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깊이 숨은 절, 내장사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5-01-21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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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소백산, 그 높은 산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자주 놀러갔던 고모네 집도 함백산 아래의 탄광 사택이었고 서울로 올라와 북한산 아래에 살았고 한때는 정릉과 미아리 사이, 꽤나 높은 곳에 거의 억지로 지어 올린 듯한 고층 아파트의 24층에 살았기에 일요일 아침이면 등산하는 사람의 형형색색 옷차림을 24층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며 내려다보곤 하였으되, 이런 불가피한 이주의 기록으로 산을 조금이나마 알았다고 감히 엄두를 낼 만한 용기를 나는 한 줌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산을 배우면서부터…

    아, 물론 저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해야만 산에 대해 논설할 수가 있고 한 해에도 몇 차례 지리산을 종주해야만 거룩한 수준의 담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토의 70%가 산세 지형인 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산에 대해 알 수도 없고, 그러니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령 시인 이성부라면 전혀 다른 경지다. 보편적 예술의 차원에서 시 그 자체를 지극히 높은 수준으로 성취해낸 시인이지만, 뭐랄까, ‘산악시’ 이런 분야가 있다면 아마도 최고의 경지로 산에 사무쳐 얻은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시의 한 세계를 이룩한 시인이 이성부다. 그는 시 ‘산을 배우면서부터’에서 이렇게 썼다.





    산을 배우면서부터

    참으로 서러운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산으로만 들어가 헤매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느껴질 때는 이미

    그것들 저만치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산과 내가 한몸이 되어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잊어버렸을 때는

    머지않아 이것들이 가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이런 경지의 깨달음이란 얼마나 많은 육체와 정신의 힘겨운 소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일까. 내 알기로 이성부 시인은 말과 글이 수미일관했고 시의 풍경과 삶의 언행이 그리 어긋나지 않는, 시에 집중해 삶을 구하고 삶에 집중해 시를 얻은 그런 ‘진짜 시인’이다. 그가 산에 오르고 또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고 헤매고 오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산을 배우는’ 수행에 다름아닐진대, 그러므로 시인은 산을 오르고 정복해 야호! 소리 한번 시원하게 질러대는 그런 산행을 마다했다. 시인은 시 ‘쇠지팡이’에서 이렇게 쓴다.



    앞서가는 사람 쇠지팡이 두 개

    바윗돌을 스칠 때마다

    내 머리 어지러워 주저앉아버리고

    푸나무 건드릴 때마다 내가 아퍼

    눈으로 신음소리를 낸다

    씩씩하게 땅바닥 찍는 것을 보고

    땅이 문 닫는 소리 저를 가두는 소리

    온 세상 귀 막는 소리 나에게도 들린다



    이 같은 경지에서 보면 나의 경우는 산에 올랐다기보다는 그저 산속 깊이 차를 타고 들어가 한나절 거닐다가 나왔다고 하는 게 좋을 텐데, 아무튼 잔인했고 지긋지긋했던 2014년을 보내면서 나는 산으로 가고야 말았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大雪의 내장산

    다사다난 같은 말조차 서푼어치 사치에 불과했던, 참으로 잔인했던 2014년의 끝에 나는 저 남도의 어느 도시에 일을 보러 갔다가 거기서 기차를 타고 정읍으로 갔는데, 그 소도시에서 치러야 할 일이 저녁에나 있어서 대낮의 긴 시간을 어찌하나, 정읍역과 터미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망설이다가 내장산 내장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던 것이다.

    전북 일원에 폭설이 이틀 동안 내렸기에 버스는 앞선 차들이 짚어놓은 타이어 자국을 따라 엉금엉금 내장산으로 들어갔다. 폭설 이후의 평일이어서 산을 찾는 산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사찰로 들어가는 버스에 탄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터미널에서 함께 탄 할머니 두 분은 산하의 작은 마을에 내렸는데 차창으로 물끄러미 내다보니 두 분 또한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 듯 인사도 없이 윗마을 아랫마을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버스는 산을 배운 적 없어 전혀 모르는 나를 태우고 산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이 내리면 세상이 잠시 사라진다. 흰눈이, 폭설이, 대설이 세상을 덮는다. 그런 풍경은 우리 마음을 신성하게 한다. 요즘은 그 말의 기세가 조금 헐거워졌지만 ‘힐링’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차원에서 이를 완벽하게 시공해내는 것은 역시 대설이다.

