쇠락한 주 왕조가 마지못해 한·조·위 3가의 주가 분할이라는 하극상을 합법화하고, 그들 3가를 제후국으로 승인한 해다. 이는 주 왕조가 대의명분과 존재가치를 스스로 포기한 행위였다. 한국사에 비유한다면, 김일성 집단이 스탈린의 허락을 얻어 300만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킨 6·25전쟁을 합리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과오 자체도 중대하지만, 과오에 대한 공식적 합법화도 이에 못지않게 부당하다는 것이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정치와 윤리학의 공통적 견해다. 춘추시대에도 도덕은 문란했지만, 전국시대 이후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사학의 통설은 전국시대를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구분한다. 이 기간에 부당한 전쟁을 통한 약육강식이 성행하면서 이전 춘추시대 초기에 약 140개, 말기에 약 40개를 헤아리던 제후국의 수는 크게 줄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정한 독립을 누린 제후국은 ‘전국(戰國) 7웅’이라 불리던 연(燕)·제(齊)·조(趙)·한(韓)·위(魏)·초(楚)·진(秦)의 7개국뿐이다. 그중 한·위·조가 ‘신흥 3국’에 해당한다. 진(晉)나라를 분할한 이들 3국의 발흥과 공인이 곧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지칭된다.

    지백의 오판과 패망의 길

    원래 진(晉)나라는 주(周) 왕조의 친척 격으로, 영토가 광대했으며 기원전 632년에 남방의 대국 초(楚)를 격파한 후로는 중원의 패권자로서 약 100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는 주공(周公)이 벙벙해진 반면에 중신들이 똑똑하여, 그 중 지(知)씨·범(范)씨·중행(中行)씨·조(趙)씨·한(韓)씨·위(魏)씨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주공의 중대한 과오로는 중신들에게 영토와 군대를 나눠주고 세습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재정적으로 대우를 잘해주면서 그들을 원로원 같은 자문기구에 포함시켜야 좋았을 것이다. 쓸모가 있더라도 한 직위에 오래 두지 않고 예비역이 되게 했다가 전쟁 등 유사시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영국식 방법을 활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주공에겐 그만한 지혜나 상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고작해야 출공(出公) 때 횡포가 심한 네 중신을 치고자 외세인 제나라와 노나라의 힘을 빌리다가 사전에 모의가 탄로 나는 바람에 출공이 외국으로 도주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애공(哀公)이 즉위했으나, 사건 처리를 주도했던 지(知)씨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당주가 지백(知伯)이란 사람이었는데, 영리하긴 했으나 총명하지 않았고, 인정미가 없어 덕망이 신통치 않았다.

    지백은 우선 주공 측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범씨와 중행씨를 쳐 없애고는 그 영토를 병합했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중신인 한·위·조 3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우선 한씨에게 사신을 보내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한씨의 당주 한강자(韓康子)는 그러한 요구를 즉각 거절하려 했는데, 재상인 단규(段規)가 침착하고 슬기롭게 간언했다.

    “두 가지 대응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토 할양을 거절하는 것인데, 지백의 성격은 거만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침공해올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응낙하면 지백은 우쭐대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영토 할양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절당하는 경우도 생길 것인데, 지백은 그 나라를 침공할 것입니다. 그런 사태 속에 우리는 재난을 모면하면서 정세의 변화를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시적인 할양이 좋겠습니다.”

    이에 동의한 한강자는 사신을 보내 1만호의 현을 바쳤다. 지백은 기뻐하며 위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영토를 요구했다. 위환자(魏桓子) 또한 처음엔 분개해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재상의 건의를 수용해 역시 1만호에 해당하는 1개의 현을 헌상했다. 이에 재미를 붙인 지백은 나머지 조나라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했으나 이번엔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조양자(趙襄子)는 총명하고 기개 있는 수재였다. 비굴하게 평화를 구걸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똑똑한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불러 의논했다.

    “지백이 쳐들어올 텐데 어디를 근거지로 삼아 방어하는 것이 좋을까.”

    “일찍이 선군(先君)께서 윤택에게 진양성(晉陽城)을 관리케 하셨습니다. 윤택이 선정을 베풀어 조세를 감면하고 복지 향상에 노력한 결과, 그곳 백성이 윤택을 따르고 조씨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조양자가 알아듣고 곧바로 거처를 진양(오늘의 산시성(山西省)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옮긴 뒤 농성을 준비했다. 현명한 군주라야 현명한 신하를 둘 수 있는 법이다.

