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여백서원 지기’ 전영애 명예교수[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12-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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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반성한다”

    • “젊었을 적엔 세상이 무서웠다”

    • 여백서원,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

    • 시간이 재산, 순간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소유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편집자 주>

     ‘여백서원 지기’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는 겉모습만 봐서는 누구도 그를 세계적인 ‘괴테 석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이었다. 그는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고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괴테 연구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독일 괴테학회)을 받았다. [허문명 기자]

    ‘여백서원 지기’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는 겉모습만 봐서는 누구도 그를 세계적인 ‘괴테 석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이었다. 그는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고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괴테 연구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독일 괴테학회)을 받았다. [허문명 기자]

    ‘서원(書院)’이라고 하면 흔히 제도권 밖 선비들이 서로 배우고 익혔던 공간이 떠오른다. 경기 여주시(강천면 걸은리)에는 현재적 의미의 서원이 있다. 전영애(70)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독문학)가 운영하는 ‘여백서원’이다. 전 교수는 15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뒤 혼자 서원을 일궜다. 5년 전 정년퇴임 이후에는 아예 이곳에서 머물며 공부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전 교수를 만난 날은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 날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3000여 평(약 9917㎡)에 달하는 넓은 숲과 정원이 나왔다. 이 큰 공간을 일흔에 접어든 노 교수가 혼자 쓸고 다듬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 하고 부르니 낯선 고양이가 다가와 알은체를 한다.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드러누워 장난을 치는 모습이 고양이는 쌀쌀맞을 것이라는 편견을 깬다. 기르는 짐승도 주인을 닮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 교수가 나와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반성한다”

    겉모습만 봐서는 누구도 그를 세계적인 괴테 석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영락없는 촌부(村婦)의 모습. 전 교수는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고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괴테 연구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독일 괴테학회)을 받았다. 2018년에는 학술서 ‘괴테의 서동(西東) 시집 연구서’가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77번째 총서로 나와 독일에서까지 화제가 됐다. 독일 욀스니츠시에서 주는 라이너쿤체상도 받을 예정이다.

    서원 안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였고, 침실은 사람 하나 겨우 누울 공간이 전부였다. 사람보다 책이 우선인 공간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괴테 전집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그와 빨간색 표지의 괴테 파우스트 초판본이 놓여 있는 큰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 건강은 괜찮은지요.

    “아픈 걸 말할 형편이 안 돼 가지고요. 내가 다 저지른 일인데 어디다 응석을 부리겠습니까(웃음). 나름대로 건강관리는 하고 있어요. 40대 때 디스크를 심하게 앓았는데, 어느 날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의식이 맑은 채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즈음 어떤 한의사가 한 말이 생각나더군요. ‘몸도 텐트라고 생각하라, 뼈에 문제가 있다고 뼈만 생각하는데 막대만 갖고는 안 된다. 줄을 잘 이어야 한다.’ 체육관 다닐 형편은 못 되고 이 악물고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지요. 매일 내 나이만큼 윗몸 일으키기를 했더니 어느 순간 디크스가 사라졌어요. 지금도 매일 합니다.”

    - 잠은 몇 시간이나 주무시나요.

    “대중없습니다.”

    - 정원 관리며 모든 것을 혼자 다 한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저기 고장 나면 고치는 게 제일 큰 걱정입니다. 사람 부르면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이 그냥 나갑니다. 집이 덩그러니 크니까 부자 집이려니 하는데, 저는 경제적으로 돈이 일 푼도 없습니다. 땅이고 집이고 다 서원(사단법인)으로 넘겨 어디 가서 대출도 못 받아요(웃음). 근데요, 이상하게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맨손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어디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든 도와주는 분들이 꼭 있어요. (앞으로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언제나 그랬어요.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반성한다는 게 제 인생관입니다. 하하하.”

    밝고 큰 웃음소리가 넓게 퍼졌다. 대화 내내 표정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모습에서 긍정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면서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평생 공부만 한 분이 노동이 힘들지 않은지요.

    “누가 애 길러보고 낳나요, 낳으면 기르는 거지. 머리가 아프면 밖에 나가 풀을 뽑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스톱이 안되는 게 문제예요. (글을 읽거나 쓰는) 정신적인 일은 암만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풀 뽑는 일은) 조금만 해도 확 표가 나니까 무리를 하곤 합니다. 가급적 (밖에) 안 나가려고 주의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젊을 적엔 세상이 무서웠다”

    - 공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느 인터뷰에서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고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서울대 교수까지 지낸 분이 그런 말을 한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젊을 적엔 아무리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마치 벼랑 끝을 두 손가락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잡아주어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자꾸 손등이 짓밟히는 느낌….”