    가뭄 끝에 한 줄기 강렬한 소나기가 내리면 우리 마음의 먼지까지 사라지는 듯하다. 그 비가 그치고 무지개라도 뜨면 또 얼마나 마음이 가뿐한가. 오뉴월에 산천의 초목이 유록색으로 급변하면 또 우리 마음이 싱그럽게 들뜨고 그 청아한 빛들이 가을이면 무르익어 짙은 색으로 변질되어 이윽고 차가운 대지로 흩날려 떨어지면, 그 추락의 풍경 또한 우리 마음을 쓰다듬는 자연의 힐링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어디 대설에 비할 수 있을런가. 흰눈이, 대설이, 폭설이 한바탕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바로 어젯밤의 잡다한 상념이나 한 줌의 고뇌마저 폭설에 파묻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더라도 일단 그 형식이 보이지 않으니 내용 또한 잊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장엄한 자연의 힐링이란 대설이요 폭설에 비할 만한 것이 없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내장산 연봉이 눈을 입고 출렁인다.

    기운을 內藏한 곳

    세밑의 내장산이 꼭 그러했고, 그 아늑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내장사가 그러했다. 폭설로 인해 정읍에서 내장산에 이르는 길들이 자동차 바퀴 흔적만 빼고는 온전히 흰색으로 뒤덮였고, 이윽고 사하촌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예 눈길을 피해 아무도 그 식당을 찾지 않음으로 인해 온전히 나 혼자였다.

    제법 큼직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청했는데, 대찰 아래 식당가였는데도 누워 있던 아주머니 두 사람이 겨우 몸을 일으켜 이런 날씨에 혼자서 밥을 청하는 저 사내는 누구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밥은, 맛이 없었다. 저온으로 그저 온기만 유지해 주는 장치에서 한 그릇 꺼내 온 것이었다. 반찬은 말라 있었다. 그래도 따끈한 국이 한 그릇 놓여 있어 세찬 바람으로 흔들린 마음을 차분히 정돈해주었다.

    밥을 먹으면서 신문도 보고 카톡 답신도 하고 페이스북에 정읍역 사진을 하나 올리면서 일부러 시간을 쓸 만큼 쓴 후 다시 내장사로 걸어갔다. 이성부 시인이라면 질색을 할 케이블카가 마침 운행한다기에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케이블카는 운행 거리가 짧았다. 산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내장산의 어떤 코스도 오르기 어려웠다. 실은 그런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 등산로 하나를 선택해 걸어봤는데 두껍게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더니 이내 바짓단이 다 젖고 몇 걸음쯤은 미끄러지고 헛디뎌서 무릎까지 젖어 냉혹한 한기에 사로잡혔다.

    하는 수 없이 케이블카를 선택했다. 일하는 분들이 정성껏 쓸고 또 장비를 점검했기에 오히려 안전했고, 당연히 시간은 단축돼 5분도 안 돼 장엄한 내장산의 눈 덮인 경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장산. 영은산(靈隱山)이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옛 백제의 유허로 스산한데 내장산 역시 백제 때 영은조사의 고명을 따서 오랫동안 영은산이라고 불려왔다. 산의 이쪽 편으로 내장사가 있고 저 너머로 백양사가 있어 가을이면 발광하는 단풍을 보러 모여드는 인파로 양쪽의 길이 차량으로 꽉 막히는 절경의 산이다.

    사람이 걷고 또 걸어서 이쪽과 저쪽의 사찰에 충분히 가 닿을 만한데, 다시 말해 기암준봉으로 위압적인 곳이 아니라 야트막한 길들이 구불구불 완만히 이어지면서, 높아지기보다는 깊어지는 지형이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더 깊어져서 그 속 깊이 무궁무진한 풍경과 인연과 기운이 온축됐다고 해 내장산(內藏山)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가을에 단풍터널과 도덕폭포, 금선폭포를 따라 걸으면 단풍이 빚어내는 황홀경으로 인해 그야말로 산 밖의 자잘한 일들을 잠시나마 잊고 내장된 기운에 힘입어 비경에 깃들어 기운을 얻는 곳이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날짐승이 아직 쪼아 먹지 않은 감.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내장사 연못에 살얼음이 앉았다.

    連峰들의 열병식

    어떤 점에서, 그러니까 이렇게 폭설이 내린 다음이라면 가을 못지않다. 지금 내 앞의 풍경이 꼭 그러하다. 대찰이 슬며시 들어앉은 내장산 배꼽을 좌우로 연봉들이 열병식을 거행하듯이 잇고 또 이어져서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주봉인 신선봉(763m)을 필두로 해 좌우로 장군봉(696m), 서래봉(624m), 불출봉(619m), 연자봉(675m), 까치봉(717m) 등이 말발굽처럼 어떤 기운을 내장하며 둘러싼다. 지금 그런 풍경 위로 백색의 대설이 한꺼번에 진주해 펼쳐져 있다.

