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업이 어린이집까지 하나
탁아소 지으면 무주택자가 집 갖는다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렵다
장학금 주면서 조건 달지 마라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Gettyimage, 삼성]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있다가 다시 비서실로 불려간 한용외 이사장은 신경영 선언 직후 비서실 전면 개편 조치에 따라 1993년 11월 삼성SDS 관리본부장(상무)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한 달도 못 돼 갑작스러운 인사 통보를 받는다.
“이학수 비서실 차장이 전화를 하셔서 ‘한 상무, 문화재단으로 가야겠다’ 하는 거예요.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데다 재단 일이라는 것이 메인 부서라기보다 지원 업무 성격이 강하잖아요. 황당했죠. 이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이차장이 ‘회장님이 전무 승진시켜 보내라 하신다’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는 데 시키는 대로 해야죠.
나중에 저를 왜 재단으로 보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짚이는 대목이 있긴 했습니다. 1992년에 삼성미술문화재단을 감사해 회장님께 보고를 드린 적이 있어요. 회장께서 ‘문화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내부를) 잘 봤노?’ 하시는 거예요.
재단에 대해 여러 우려되는 부분, 문제점들을 짚었는데 회장님 생각과 비슷하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때 저를 염두에 두셨는지 나중에 비서실 인력을 다 바꾸는 과정에서 ‘한용외 어디 갔노’ 찾으시더니 상무 2년차밖에 안 된 저를 전무로 승진시켜 재단 운영을 맡기신 거죠.”
가난을 구제한다
한 이사장이 첫 사업으로 지시받은 게 바로 탁아소, 즉 어린이집 사업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사업은 이 회장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숙원 사업이었다. 그것도 신경영 선언을 하자마자 실천에 옮긴 것이라는 점이 특이하다.생전 이 회장의 육성을 따라가 보면 어린이집 사업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첫 번째 논리가 ‘가난을 구제한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주택 문제가 심각하다. 서울 달동네는 더 그렇다. 달동네가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나라 부(富)가 아무리 많아져도 분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달동네 남자들은 (막노동이 대부분이라) 한 달이면 반을 공친다. 여자들은 아기가 있으니 일을 제대로 못 한다. 열심히 벌어야 한 달에 40만~60만 원이다.
이런 달동네에 탁아소를 지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엄마들이 아기를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우리 건설회사와 연계해서 장기로 취업 계약을 해주는 방안을 연구해 봐라. 석 달 정도 일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터득할 것이다. 이렇게 부부가 둘이서 일하면 한 달에 150만 원은 벌 수 있지 않겠나, 1년 반 동안 한 달에 100만 원씩 저축해도 1800만 원이다.
삼성이 탁아소를 지어 아이를 5년만 맡겨놓고 일하면 달동네를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옆에서 보면 주변 다른 사람들도 희망이 생길 것 아닌가. 이걸 우리가 보여주자는 거다.”
이 회장은 “여성 인력을 활용해야 선진국이 된다”는 말도 많이 했는데 어린이집 사업은 이를 위한 중심 사업이기도 했다.
다시 한 이사장 말이다.
“회장님이 저를 직접 불러서 말씀하셨어요. ‘선진국 지표 중 하나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다. 우리나라를 조사해 보니 너무 떨어져 있다. 한국의 주부들이 도저히 일을 못 하는 상황이 된 데는 아이 문제가 크다, 외국에서는 아이를 어딘가에 맡기고 일을 나가지만 우리는 맡길 데가 없다.’
이걸 삼성에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장기적으로는 아이들의 미래까지 달려 있다고 하셨어요.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고 교재도 잘 만들어서 보급하면 아이들이 컸을 때 삼성맨과 삼성 가족이 될 수 있고 고객도 된다는 거죠. ‘이런 다각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업 중의 진짜 사업이다, 10~20년 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말도 하셨어요.”
한 이사장은 “우선 전국에 어린이집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를 뽑아봤다”며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1년 당시 국립, 공립, 사립 다 포함해서 1919개더군요. 삼성복지재단에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서울시 등 지자체에 기증하고 운영을 삼성에서 하는 것으로 진행하면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에 55개까지 늘었죠.
