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美 참전 자극한 히틀러 ‘자급자족론’

2차대전은 ‘경제전쟁’ / 독일편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입력2015-09-22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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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 영의 독 · 일 견제심리가 2차대전 불렀다?
    • 미국, 부도 위기 빠진 독일 ‘지급보증’
    • 독일 배상금 ‘미→독→영·불→미’ 선순환 끊기자…
    • 히틀러 ‘유럽 신경제질서’ 구상, 유로 체제와 비슷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이다. 한국의 광복 70주년 행사를 비롯해 일본 아베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 중국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행사 등 큼지막한 행사들이 8, 9월에 이어졌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2차대전 종전 후 재편된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국가가 ‘전후 질서’라는 결과물에 어떻게 적응하고 잘 살 것이냐에 몰두해왔다. 최근에는 2차대전 발발의 인과관계에 대해 더욱 몰두하고 분석하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 침략행위 등에 대한 반성과 항변이 각국의 처지에 따라 미묘하게 뒤섞였다.

    2차대전은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라는 군국주의·파시즘 신봉자들이 장악한 독일과 일본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각각 수백만,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홀로코스트나 난징 학살 등은 극단으로 치달은 이들의 과오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과 무모함은 인정하고 백번 사죄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데는 복합적인 배경이 있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정치논리와 함께 경제논리를 거론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조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득력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2차대전 발발 원인만 따져보자면 20세기 초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독일과 일본에 대한 초강대국 미국과 대영제국의 견제 심리가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전쟁의 씨앗 ‘부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은 지금의 그리스보다 훨씬 부채에 허덕였다. 전쟁을 치르며 전체 인구의 10%, 영토의 13.5%를 잃은 데다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통해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1320억 마르크라는 막대한 금액을 배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합국 측이 ‘전쟁 피해의 손해배상’뿐 아니라 무기 제조 및 구입비, 병사 월급까지 다 포함한 ‘전비(戰費)의 보상’을 조약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독일이 이를 다 갚으려면 매년 22억 마르크씩 60년이 걸려야 했다. 당시 독일의 1년 세입이 60억~70억 마르크였음을 감안하면, 해마다 국가 재정의 3분의 1을 빚 갚는 데 써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이 마르크화를 무제한 찍어내는 식으로 배상금을 마련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와 환율이 수만 배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화폐와 자산 가치가 폭락한 독일로 몰려든 것은 미국과 영국 등에 포진해 있던 돈 많은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달러와 파운드를 가지고 들어와 부동산 등 다량의 자산을 매입하는 한편 고리대금업을 벌여 시중의 돈을 쓸어갔다. 이런 행태는 훗날 독일 국민이 민주적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을 선택하는 정서적 배경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국가 경제가 완전히 결딴날 위기에 처하자 독일은 지금의 그리스처럼 “이대로는 빚을 못 갚겠다”며 채무 상환을 거부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주체가 1차대전을 통해 세계경제 질서 장악에 나선 미국이다. 미국은 독일이 이른바 ‘도스 공채(公債)’를 발행하면 인수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해주기로 했다. 미국이 독일의 채무 상환에 대해 사실상 ‘지급보증’을 해준 셈이다. 여기에다 이전까지 연합국 화폐로만 지급하도록 돼 있던 보상금을 마르크로 지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방안은 당시 미국 부통령 도스가 제안했다고 해서 ‘도스 안(案, Dawes Pla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1924년 정부가 강제로 은행의 융자를 막고 1조 마르크를 신화폐 1렌탈 마르크로 바꾸는 조치를 취하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 강제 화폐교환 조치가 시장에서 먹혀든 것은 독일 부흥에 ‘베팅’한 미국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 안이 채택된 해인 1924년에만 70억 마르크의 외자가 독일로 유입됐는데, 그 중 50억 마르크가 순수 미국 자본이었다. 1차대전 직전까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국이던 독일은 1차 대전 당시에도 본토 피해는 크지 않았던 덕분에 서둘러 공장을 돌리며 경제 회생에 나설 수 있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와 화학산업이다.

    ‘선순환’ 끊기자 ‘대공황’

    미국의 도스 안은 사실 독일의 부흥에만 해당되는 조치는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1차대전 당시 대량 발행한 전쟁공채의 대부분을 미국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이 독일에 투자를 하고, 독일은 그 투자자금으로 경제를 일으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면,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그 돈으로 미국 전쟁공채를 상환하는 ‘선순환’이 이어졌다.