    과연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의 일시적인 이안(移安·신주나 영정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심)의 장소로 내장산을 택한 까닭을 짐작할 만한 품격이다. 왜란 당시 전주의 관리들과 선비들은 전주사고에 보존하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사 깊숙한 동굴로 안전하게 이안해 보관하다가 천천히 바깥 사정을 봐서 강화도와 묘향산을 거쳐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존함으로써 귀한 문화유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기나긴 역사에 걸쳐 내장산이라는 이름이 실로 그 이름에 걸맞은 혁혁한 일을 해낸 순간이었다. 장엄하지만 압도하지 않는, 위풍당당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이런 산세라면 삶의 고비에 처했을 때 일부러 기억하고 찾아들어 스스로 이 산에 내장되고 싶은, 그런 기운이다.

    바람조차 은은해 충분히 더 머무를 수 있었지만 저녁의 귀한 약속을 위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길은 두 갈래. 하나는 올라올 때처럼 케이블카를 타고 5분 만에 하강해버리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쉽게 선택하기는 어려웠다. 다른 방법은 케이블카의 반대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서 내장사로 내려가는 것. 그런데 아이젠을 친 등산화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니고 바닥이 평평한 캔버스화를 신은 채로 과연 내려갈 수 있을까. 전망대 휴게소에서 일하는 분은 질색하며 어서 편한 대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라 했다.

    그럴 마음으로 케이블카 승강장 쪽으로 가다가 나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고봉을 오르는 분들에게는 이 ‘고뇌에 찬 결단’에 대해 하품 나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평소 도시 생활자의 옷차림에 간편화를 신고 폭설의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기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몇 걸음 내디디자 결국 그 길로 계속 따라 내려가게 되고 말았다.

    갑자기 열아홉 살 때 기억이 난다. 녹슨 자전거 한 대를 끌고 서울의 미아리에서 저 강원도 동해안을 바라보고 페달을 밟으려 했던 그 시절, 과연 이 낡은 자전거로 한계령 너머 동해안까지 갈 수가 있을까 주저했지만 일단 집 밖을 나서 10분 쯤 달리다보니 뒤돌아 집으로 가는 것보다 앞으로 그저 페달을 밟고 나아가는 것이 더 홀가분했다. 그래서 그때 페달을 계속 밟고 한계령을 너머 양양으로 갔다가 울진으로 갔다가 마산을 거쳐 광양 지나 목포까지 계속 직진만 한 기억이 있는데, 이 짧은 등산로에서도 잠시 멈칫하며 주저했지만 일단 서너 걸음 떼고 나니 케이블카를 향해 뒤돌아서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정혜심 보살님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내장사에서 사찰 일을 돕는 정혜심 씨.

    길은, 쉽지는 않았지만 전혀 딛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폭설이라서 다행이랄까. 발목이 눈더미 속으로 깊이 박혔지만 덕분에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런 대설에 호기에 찬 등산객들이 미리 위아래로 선행을 해 그 흔적이 뚜렷했으므로 헛디뎌 낭패를 당할 까닭도 없었다. 그렇게 차분하게 눈 속을 걸어 내장사로 스며들었다.

    “… 아이고, 어쩌나. 추울 텐데. 발 시릴 텐데. 어쩌나.”

    큰 사찰의 마당에 인적이 드물었으므로 어느 보살님의 말씀이 필시 나를 두고 하는 것임을 금세 알았다.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거리도 멀지 않고 등산로가 안전하게 돼 있으니 걸어 내려와도 큰일이야 없지만 천지가 눈밭인데, 아차 하면 다치고 큰일인데….”

    “조심조심,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무릎 아래로 차디찬 물기가 맺혀 있었다. 신발도 양말도 다 젖어 발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저기, 들어가요.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가야지. 안 그러면 동상 걸려요. 버스 타러 내려갈래도 20분 넘게 걸어야 하는데…어서 들어가요.”

    절에 가면 절 마당 한켠에 간이 막사 같은 게 꼭 있다. 입구에 불전함을 비치해놓고 간단한 예불 용품도 팔고 차도 팔고 또 불사를 위한 기와를 파는 간이 시설 말이다. 보살님은 하루 종일 그 일을 맡아 하던 중이었다.

    보살님은,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조카를 맞는 사람처럼 전기장판과 전기난로의 스위치를 켜고 따끈한 물을 내주었다. 나는 오랜만에 고모네 집에 온 조카처럼 “괜찮아요, 됐어요, 고마워요…” 하면서 그 환대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다행히 2박3일의 여정을 위한 여벌의 양말과 속옷이 있어서 새로 갈아 신고 입으니 조금 전까지 눈발 속에 몸을 처박던 몰골에서 손쉽게 벗어났다.