    평생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말투에서 문학적인 어투가 느껴졌다.

    전 교수는 1973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해 대통령상까지 받았지만 독일 유학과 박사과정 진학에서 늘 남자들에게 밀렸다고 한다. ‘여자가 독일문학을 공부해 봐야 할 것이 없다’ 는 말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석사과정을 졸업했을 때에는 결혼과 남매 출산으로 공부의 길이 더 멀어졌다. 어렵사리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갓난아이 때문에 3학기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읽기와 쓰기를 놓지 않았다. 혼자 수많은 독일어 원서를 읽고 번역하면서 대학 졸업 10년 만에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적이 없이 떠돌다 막 개교한 한 사립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으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게 된다.

    “11년 동안 안식년도 없이 1주일에 22시간씩 강의를 했어요.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쳐서 나도 크고 학생들도 크고 학교도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울대로 오라고 해서 가게 된 거지요. 출입국 도장 찍힌 여권이 네 권입니다. 세계 어디든 좋은 강의가 있다고 하면 남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심정으로 달려갔어요. 그런 식으로 제 정신 아니게 살았습니다.”

    “젊을 적 좌절과 방황이 컸겠다”고 하자 “세상이 무서웠다”는 답이 돌아왔다.

    “젊어서는 가진 꿈이라는 게 ‘그냥 사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였습니다.”

    - 그냥 사는 거라면….

    “무슨 수를 쓰지 않고도 그냥 살아도 되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뜻이에요. 세상이 무슨 수를 써야 살아야 하는 것 같았거든요. 계산도 하고 남을 밀쳐도 내야 하고. 그런 거 안 해도, 밀려나도 살아질 수 있는 거. 나처럼 바보같이 살아도 죽지 않고 살아지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여백서원,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

    여백서원 내부에서 바라본 정원. [허문명 기자]

    여백서원 내부에서 바라본 정원. [허문명 기자]

    그의 말을 들으며 평생 책과 문자에만 몰두하면 살아온 사람이 세상 문법에 맞춰 사는 게 얼마나 쉽지 않았으면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망을 이루셨느냐”고 묻자 “제자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에 매달려 그렇게 허덕허덕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를 보면 알지 않느냐’고 말합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는 데 물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디다. 자식도 오로지 내 자식만 돌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스님은 아니지만 요즘 중생들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한 걸음만 떨어져 보았으면 좋겠는데…아직 오지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과거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갑니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몰입’이었다. 그는 엄청난 집중력의 소유자 같았다.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책상에 꼬박 앉아 있던 것은 예사이고, 학교 연구실에서 밤새 공부하다 전기난로에 청바지 무릎 부분이 타는 것도 몰랐던 때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고등연구원으로 있을 때에는 불과 15m 거리 숙소에도 갈 틈을 못 내 연구실에서 밤새 책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프라이부르크대 고등연구원은 연구자들의 꿈의 연구기관이었지요. 각 학문 분야 전공자를 부르는데 아무 조건이 없었지만, 세상에 그것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학기 중엔 강의가 있어서 방학 때만 가서 5년 있었는데, 노벨상 수상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서 ‘저 동양인 여자는 뭐냐’ 소리 안 들으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독일어 연구서 네 권 쓰고 한국 책도 다섯 권이 나왔어요. 그 한권 한권이 제 필생의 책이라고 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 여백서원의 모태는 퇴임 훨씬 전 한창 일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만들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개집 크기라도 좋으니 소반 놓고 앉아서 글만 쓸 수 있는 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학교 연구실은 늘 학생들이 찾아오고 집에 제 방을 갖기까지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20여 년 전에 누군가가 여기 건너편 마을에 헌 집을 찾아줘서 그때부터 여주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폐가인 데다 등기가 안 되는 집이다 보니 늘 집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했지요. 그러던 차에 바로 옆 동네에 땅이 나왔다고 해서 몇 평인지도 모르고 덜컥 계약을 해버렸어요. 그 빚 갚느라고 1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낙성대에 있던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여기서 출퇴근을 했어요. 제 스타일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애들처럼 딴 게 안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턴’이 안 돼요(웃음). 그러다 이렇게 큰 땅을 나 혼자 쓸 수는 없어 나처럼 뭔가가 절실한 사람들과 나누어 쓰려고 서원을 짓게 된 겁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2010년 작고)의 호를 따서 지은 ‘여백(如白)’의 뜻은 ‘흰빛과 같다’는 의미이니, 여백서원은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이란 뜻이다. 본관을 비롯해 작은 정자인 ‘시정’, 외국 학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우정’ 등을 갖추고 있다. 예술가, 학자를 포함해 책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연구 및 창작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는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별도 일정도 마련해 운영한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였지만 그동안 국내외에서 많은 분이 다녀가셨어요. 이탈리아 시인, 폴란드 교수 등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베를린 벽화가 한 분은 여기 방과후학교 어린이들 숙소에 벽화를 그려줘 도시의 명물을 만들어주었고, 쾰른의 화가 한 분은 두 달 동안 102점이나 되는 수채화를 그려서 전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온 장애 자녀를 둔 가족이 화가와 인연이 돼 자녀가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가족은 서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가기도 했어요.”