회장님은 무슨 일을 할 때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먼저 보고 그걸 위한 상품 개발, 핵심 사업 프로그램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했습니다.
어린이집 사업도 ‘외국에 가보면 여성들의 활약이 많은데 한국은 왜 안 될까,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가부장제 영향도 있겠지만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제일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질문 속에서 해결책을 어린이집으로 잡았고 이걸 잘 운영하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 바로 교사를 우대해 줘야 한다, 이런 결론을 내게 되는 거죠.
사실 어린이집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교사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는 교사 봉급을 많이 줬어요. 교재나 장난감 등 교구와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공급했지요. 이러다 보니 입소문이 나서 엄마들이 삼성어린이집 보내려고 500명, 1000명씩 기다렸어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등록하는 엄마들도 많았어요. 3, 4년씩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죠.”
우리가 선두에 서면 다 쫓아온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추진 훨씬 이전부터 어린이집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어린이집을 세워서 엄마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키면 맞벌이 가정이 늘어 소득이 늘 것이고 아이들도 전문교사에게 맡기면 교육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 사업을 하는 것에 내외에서 반발이 많았다. 사진은 1990년 7월 서울시립 꿈나무어린이집 개원식 참석 모습. 오른쪽은 고건 당시 서울시장. [동아DB]
비서실 인사팀장을 지낸 노인식 전 사장 말이다.
“당시만 해도 기업이 어린이집을 운영한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이해관계도 따져야 하는 복잡한 문제였죠. 막상 사업을 하려다 그런 문제에 부딪혀 계획을 취소한 지역도 있었습니다. 삼성어린이집 수준이 매우 높다 보니 비교도 되고…. 외부 반발도 많았습니다.
내부에서도 반대의견이 많았어요. 저도 반대의견을 냈다가 혼났습니다(웃음). 회장님은 ‘이게 한두 해 할 사업이 아니고 진짜 미래의 우리 애들을 위해 하는 거다, 맞벌이도 자꾸 늘어날 것이고 보육시설 지원 정책도 부족하니 우리가 선두에 서면 다 쫓아올 것’이라고 하셨죠.”
삼성생명 사장을 지내며 보험 외길 인생을 살아온 황학수 전 사장도 어린이집 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한다(신경영실천위원회 책자). 그의 말이다.
“1993년 1월 15일로 기억된다. 금융계열사 대표이사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회장님이 탁아소를 확대 설치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생명보험은 많은 계약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이며, 따라서 그 이윤은 사회 환원 차원에서 탁아소를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이 탁아소를 많이 지어 어린이들을 잘 길러내면 나중에 황 사장이 국회의원 나가도 표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농담까지 하셨다.
달동네에 탁아소를 만들면 가난을 구제하고 국가에 기여할 것이라는 회장 말씀은 당시로서는 다소 황당한 얘기로 들렸다. 기업이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내심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어떻게 됐는가. 먼 내일의 세상을 내다보면 탁아 사업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사회복지사업이라는 혜안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궁석 전 삼성SDS 사장도 회장이 얼마나 탁아소 사업에 꽂혀 있는지 전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94년 3월에 내한한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미팅을 갖는 자리에 배석한 뒤 그룹 정보 인프라에 대해 보고할 기회가 있었다. 컴퓨터 사용의 올드 패러다임(Old Paradigm)과 뉴 패러다임(New Paradigm), 그룹 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표준화 문제, 정보화 교육의 중요성 등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면서 우선 IBM과 헤어져야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지금 세계는 호스트(Host) 중심의 컴퓨터 사용에서 급속도로 오픈(Open) 시스템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IBM은 그 속도가 늦다는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IBM과의 합작 관계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요지의 보고를 했다.