    이는 거꾸로 독일이 잘못될 경우 연쇄적인 피해의 끝은 결국 미국을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이 당시 미국에 갚아야 할 전쟁공채는 약 70억 달러로 당시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7%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이 전쟁공채의 부실채권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조치는 타당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동안 안정 국면에 있던 독일 경제가 다시 위태로워진 것은 1929년경부터다. 미국과 연합국이 배상금 총액과 지불계속기간을 구체화하는 등 채권 회수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전기(電氣) 시장을 독점한 미국 GE의 최고경영자(CEO) 오웬 영이 배상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오웬 영의 이름이 붙은 이른바 ‘영 안(案)’에는 당초 독일이 부담해야 할 배상액을 3분의 1까지 대폭 줄여주는 대신 미래 가치를 담보할 수 없는 마르크화 대신 연합국 상대국의 화폐로만 지불하도록 했다.

    연합국으로서는 더 이상 마르크의 통화가치 유지를 위해 암묵적인 보호막을 설치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겨우 부흥의 1단계를 넘어선 독일에는 찬물을 끼얹는 조치임에 분명했다. 당시 영국의 경제석학 케인스도 이에 대해 “아무리 단기간이라고 해도 실행되기 힘든 조치다. 1930년이 되면 어떤 식의 경제위기가 찾아와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위기는 금세 찾아왔다. 1929년 6월 ‘영 안’이 발표되자 미국 투자가들이 마르크의 안전성에 의문을 갖게 되면서 일시에 자본을 빼내갔다. 경제위기 조짐이 보이면 얼른 신흥국에서 투자자금을 빼내 주식시장 및 환 가치를 추락시키는 요즘 투기자본의 양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일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배상금 추가 지급에 난색을 표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로부터 배상금이 들어오지 않자 미국에 대한 채권 상환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조짐을 보였다. 결국 미국 투자자 자산의 부실채권화 우려가 커지자 곧이어 미국 주식시장이 대폭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영 안’이 발표된 지 4개월 후에 발생한 대공황(Great Repression)의 서막이다.

    히틀러의 ‘경제 살리기’

    1930~1931년 사이 독일에 투자된 미국 자본은 무섭게 빠져나갔다. 국제 금융업계는 독일에 대한 신규 대출을 정지했고 단기 채권의 우선 상환을 요구했다. 1931년 7월엔 독일 2위 은행이던 다나은행이 파산했고, 역시 메이저급인 드레스덴 은행이 경영위기에 빠지는 등 자본시장 경색이 심화했다.

    급격한 불황으로 인해 전체 인구 6000만 명 중 650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독일 국민은 결국 ‘못살겠다 갈아보자’ 심리를 앞세워 1932년 7월 총선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스를 제1당으로 선택했다.

    히틀러는 1933년 2월 수상에 취임한 지 1개월 만에 ‘제1차 4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최우선 순위로 내세운 과제는 역시 ‘공공사업에 의한 실업문제 해결’이었다. 또한 △가격통제를 통한 인플레 억제 △피폐한 농민, 중소 수공업자 구제 △유대인 및 전쟁 이득자들의 부당이익 환원을 통해 국민에게 배분 △독일 경제계의 재편성 등을 내걸었다.

    대대적인 ‘경제 살리기’를 통해 3년 만인 1936년에 실업자 수를 세계공황 이전 수준인 100만 명 선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국민총생산(GNP)은 이전 최고점이던 1928년 실적의 15%를 넘어섰다. 독일은 이처럼 대공황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침체 속에서 가장 먼저 경제 회복에 성공했다. 2년 뒤인 1938년에는 실업자 수가 29만 명으로까지 줄었다. 미국도 대공황 시기에 최대 1200만 명에 달하던 실업자를 뉴딜 정책 등 다양한 정부 시책을 통해 783만 명으로까지 줄였지만 독일에 비견될 수준은 못됐다.