    적 水攻 역이용해 승리

    지백은 자체 병력 외에 한·위의 원병까지 동원해 공격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진양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지백은 조군(趙軍)이 탈출할 수 없도록 포위 대형을 넓히는 동시에 진수(晉水)라는 냇물을 막아 성 안으로 흘러들게 했다. 포위 작전은 3년 동안 이어졌으나 조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나무 위에서 살며, 나뭇가지에 솥을 매달고 취사하는 형편이 됐다. 식량도 바닥나기 시작했고, 성 안엔 절망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양자는 고민 끝에 다시 장맹담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장맹담이 새 계략을 말하자, 모든 실행을 그에게 맡겼다.

    어둠이 짙어가자 장맹담은 홀로 작은 배를 타고 증명서만 감춰 휴대하고는 한군과 위군의 본영을 차례로 찾아갔다. 한강자와 위환자를 직접 만난 것이다.

    “입술이 사라지면 이가 시리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백이 지금 조군을 치고 있지만, 조씨가 망하면 다음 차례가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백은 사납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모의한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는지 상상만 해도 무섭습니다.”

    “그럴수록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저만 알고 있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디데이’는 다음날 밤으로 약속됐다. 장맹담이 순서를 결정하고 돌아오자 조양자는 재배(再拜)로 맞이했다. 다음날 밤 약속시각이 되자, 한과 위의 병사들은 저수지의 둑을 지키던 지백군 보초에게 살그머니 접근해 갑자기 달려들어 쳐 없앴다. 동시에 넘치도록 물을 담은 둑을 터서 난데없는 홍수가 지백 진영을 휩쓸었다. 지백군은 어쩔 줄 몰라 아우성 치며 낭패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좌우에서 한군과 위군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진양의 성문이 크게 열리더니 조양자가 정면에서 전력투구식 총공격을 개시했다. 어두운 밤에 혼란을 틈타 순간적으로 감행한 결사적 기습이었다.

    당황망조하여 어쩔 줄 모르던 지백군은 여기저기로 몰리다 순식간에 섬멸당했다. 지백 자신도 사로잡혀 겹겹이 묶이고 말았다. 적의 수공(水攻)작전을 역으로 이용한 기습작전의 승리로 역사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참살된 지백의 두개골은 약간의 가공을 거쳐 승리한 조양자의 술잔으로 둔갑했다. 또 지백의 모든 영토는 조·한·위 3국에 의해 남김없이 분할됐다.

    망한 것은 지백에 그치지 않았다. 진(晉)나라 공실의 운명 자체도 문제였다. 정공(靜公)은 무능하여 ‘가문 타령’만 일삼았는데, 영토가 한·조·위에 의해 분할되면서 궁전에서 쫓겨나 서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종가 격인 주(周) 왕실은 이 같은 현실을 수십년 동안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기원전 403년에 한·조·위를 제후국으로 공식 승인하고 말았다. 이는 곧 전국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대의명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실력 본위의 할거상태에서 서로 싸우는 전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국시대 열리다

    전국 7웅

    나아가 주(周) 왕조가 진(秦)군의 점령으로 멸망한 것은 기원전 256년의 일이다. 그후 진제국의 통일천하(기원전 221년) 수도는 과거에 주 평왕이 ‘수도 이전’을 위해 버리고 떠났던 옛 수도의 터에 다시 정착하게 됐다.

    전국시대는 부단한 전란의 시대인 동시에 대변혁의 시대였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유경쟁이었다.

    개혁의 선두주자, 위(魏) 문후(文侯)

    전국 7웅은 진(秦)·초(楚)·제(齊)·연(燕)과 한(韓)·위(魏)·조(趙)를 일컫는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뒤의 세 나라는 신흥국이다. 신흥국은 급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기득권층의 반항도 적다. 더욱이 세 나라는 중원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교육·문화 수준이 높고, 교통이 편리했다.

    그 선두주자로서 유명한 군주가 위나라의 문후(文侯)다. 장기집권 50년(기원전 446~396년) 동안 유능한 개혁가인 이회(李 또는 이극(李克))·오기(吳起)·서문표(西門豹) 등을 등용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수한 지도자만이 우수한 인재를 알아보고 쓸 수 있는 법이다.

    문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인재들을 대우했다. 자신의 체면이나 선입견에 구애하지 않고, 인재들의 견해나 건의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청(傾聽)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나라 안팎에 걸친 신용을 생명처럼 중시했다. 그의 인품과 성격, 수양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외국에서도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문후는 특히 외교의 으뜸이 재치가 아니라 신용임을 헤아렸다. 국방 면에서도 평화를 구걸하는 식의 아부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억지력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우선 그는 과감하고 현명한 개혁정치가인 이회를 중용하면서 개혁의 제1 과제인 기득권층의 세습적 특권과 ‘가문주의’의 횡포를 배제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개혁의 최고 반대자는 기득권층이게 마련이다. 다만 그 대응책은 불필요한 ‘과거 뒤지기’로 불안과 불만을 확대하는 데 있지 않다. 새로운 인사정책과 상벌제도에서 무엇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성과주의를 관철하는 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위 문후는 전국시대의 선두주자로 평가된다.