그러자 회장은 ‘헤어져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하루빨리 헤어져야 한다’면서 ‘다만 절대로 IBM을 섭섭하게 해서 보내진 말라’고 했다. (중략) 한번은 도노반 미국 MIT 교수와 미팅이 있은 후 회장이 도노반 교수가 어떠냐는 질문을 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워 우물쭈물하자 ‘답답하긴, 한마디로 그룹에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에요?’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개념을 배우는 데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도노반 교수의 이야기를 저희들이 실행하려면 1년은 걸려야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라고 나름의 소신을 피력했다. 그러자 회장은 ‘1년이요? 10년은 걸릴 겁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일 이야기를 한참 하던 회장은 갑자기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고, SDS에 여사원이 많지요, 탁아소 짓도록 하세요.’ 내가 우물쭈물하자 결론이 떨어졌다. ‘왜 답이 없어요, 돈 때문에? 그래도 지어야 해.’”
어린이집 사업은 이후 정부와 보육업계에서 ‘삼성이 보육까지 점령하려 한다’는 비난 여론 때문에 더는 확대하지 못했다. 한용외 이사장 말이다.
“나중에는 현상 유지 쪽으로 방향을 바꿨지요. 하지만 저희가 뿌린 씨앗이 기여한 대목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에 조사해 보니 전국 어린이집이 3만8000개로 늘어나 있더군요. 15년 사이에 20배 가까이 늘어난 건 삼성어린이집이 자극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의 10%는 남 돕는 데 써야 한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렵다”고 말한 이건희 회장은 일찍이 삼성의료원을 통해 의료복지를 실천하고 싶어했다. 직접 의사들을 향해 강연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삼성의료원 의사를 상대로 한 강연 모습. [동아DB]
“각 사가 내 생일에 기념 선물 가져오는데 그거 가져오지 말고 그 날짜 맞춰서 주변 양로원, 탁아소 도와주세요. 날짜를 정하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좋잖아. 요즘 교수에 경제학 박사라는 사람들이 기업이 이익을 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건 망조야 망조, 나라 망할 소리예요.
기업이 이익을 안 내면 어떻게 하나. 이익을 최대로 내고 종업원, 투자자 주주들에게 최대 이익을 주고 인류에 공헌하고 그리고 남은 돈은 재분배해야 합니다. 문화사업도 하고 가난한 사람, 달동네 도와주고 사회 소외계층 돕는 데 이익의 10%는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일반 서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 뭔지 계속 연구해야 해요. 경실련 같은 시민단체에 자문도 구하고 말이에요. 삼성이 벌어들인 이익을 우리가 좀 더 가져간다고 이 나라가 나아지나요.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베풀어야 되는 겁니다.”
한 이사장은 복지재단에서 다시 삼성전자 사장으로 갔다가 2004년 재단 총괄로 자리를 옮긴다. 다음은 그 시절에 회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돈은 벌기보다 쓰는 게 어렵다는 겁니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자네들이 경영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라. 나는 쓰는 것만 연구하겠다’ 하셨어요. 회장님은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셨고,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받는 사람이 정말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써야 하고 쓰더라도 삼성 이미지에 어떻게든 도움이 돼야 한다는 거죠.
저는 돈은 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회장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특히 제가 맡은 일이 계열사가 번 돈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이어서 회장님 말씀은 늘 제 업에 대한 화두이기도 했죠. 돈 쓰는 분야에서 회장님이 가장 강조한 것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앞서 얘기한 어린이집 사업이었죠.”
한 이사장은 이건희 회장이 말로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취임하기 십수년 전부터 생일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홍 여사와 때로는 자녀분들을 데리고 경기도 의왕시 나환자 마을인 ‘성나자로 마을’을 방문해 환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앞서 달동네 이야기를 했는데 재벌 회장님이 어떻게 달동네 사정을 알 수 있느냐 하지만 실제로 틈만 나면 방문해서 어려운 이웃들 사는 모습을 직접 보셨어요.
이 대목에서 짚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회장님이 신경영 추진과 더불어 사회봉사단을 만듭니다. 이건 단순한 사회 공헌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것을 임직원들과 나누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활동을 통해 베푸는 삶이 귀하다는 걸 직접 체험한 임직원이 많습니다.”
