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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깊이 숨은 절, 내장사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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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雪의 내장산

다사다난 같은 말조차 서푼어치 사치에 불과했던, 참으로 잔인했던 2014년의 끝에 나는 저 남도의 어느 도시에 일을 보러 갔다가 거기서 기차를 타고 정읍으로 갔는데, 그 소도시에서 치러야 할 일이 저녁에나 있어서 대낮의 긴 시간을 어찌하나, 정읍역과 터미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망설이다가 내장산 내장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던 것이다.

전북 일원에 폭설이 이틀 동안 내렸기에 버스는 앞선 차들이 짚어놓은 타이어 자국을 따라 엉금엉금 내장산으로 들어갔다. 폭설 이후의 평일이어서 산을 찾는 산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사찰로 들어가는 버스에 탄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터미널에서 함께 탄 할머니 두 분은 산하의 작은 마을에 내렸는데 차창으로 물끄러미 내다보니 두 분 또한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 듯 인사도 없이 윗마을 아랫마을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버스는 산을 배운 적 없어 전혀 모르는 나를 태우고 산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이 내리면 세상이 잠시 사라진다. 흰눈이, 폭설이, 대설이 세상을 덮는다. 그런 풍경은 우리 마음을 신성하게 한다. 요즘은 그 말의 기세가 조금 헐거워졌지만 ‘힐링’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차원에서 이를 완벽하게 시공해내는 것은 역시 대설이다.

가뭄 끝에 한 줄기 강렬한 소나기가 내리면 우리 마음의 먼지까지 사라지는 듯하다. 그 비가 그치고 무지개라도 뜨면 또 얼마나 마음이 가뿐한가. 오뉴월에 산천의 초목이 유록색으로 급변하면 또 우리 마음이 싱그럽게 들뜨고 그 청아한 빛들이 가을이면 무르익어 짙은 색으로 변질되어 이윽고 차가운 대지로 흩날려 떨어지면, 그 추락의 풍경 또한 우리 마음을 쓰다듬는 자연의 힐링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어디 대설에 비할 수 있을런가. 흰눈이, 대설이, 폭설이 한바탕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바로 어젯밤의 잡다한 상념이나 한 줌의 고뇌마저 폭설에 파묻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더라도 일단 그 형식이 보이지 않으니 내용 또한 잊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장엄한 자연의 힐링이란 대설이요 폭설에 비할 만한 것이 없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내장산 연봉이 눈을 입고 출렁인다.

기운을 內藏한 곳

세밑의 내장산이 꼭 그러했고, 그 아늑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내장사가 그러했다. 폭설로 인해 정읍에서 내장산에 이르는 길들이 자동차 바퀴 흔적만 빼고는 온전히 흰색으로 뒤덮였고, 이윽고 사하촌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예 눈길을 피해 아무도 그 식당을 찾지 않음으로 인해 온전히 나 혼자였다.

제법 큼직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청했는데, 대찰 아래 식당가였는데도 누워 있던 아주머니 두 사람이 겨우 몸을 일으켜 이런 날씨에 혼자서 밥을 청하는 저 사내는 누구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밥은, 맛이 없었다. 저온으로 그저 온기만 유지해 주는 장치에서 한 그릇 꺼내 온 것이었다. 반찬은 말라 있었다. 그래도 따끈한 국이 한 그릇 놓여 있어 세찬 바람으로 흔들린 마음을 차분히 정돈해주었다.

밥을 먹으면서 신문도 보고 카톡 답신도 하고 페이스북에 정읍역 사진을 하나 올리면서 일부러 시간을 쓸 만큼 쓴 후 다시 내장사로 걸어갔다. 이성부 시인이라면 질색을 할 케이블카가 마침 운행한다기에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케이블카는 운행 거리가 짧았다. 산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내장산의 어떤 코스도 오르기 어려웠다. 실은 그런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 등산로 하나를 선택해 걸어봤는데 두껍게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더니 이내 바짓단이 다 젖고 몇 걸음쯤은 미끄러지고 헛디뎌서 무릎까지 젖어 냉혹한 한기에 사로잡혔다.

하는 수 없이 케이블카를 선택했다. 일하는 분들이 정성껏 쓸고 또 장비를 점검했기에 오히려 안전했고, 당연히 시간은 단축돼 5분도 안 돼 장엄한 내장산의 눈 덮인 경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장산. 영은산(靈隱山)이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옛 백제의 유허로 스산한데 내장산 역시 백제 때 영은조사의 고명을 따서 오랫동안 영은산이라고 불려왔다. 산의 이쪽 편으로 내장사가 있고 저 너머로 백양사가 있어 가을이면 발광하는 단풍을 보러 모여드는 인파로 양쪽의 길이 차량으로 꽉 막히는 절경의 산이다.

사람이 걷고 또 걸어서 이쪽과 저쪽의 사찰에 충분히 가 닿을 만한데, 다시 말해 기암준봉으로 위압적인 곳이 아니라 야트막한 길들이 구불구불 완만히 이어지면서, 높아지기보다는 깊어지는 지형이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더 깊어져서 그 속 깊이 무궁무진한 풍경과 인연과 기운이 온축됐다고 해 내장산(內藏山)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가을에 단풍터널과 도덕폭포, 금선폭포를 따라 걸으면 단풍이 빚어내는 황홀경으로 인해 그야말로 산 밖의 자잘한 일들을 잠시나마 잊고 내장된 기운에 힘입어 비경에 깃들어 기운을 얻는 곳이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날짐승이 아직 쪼아 먹지 않은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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