    경제정책에서는 현재의 소강상태에 안주하거나 선심성 행사를 자랑하지 않았다. 불시에 닥칠 수 있는 절량(絶糧)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양곡 비축과 관개시설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법제 면에서는 중국 최초의 성문법 제정이 돋보인다. 이 법은 사회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서문표의 개혁과 미신 타파

    위 문후는 새 인재 서문표를 등용하고 그동안 골치 아팠던 난치구인 업(킌)에 부임시킨 뒤 믿음직한 호위대를 거느리게 했다. 서문표가 현지에 도착해보니, 주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없고 뭔가 겁에 질린 듯한 절망감이 감돌았다. 그는 식자층과 노년층을 모아놓고 물었다.

    “이곳 주민이 가장 고통받는 사연은 무엇입니까?”

    “마을 앞을 흐르는 저 강 속에 강물 대감, 아니 용왕님이 계셔서 우리는 매년 처녀를 바쳐야 합니다. 그 행사로 주민들이 딸을 빼앗기고 비용까지 대야 해 모두 고통을 당합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시오.”

    “용왕님이 매년 장마철에 홍수를 조절한답니다. 색시가 마음에 들고 정성이 깃들어야 홍수 피해를 줄이거나 쉰다고 합니다. 그 비용은 관청과 유력자들이 조달하는데 세금으로 할당됩니다. 금액의 2∼3할은 행사비용으로 쓰지만, 나머지는 그들과 무당들이 나눕니다.”

    “색시를 바치는 절차는 어떻소?”

    “그때가 되면 무당이 가가호호를 돌며 어여쁜 처녀를 찾아냅니다. 데리고 가서는 몸을 씻기고 비단옷을 입혀 대기시킵니다. 사당 같은 것을 지어놓고 그곳에 살게 합니다. 10여 일 후에 예쁘게 장식한 그 사당에 처녀를 싣고 강물에 띄웁니다. 처음엔 떠 있다가 한참 흘러가다 가라앉고 맙니다. 그런 풍습이니 똑똑한 딸을 둔 가정은 깊은 밤에 멀리 도망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곳의 인구는 줄고 모두 가난합니다. 그렇지만 오랜 구전에 따르면, 색시를 강물에 바치지 않으면 그 뒤탈로 큰 홍수가 밀어닥쳐 집은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빠져죽는다고 합니다. 이래서 이런 풍습을 버리지도 못한 채 고통받고 있습니다.”

    서문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그 행사 때 예전처럼 유력자와 무당들이 처녀를 강기슭으로 데려오게 하시오. 그리고 내게 꼭 알려야 하오. 나도 나가서 송별하지요.”

    드디어 그날이 왔다. 서문표가 통지를 받고 나가보니, 지방의 유력자와 공무원, 그리고 70세 가까운 무당 할머니와 그 제자들, 구경꾼 등 수천명이 나와 있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강물 대감께 바칠 신부를 데려오라. 과연 예쁜지 아닌지 보고 싶다.”

    나타난 처녀는 비록 비단옷을 입었으나, 얼굴 혈색이 죽은 사람 같았다. 화장도 소용없고 겁에 질려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요행이라도 바라면서 치떠는 모습이었다. 서문표는 한번 쳐다보곤 즉각 외면하면서 무당들과 유력자들을 향해 단언했다.

    “이 처녀는 어여쁘지 않다. 수고롭지만 무당께서 강물로 찾아들어가 양해를 빌고, 새로운 미인을 찾아내 머지않아 바친다고 말씀해줘야겠소.”

    그리고는 즉각 호위병으로 하여금 무당들의 우두머리를 물속으로 던져버리게 했다. 한참 있다가 이번엔 “무당님의 귀환이 늦는 것 같다. 이번엔 제자들이 들어가 재촉해보시오” 하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무당들의 간부 격 제자 세 명을 잇따라 물속으로 던져 넣었다. 서문표는 잠깐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무당님과 제자들은 아무래도 여자들이니 강물 대감이 두려워 양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엔 유력자들이 나서야 할 것 같다.”