    서원을 다녀간 이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백서원 마당엔 아기자기한 의자와 장독대가 놓여 있다. [허문명 기자]

    여백서원 마당엔 아기자기한 의자와 장독대가 놓여 있다. [허문명 기자]

    순간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소유

    서원에는 특별한 독일 책들도 보관돼 있는데, 1819년에 출간된 괴테 ‘서동시집’ 초판본, 1854년판 ‘파우스트’, 1831년 ‘파우스트’ 원고 영인본 등 희귀 서적도 많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를 지낸 알프리드 홀레가 별세하기 직전 전 교수에게 “당신이 갖고 있는 게 후세를 위해 좋겠다”며 넘겨준 것들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 등 시대를 풍미한 고전 번역서 60여 권을 낸 전 교수는 2016년 정년퇴임 무렵부터 괴테 전집을 새로 번역하는 긴 작업을 하고 있다. 이미 2019년 ‘파우스트’가 나왔고, 올해 동서양의 정서가 어우러진 ‘서동시집’이 출간됐다. 최근엔 괴테의 편지 번역을 마무리하는 등 24권 중 10여 권 분량은 마쳤다고 한다.

    대화가 괴테 이야기로 접어들자 편안하던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 어떻게 괴테를 파고들게 됐나요.

    “그건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깊게 들어가다 보면 최고와 만나지 않습니까. 독문학의 종착이 된 거지요. 철학에서 니체나 헤겔을 빼놓을 수 없듯, 괴테를 중심으로 한 독일 문학은 세계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요. 괴테는 문인이기도 했지만 독일 바이마르 공국 재상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고, 식물학·광학까지 깊이 연구한 과학자였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불태워 쏟는 사람들의 경우 특유의 편향성이나 괴짜 성향이 나올 수도 있는데, 괴테는 특이하게도 매우 원만하면서 포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새벽 5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구술을 통해 글을 쓰고 오후에는 사람들을 불러 정치를 하고 저녁에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렇게 밀도 있게 살았으니 그렇게 업적이 쌓일 수밖에 없었지요. 정말 큰 인물이었지요.”

    그는 “괴테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모든 것을 쏟는 집중력이었다”고 했다.

    “괴테는 부모로부터 좋은 재능을 받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지요. 아버지로부터는 준수한 외모와 인생을 견실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어머니로부터는 명랑한 본성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저는 괴테의 삶을 보면서 이 사람의 위기 극복 능력이 참으로 독보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대표적인데요,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랑을 한 거잖아요. 괴테는 4주일간 미친 듯 작품을 쓰고 주인공을 죽이고는 자기 스스로는 그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는 쓰는 행위를 통해 삶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뭔지를 파악했어요. 사실 문제가 뭔지 알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괴테처럼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작가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

    [허문명 기자]

    [허문명 기자]

    전 교수는 여백서원을 확장해 가까운 시일 안에 여주에 ‘괴테 마을’을 조성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독일 바이마르 마을처럼 작은 도시가 세계적으로 발돋움한 모델을 ‘괴테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재현하고 싶다는 거다. 그는 “단순히 괴테 관련 자료를 모으는 박물관이 아니라 괴테가 살았던, 추구했던 삶을 생각하고 성찰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 교수는 마지막으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죽은 괴테를 한국의 여주 땅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생생한 동력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었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지더라고요. 그리고 제 경험상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집니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합니다. 내가 거쳐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요헨 골츠 회장님이 괴테의 이런 말을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전했어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라고요. 시간 하면 쫓긴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정말 엄청난 정의를 내린 거죠. 순간순간 이 찰나야말로 진정한 나의 소유죠. 그러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합니까. 젊은이들이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든 시간이라는 이 엄청난 재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답니다.”


    #플라톤아카데미 #전영애 #괴테 #여백서원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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