    당시 세계 열강 사이에선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식민지 국가와의 교역 외에는 해외 수입품들에 대해 관세율을 올리는 이른바 ‘블록 경제(Block Economy)’ 정책이 대세였다. 미국도 ‘스무트·홀리법’을 통과시켜 무려 2만 개 품목의 관세율을 평균 40%대로 일제히 상승시키는 등 유례없는 보호무역 정책을 폈다. 하지만 독일은 2차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 별다른 식민지 없이 내수경제 부흥만으로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1933년 5월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립계획을 발표한다. 다른 유럽 지역 점령을 염두에 둔 군국주의 발상이 내재된 것이었으나 당시엔 실업구제 대책의 의미가 훨씬 컸다. 1년 세입이 70억 마르크인 나라에서 첫해부터 무려 20억 마르크의 예산을 투입했다. 그전까지 진행된 공공사업 예산 총액이 3억2000만 마르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대책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아우토반 건설사업은 ‘노동자 친화적 공공사업’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건설비의 무려 46%가 건설노동자의 임금으로 나갔다. 먼저 노동자 임금이 책정된 다음 역순으로 총 건설비가 정해지는 방식으로 예산이 편성됐다. 노동자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소비 여력도 급격히 확대됐다. 나치스 정권 차원에서 오락 위문단을 구성해 아우토반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이나 스포츠 이벤트를 열기도 했고, 영화·연극 감상회 등도 다채롭게 이뤄졌다고 한다.

    20세기 최대 토목사업

    덕분에 공사 시작 3년 만에 1000km 구간이, 6년 후 2차대전 직전에는 총연장 3000km 구간이 개통됐다. 전쟁 기간에도 공사는 이어져 2차대전 말에는 4000km로 확장됐다. 현재 한국에 건설된 고속도로 총연장과 맞먹는 수준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싸우며 건설하자’는 구호 아래 2년 5개월 만에 420km 남짓한 구간을 개통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지만, 아우토반의 전무후무한 실적에는 족탈불급이다.

    ‘프로파간다의 천재’로 불린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아우토반은 20세기 최대의 토목사업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과 같이 후세에 길이 칭송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4년 차관 제공을 타진하고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당시 서독 총리 에르하르트도 “아우토반 건설은 나치스의 업적치고는 꽤 잘한 일이다”고 말한 바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된 모티프 역시 아우토반이었다.

    아우토반 사업이 성공한 데는 히틀러가 나치스 당원이 아닌 하르말 샤하트 박사를 독일 제국은행 총재, 경제장관으로 전격 발탁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막아낸 노하우를 십분 살린 샤하트 박사는 공사 첫해에 전체 예산 80%에 달하는 16억 달러의 채권을 성공적으로 발행해 안정적인 선순환 자금조달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위험한 국채’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인플레를 막아냈다는 실적이 있었으므로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美 자극한 ‘자급자족경제’

    히틀러는 1936년부터 시작된 제2차 경제4개년계획에서 ‘자급자족 경제론’을 들고 나온다. 식량, 연료, 섬유제품, 고무 등의 원료를 독일에서 직접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독립, 정치적 차원의 독립은 군사력만으로는 안 된다. 국가에 필요한 물자를 타국에 의존하는 독립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미국과 영국 중심 ‘블록 경제’의 반작용에 기인한 측면도 있다. 독일의 ‘자립’을 우려한 영국은 ‘돈을 빌려줄 테니 자급자족경제를 포기하라’며 은근히 회유했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굳건했다. 독일은 신흥 공업국가답게 석유 수요도 많았는데, 당시 최대 산유국이던 미국에 의존하기보다는 석탄에서 추출한 대체연료와 세계 수준의 화학기법을 동원해 ‘인공석유’까지 제조할 정도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급자족경제에서부터 분명한 패착 노선을 걷게 된다. 부족한 자원을 중국에서 충당하겠다며 ‘생명선(生命線)’이라는 자기중심적 논리를 만들어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감행한 일본의 노선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독일은 1940년 7월 ‘유럽 신경제질서’ 정책을 발표하는데, 이는 당시만 해도 유럽대륙 내 전쟁에서 중립노선을 견지해온 미국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미국은 대규모 대(對)독일 직접투자 외에 대표기업인 포드나 GM 등의 자회사를 독일에 진출시켜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으므로 참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 신경제질서는 자급자족 경제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점령지역에서는 마르크를 통화로 하고, 독일과 이들 지역에서는 자본과 노동력, 상품의 왕래를 자유롭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세계경제 질서이던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현재의 ‘유로 체제’와도 같은 구조였다. 지금 중국이 동남아 국가 일부를 섞어서 위안화 결제가 가능한 ‘중화경제권’을 이루려는 시도와도 비슷하다.

    독일은 마침내 1930년대 후반부터 오스트리아 합병에 이어 폴란드 침공을 통해 1차대전 이전 영토 회복에 나섰다. 기존 자국 영토 내에서 필요한 물자를 모두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 주변국가 침공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전 세계 금의 4할을 점유(2차대전 후에는 7할)하던 미국으로서는 독일의 마르크화 중심 경제권 구축 시도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게 됐다. 결국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은 세계경제의 패권을 잡으려던 자신들의 국익과 무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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