    즉각 병사들이 달려가 표면에 나서기를 즐기던 유력자 한 사람을 골라 좌우로 부축하며 떠밀기도 하면서 강물 속으로 던졌다. 한편 서문표는 강기슭에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강물 속에서 올 회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광경을 경악 속에 지켜보던 모든 유력자와 공무원의 얼굴빛이 청회색으로 변했다. 다음엔 자기 차례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숨을 공간도 없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이제 됐소. 강물 대감이 통신사를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으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 일이 있은 후, 업 지방의 뿌리깊은 미신은 완전히 타파됐다. 서문표는 결코 유해무익한 ‘과거사 따지기’ 등으로 조직적 반항을 자초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써 기습적 방법을 통해 미래지향적 개혁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둑 쌓기’ 대신 ‘물 빼기’

    나아가 서문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개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천수백년 전만 해도 세계를 앞장서서 이끈다는 중국에서조차 ‘홍수대책’이라고 할 만한 것은 ‘둑 쌓기’밖에 몰랐다. 그러나 서문표는 획기적 방법인 ‘물 빼기’에 착상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홍수예방 대책을, 농업 증산을 위한 ‘물 대기’, 즉 관개시설에 활용했다.

    한국의 경우 약 50년 전의 일이지만, 어떤 공무원은 여의도 수해대책을 걱정하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둑 쌓기와 포플러나무 심기 등의 구상을 운위해 식자들을 낙담케 한 바 있다. 현대에도 그런 꼴이니, 이천수백년 전에 물 빼기를 추진한 서문표의 구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행히 오늘의 한국은 제방 보수, 수로 굴착, 댐 건설 등과 함께 도로 및 가옥 붕괴 방지 등에 유의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상조건의 변화, 산업입지 확대, 취업의 다양화, 관광·체육 진흥 까지 감안한다면 또 다른 새 구상이 있을 수 있겠다. 예컨대 경인운하 개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비현실적인 수도이전론 대신에 충남 서북부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대규모 토목공사로 그곳 주민의 소득을 뚜렷이 향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자.

    서문표는 물 빼기에 물 대기를 겸한 수로(水路)를 12개나 굴착했다. 힘겨운 공사인 만큼, 동원된 주민 사이에 일시적 불평도 적지 않았다. 서문표는 그들에게 홍수 예방과 농업 증산의 이득을 홍보했다. 장래의 보람을 위해 지금 수고해야만 두고두고 다음 세대와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타일렀다. 그 보람은 명백했다. 주민들이 고향에 안거낙업(安居樂業)하면서 풍부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신 타파와 경제 발전에 걸친 서문표의 개혁은 성공작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이가 난세의 생존경쟁에 휘말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이기주의에 쏠려 있을 때 자신의 생활미학을 관철하며 슬기롭게 신경지를 개척해나간 훌륭한 지방행정 장관이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 개혁에는 으레 기득권층의 저항이 거세게 마련이다. 게다가 적잖은 주민은 수로 개척에 대해 ‘교통 왕래만 불편하다’며 반대했다. 또한 민생 우선과 부패 퇴치에 노력하다보니 일시적으로 관청의 창고마다 양곡의 비축량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일부 중앙관료들로부터 ‘유사시 대비 부족’이라는 비판을 듣게 됐다. 그 무렵엔 군주 측근에 붙어 사는 고관대작들에 대한 ‘상납’도 줄어든 것이다.

    그와 같은 불평불만 세력이 합세하여 일부 여론의 오해가 초래된다. 간신배가 문후의 귀에 대고 서문표에 관한 험담과 참언을 속삭였다.

    걱정이 된 문후는 몸소 현지 시찰에 나섰다. 영접한 서문표가 말했다.

    “지금은 전국시대이고, 주공께서는 국가안보는 물론 천하의 패권을 바라보십니다. 그러자면 백성의 정치에 대한 신뢰 확보가 중요하고, 이에 기초를 둔 국민 동원 능력이 필요합니다. 소신은 그 견지에서 미력을 다해왔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서문표는 성두에 올라서서 북을 쳤다. 그러자 주민들은 너나없이 활을 등에 메고 창을 들고는 앞을 다퉈 집합했다. 두 번째로 북을 쳤다. 이번엔 백성이 수레 위에 곡식과 기타 보급물자를 가득 싣고 줄지어 모여들었다.



    문후는 그 광경을 직접 보고는 칭찬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후 서문표는 이 무장력을 거느리고 연나라의 침략군을 간단히 격퇴하고 개선했다.

    서문표의 개혁과 인격에 대한 명성은 천하에 울려 퍼졌고, 오늘날로 전승되고 있다. 그가 홍수 예방에 노력했던 강의 이름은 산시성의 장하(河)다. 현재도 그곳 주민들은 서문표를 기리며 회고한다. 현대의 개혁파 인물들이 참고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史記, 滑稽列傳 淮南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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