옥정도 씨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삼성사회봉사단 이사를 지낸 그는 1996년에 미국 전역의 자원봉사 매니저급 코디네이터와 의국 자원봉사단체 간부급 2000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였던 샌프란시스코 ‘전미 자원봉사대회’에 참가한 경험을 통해 나누는 삶이 얼마나 보람을 주는지를 경험했다면서 이런 회고를 한다(신경영실천위 책자).
“사회자는 삼성이 단일 단체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면서 만장의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초대형 스크린 2개에 삼성을 소개하는 비디오 영상이 상영되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상영이 끝나도 계속되던 커다란 박수갈채는 우리 19명 모두의 눈시울을 감격과 흥분의 눈물로 흠뻑 젖게 했다. 입사 십수년 만에 이 같은 감격스러운 장면은 처음이라며 모두들 말을 잇지 못했다.
자원봉사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성화해야겠다는 각오가 힘과 용기를 솟아나게 했다. 개회식이 끝난 후 많은 단체 대표가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주고 자료를 요청했다. 복도에서, 각 전시 코너에서 그들은 우리를 가족처럼 친밀하게 대해 줬다.”
그러면서 옥 이사는 세계와의 이런 교류가 글로벌 기업의 본질적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계기였다고도 했다.
“나는 당시 행사에서 자원봉사야말로 인류의 보편적 공동체 삶의 원칙임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으며, 아울러 세계와 교류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알게 됐다. 또한 세계시민과 세계국가를 상대로 무역을 하는 기업이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연결고리를 갖는지도 느꼈다.
기업은 왜 이익을 내야만 하는가? 이익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상품에 담긴 가치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든 활동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향해 있으며, 자연도 인간과 공존하거나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다! 자원봉사 정신은 바로 휴머니즘이다.”
삼성의료원 개원에 앞서 미리 현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이건희 회장. [동아DB]
삼성의료원 개원에 앞서 미리 현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는 이건희 회장. [동아DB]
기술 중시와 인간 존중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은 “이 회장이 취임 후 제2창업을 선언하며 호암 창업회장의 경영 방침과 가장 다른 키워드를 넣은 것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사람과 기술’입니다. 기술 중시라는 말과 함께 인간 존중을 넣은 거죠. 호암 회장님은 사람을 인재제일이라고 표현했고 이회장님은 인간 자체를 리스펙트(Respect)하자는 거였죠.”
배 전 사장이 말하는 ‘리스펙트’라는 부분에 대해 일찍이 이 회장의 인간 존중 마인드를 체험했다는 증언이 있어 소개한다. 안기훈 전 삼성코닝 사장이 신경영실천위 책자에 쓴 글이다.(당시 이건희 회장은 그룹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안 전 사장은 글을 쓸 당시 직함인 회장을 그대로 쓰고 있어 그대로 살린다)
“1975년경 내가 삼성전자 경리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회장이 사무실에 들렀다가 협력업체 사장들이 다 떨어진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어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는 그것이 일종의 관행이었고, 어음도 90일을 넘기는 게 당연했다.
그 장면을 줄곧 지켜본 회장은 ‘협력업체 사장은 신제품 개발이나 품질을 높이는 데 시간을 쏟는 것이 본업이고, 막중한 책임도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어음 한 장 받으려고 2~3시간씩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경리과장은 앉아서 도장 찍는 일만 할 수 있는가? 이래서야 부품의 질이 좋아지겠으며, 그런 부품을 갖고 우리 제품이 제대로 되겠는가. 협력업체 사장에게 인격적 물적 대우를 해주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부품이 나올 수 없다. 빨리 대금 지불 방법을 바꾸고 그 사람들이 앉는 소파부터 바꾸라’며 크게 나무랐다.
구매 담당 사원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1970년대 후반부터 자주 강조했다. 당시에 구매 쪽에는 ‘우리 돈 주고 우리가 사는데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고, ‘싸고, 좋고, 빨리’ 중에서 ‘좋고’ 개념은 부족하고 그저 납기에 맞춰 현장에서 모자라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주로 신입사원들이 이런 일을 해 40~60세의 협력업체 사장들과는 인생경험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아니 이 사장, 납기도 못 맞추면서 가격은 왜 이리 높아?’ ‘이렇게 하면 다음엔 끊어버리겠어’ 등 젊은 직원들이 나이가 지긋한 협력업체 사장들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회장은 이런 모습을 보더니 ‘협력업체 사장들이 얼마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겠는가? 당신들이라면 이런 모욕을 받고도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20년 30년씩 일군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그간 쌓인 많은 기술과 노하우가 어떻게 전수될 수 있겠는가? 기술이 단절되면 더는 품질이 좋아질 수 없다. 부품의 질이 좋지 않은데, 완제품 품질이 온전하겠는가? 이것이 우리와 일본의 근본적인 경쟁력 차이’라며 크게 질책하셨다.