    큰 일, 작은 일

    정혜심 보살님. 환대를 받으며 말씀을 나누면서 성함도 알게 됐는데 이 보살님은 서울에 가정이 있고 그래서 남편과 아들이 도시 생활을 건사하고 있지만 인연이 닿고 닿아서 큰 사찰의 일들을 많이 치르며 살아왔다고 한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또 이번에는 내장사의 일을 보는 중이다. 종무소의 일상적인 일들과 주로 기와 불사에 연관된 일들을 맡아 하다보니 머리를 깎은 처지가 아니면서도 산 밖으로 나갈 일이 드물다고 하면서 “이 또한 인연”이라고 덧붙였다.

    “큰 일이야 다 혜산 스님(내장사 주지)을 비롯해 여러 스님께서 길을 밝히고 또 끌어주시니 저야 작은 일들을 맡을 뿐이죠.”

    그러나 어느 정도 세상일을 겪다보면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아니, 당장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그렇다. 폭설의 등산로를 헤쳐 나온 후 잠시 정신을 차린 다음에 천천히 걸어서 사하촌으로 가면 그뿐이지 않은가. ‘저 양반은 행색을 보니 간첩도 아닌데 이런 대설에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나’ 하고 그저 지켜봐도 무방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혜심 보살님은 마다하는 이를 이끌어 따스한 곳에 앉히고, 사양하는 손을 물리면서 따끈한 물을 내고, 주저하는 이를 위해 잠시 차가운 밖으로 나감으로써 불청객이 속옷이며 양말을 급히 갈아입고 신을 수 있도록 배려했으니 이런 일을 결코 ‘작은 일’이라고 물릴 수는 없는 것이다.

    “스님들이 말씀하십니다. 불사에 한번 참여해 그 일을 도모하고 나면 필시 그 사람은 그 절을 떠나야 한다고. 그래서 저도 대웅전 불사 끝나면 서울에 올라가서 이 일로 자주 못 본 가족하고 더 많이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러다가 또 작은 일을 건사해줄 사람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인연을 맺어 그 일을 또 맡아보고…. 그렇게 인연이 인연을 이어줘야 하는 거죠.”

    그렇게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제야 이 절의 중심이 텅 비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눈발에 무릎 아래가 젖었다 해도 절간에 들어설 때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그윽한 풍치를 완상했건만 ‘대웅전 불사’라는 말을 들으니 마땅히 그 중심 공간이 있어야 할 장소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백제로부터 연원하는 고찰이지만 사실 내장사는 화마(火魔)의 엄습을 자주 받았다. 특히 6·25전쟁 때 큰 화재를 입어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문루 극락전 등이 하나씩 새로 들어선 것이다. 그랬는데, 2012년 10월 31일 큰불이 나서 대웅전이 전소되고 말았다. 불상과 탱화와 쇠북도 화마에 휩쓸려 사라졌다.

    대웅전 재건축을 위한 내부 방화 등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사실에 즉하여 판단하는 경찰은 정밀 감심(勘審)을 통해 전기난로 과열에 의한 화재로 결론지었다. 불은 대웅전 안에서 발생했는데 발화 시점에 대웅전에 드나든 사람은 전무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문화재 복원 계획과 예산이 설정돼 있던 터라 고의로 방화해 무리하게 예산을 확보하는 식의 ‘방화 범죄’를 일으킬 까닭 또한 없다는 정황도 확인됐다.

    흰눈에 폭설에 대설에 한 줌 번뇌를 잊다

    정읍 시외버스터미널.

    저희들끼리 사이좋게 잠들다

    그렇게 말씀을 나누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부재(不在)가 오히려 어떤 일을 촉발하는 듯했다. 나는 기와 불사 한 장을 하고 보살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나눈 후 산사를 벗어났다. 산사와 산 아래를 잇는 길은 차륜과 인적이 뚜렷해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한번은 고개를 들어 준봉들을 보고 또 한 번은 뒤로 돌아서 일주문 깊숙한 내장사를 보니, 이성부 시인의 ‘산을 배우면서부터’가 다시 생각났다. 그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오르락내리락

    더 흘릴 땀도 말라버려 주저앉을 적에는

    어서 빨리 집으로만 돌아가고 싶었다

    산을 내려가서 막걸리 한 사발 퍼마시고

    그냥 그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이렇게 집과 산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슬픔도 외로움도 산속에서는

    저희들끼리 사이 좋게 잠들어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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