신경영 교육을 할 때 회장은 ‘일본에서는 JIT(Just In Time·필요 부품을 생산 시점에 딱 맞춰 생산해 재고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적시 생산’으로 번역한다)가 가능하고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은, 방법과 기술은 알지만 협력업체가 신이 나서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대기업 사장은 월급쟁이니까 명예를 먹고 살지만 협력업체 사장은 오너이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돈을 잘 벌어야 신바람이 나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구매는 부품의 품질, 그 자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완제품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원천이 되는 힘이다. 따라서 구매의 예술화란 JIT나 원가 관리 같은 기술만이 아니라 협력업체에 대한 인간 존중까지 포함한 종합관리 예술인 것이다.”
한편 안 전 사장은 감사를 받다가 회장한테 혼난 적이 있는데 이때 회장은 단지 회사의 부실 경영을 짚은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 차원에서 짚어 놀란 적이 있다며 이렇게 회고한다.
“개인적으로 회장에게 굉장히 야단을 들은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삼성전자는 매우 큰 고비를 겪었다. 이때 비서실에서 실시한 경영 감사 결과, 그동안 양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회사 내에 상당한 관리 부실과 부정이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감사 결과를 본 회장은 나를 불러서는 ‘당신은 두 번 파면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나는 삼성그룹의 주주다. 삼성전자가 이익을 많이 내서 배당이 많아지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관리 부실로 인한 손해는 고속 성장기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하겠지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데려다가 교육도 안 시키고 부정한 마음을 갖도록 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돈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원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원들의 복리 후생 욕구를 충족시키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후에 이익을 내야 올바른 경영자다. 그렇지 않으면 경영자, 관리자로서 자격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을 관리 부실로 한 번 파면시키고, 남의 집 귀한 자식들 데려다 부정한 마음을 갖게 하고 좋은 일꾼으로 키우지 못한 잘못을 물어 한 번 더 파면시키고 싶다. 그렇게 두 번을 파면시켜도 내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다’며 질책을 거듭하셨다.
참으로 뼈아픈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기업에는 질 좋은 제품을 적기에 싸게 공급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기본적인 역할 외에도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즉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른 인재를 육성하고, 종업원의 만족도도 높이면서 이익을 내는 것이 기업 활동의 본질이자 사회적 책임임을 깊이 명심하게 된 것이다.”
장학금에 조건 안 걸어도 우리가 잘하면 온다
이와 관련해 한용외 이사장은 회장이 내부 인재 양성뿐 아니라 자라나는 미래 세대의 인재 양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호암 창업회장님도 늘 인재 양성, 인재제일을 강조했는데 선대 회장님이 더 집요했던 것 같아요. 호암 회장님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선대 회장님은 사람을 잘 기르고 키워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까지 내다보았다고 할까요. 전체 개념에서 보면 호암은 ‘사람이 중요하니까 좋은 사람 골라 써라’는 개념이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사람이 중요하니 키워서 써라. 머리 좋은 사람 골라서 유학 보내주고 공부를 시켜서 인재를 만들어줘라’ 이렇게 확장된 거죠.”
이런 차원에서 장학금을 줄 때에도 조건을 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성장학재단이 1년에 1인당 5만 달러씩 지원을 해줬는데 요즘 환율로 따지면 6500만 원이 넘는다는 얘기잖아요. 어느 기업이 공부만 하는 데 그렇게 지원해 주겠어요. 더구나 1990년대 초에는 파격적인 액수였어요.
회장님은 학생들에게 ‘공부 끝내고 한국에 꼭 들어와야 한다거나 삼성에서 일해야 한다거나 하는 조건을 걸지 말라’고 하셨어요. 삼성이 아닌 다른 기업에 가거나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일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전공도 무엇이나 상관없다면서 말이지요.
회장께서 장학금에 조건을 달지 말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하면 인재는 저절로 오게 돼 있다’는 자신감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 연구기관이든 GE나 애플 같은 기업보다 삼성이 더 미래가 보이고 대우가 좋으면 자연스럽게 삼성으로 올 것 아니냐는 생각이셨죠.”
한편 노인식 전 사장에 따르면 이 회장은 국내 대학생뿐 아니라 외국 학생들까지 장학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신경영이 본격적으로 시행돼 국제화가 화두로 되면서 제3국 대학생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장학금을 주는 제도도 운영하라고 하셨어요. ‘중국·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등 이런 나라들이 앞으로 큰 나라가 될 수 있는 신흥 제3세계 국가들이니 이 나라 똑똑한 학생들을 우리나라 우군으로 만들어야 된다, 톱 10 정도 들어가는 대학을 찾아 우수 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아무 조건 없이 줘라, 그러면서 이공계 인문계 비율을 7대 3 내지 6대 4 비율로 하라’는 구체적 지시까지 하셨죠.
또 ‘앞으로 그 나라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알리는 우호 세력이 되면 얼마나 좋겠나. 학생들이 한국을 좋아하고 삼성에 취업을 희망한다면 다 받아줘라’ 이런 말도 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학생들도 장학금 못 받는 사람이 많다고 했더니 ‘국내는 누구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제3세계 국가에는 정말 똑똑한 학생들이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죠.”
노 전 팀장은 “하지만 도와주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나라별로 온도차가 있었어요. 특히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감히 우리 인재들을 매수하려 하느냐’는 반발이 생겨 못 했어요. 반면 베트남·인도·태국·인도네시아 이런 데는 몇십 명씩 했어요.
대상자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어느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이 톱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우리나라처럼 수능이나 고시 보는 것도 아니고(웃음). 결국 학교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는데 성적뿐 아니라 가정 형편도 봐야 하고 말이죠. 처음엔 한 수십 명 시작했다가 차츰차츰 늘려가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IMF가 터지는 바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해외 인재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의 우수한 해외 교포 학생들에 대한 리스트업이 됐던 것이 큰 소득이었다고 했다.
“해외 학생들 장학금 주려고 알아보다 보니 중국·인도 학생들이 해마다 몇만 명씩 미국 유학을 가더라고요. 이런 아이들이 유능한 엔지니어가 된 거죠. 그런데 우리도 유학생이 많았어요. 중국이나 인도는 정부에서 인재를 체계적으로 키우는데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때나 했지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해마다 100명씩 최고 톱 대학 박사과정에 보내는 장학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계속 하고 있을 거예요. 벌써 20여 년 됐으니까 해마다 100명씩 보냈으니 최소한 수혜자가 2000명은 됐을 거예요.
주로 미국 유학생이 70% 되고 다음이 영국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일본 도쿄대입니다. 이 중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사람은 소수예요. 인문계 빼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인문계도 30%가량 뽑았어요.
그때 보니 정말 우리나라 학생 중에 우수한 사람이 많더군요. 모든 과목에서 다 만점을 받은 천재급이 많더라고요. 그중에는 부모가 여력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공무원이나 교수, 교사 자녀로 형편이 빠듯한 경우도 많았어요. 2001년도 5만 달러면 작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는 야심만만하게 출발한 베세토 프로그램도 있었다고 했다.
“회장님께서 앞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중요하니 우리나라 대학생들을 베이징(베) 서울(세) 도쿄(토) 현지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해서 200명을 한꺼번에 태우는 크루즈선도 샀어요. 1년에 두 번,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를 서울 도쿄 베이징에 가는 프로그램이었죠. 학생들이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최고 지식인들을 모시고 선상 토론도 하고요. 이것도 IMF 때문에 딱 두 번하고 말았어요. 나중엔 크루즈선까지 손해 보고 팔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