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주지하듯이 공동체적 가치와 위계적 질서를 중시하는 문화가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는 문화가치적 전통이 크게 다른 미국식 세계화 노력은 우리 나라에서는 하나의 제도로 뿌리를 박기 어려울 것이다. 우려곡절을 겪다가 결국은 실패하든지 아니면 한국식 변형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국식 제도가 모두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배우고 모방해야 할 제도도 실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미국의 제도나 기준이 글로벌 기준(Global standards)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무비판적으로 도입되고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단히 곤란하다.
따라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 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은 우리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정신을 차리고 세계화를 해야 한다. 근대화가 서구화가 아니듯이 세계화가 미국화는 아니다. 그동안 IMF에서 빌린 돈을 갚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이제는 차분하게 미국식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 맞는 자주적 세계화의 모델을 모색할 때가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세계화, 즉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정보화라는 공동여건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경제 시스템들이 상호경쟁하게 될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맞는 자주적 세계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민족 생존전략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자주적 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첫째, 대외적으로는 세계금융질서의 개혁이고 둘째, 대내적으로는 신국가혁신체제(新國家革新體制)의 구축이다. 셋째는 공동체윤리와 연대의 복구이고 넷째는 국가를 경영할 국가개혁세력의 형성이고, 다섯째는 국가개혁과 혁신전략을 수립할 독립된 두뇌집단의 조직이다.
첫째, 세계금융자본질서의 개혁이 시급하다.
지난 호에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세계화 5대 파도 중 가장 거센 분야가 바로 세계금융자본시장인데 이 시장의 주도권은 현재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진행중인 세계금융자본시장의 대형 투기장화, 카지노화를 이대로 방치하고는 세계자본주의에 미래는 없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우리 나라와 같은 개발중진국, 작은 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를 가진 나라의 자주적 세계화의 길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주적 세계화, 아시아형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세계금융자본질서의 모색이 시급하다 하겠다.
주지하듯이 세계금융자본시장의 거래규모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거대해지고 있다. 1992년에도 이미 1일 거래량이 8200억 달러나 되던 거래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져 99년 말 현재 1일 거래량이 2조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금융자본시장의 거래는 대부분이 무역이나 직접투자라는 실물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거래가 아니다. 실물을 위한 거래가 아니라 자본 자체를 거래대상으로 삼는, 즉 외국환거래 주식투자 채권시장거래 등등이 대부분이다. 99년 현재 무역이나 직접투자라는 실물거래를 수반하는 거래량과 자본 자체를 거래대상으로 하는 거래량의 비율이 약 1 대 50이 된다. 대부분이 한마디로 돈장사다.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총거래 중에 소위 단기 투기성 거래는 얼마나 될까? 위에서 본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1일 거래량 2조 달러 가운데 약 40%가 2일 안에 거래된다. 그리고 약 80%가 7일 안에 거래된다. 따라서 7일 안에 거래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단기 투기성 거래라고 본다면 총거래의 약 80%가 단기 투기성 자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계금융자본시장의 거래량이 급속히 거대해지고 단기투기화하면서 세계금융자본시장의 불안정성 내지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본래 금융시장은 구조적으로도 대단히 불완전한 시장이다. 소위 정보의 불완전성(imperfect information)도 크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도 일어나기 쉬우며, 더구나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일시적 집단심리(herd psychology)가 자금 흐름에 주는 영향도 대단히 큰 시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조적으로 취약한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의 투기적 자본이 초를 다투면서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개방경제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처지라 하겠다. 아무리 금융개혁을 잘 하고 아무리 거시경제지표가 튼튼하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나라도 어느 산업도 세계금융시장의 단기투기자본의 공격대상이 되면 살아 남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 좀 과장하여 이야기하면 점점 통제가 불가능한 세계금융혁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소수가 세계자본 흐름 주도
그런데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변화에 더하여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주요정보가 소수의 미국회사에게서 독점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이다. 소위 무디스사 등의 국제신용평가기관이 그들이다. 개별국가나 개별기업의 신용도, 투자적격여부 등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이들 기관의 조사결과가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인지 그리고 비정치적인 것인지 아무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이들의 발표가 세계자본의 흐름에 주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더욱 심각한 또 하나의 문제는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주요의사결정이 점점 소수 자연인들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비중이 아주 커지면서 미국의 재무장관이나 연방은행 총재가 세계자본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동시에 월스트리트에 집중해 있는 세계의 주요 투자은행과 증권기관들이 M·A를 통하여 초거대화하면서 이들 기관의 CEO, 자금담당이사 등 소수 자연인들에게 세계금융자원배분의 주요 결정권한이 급속히 집중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의 바그와티(Bhagwati) 교수는 1998년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실린 그의 논문에서 앞으로 세계는 미 재무부-월 스트리트의 이해복합체(Wall Street-Treasury Complex)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미국은 앞으로 군산복합체제(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경계해야 한다고 한 경고와 유사한 이야기다.
환언하면 미 재무성의 고위관리와 월 스트리트의 지배자들이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계획적으로(혹은 음모적으로) 세계금융자본시장을 특정 방향으로, 즉 월 스트리트에 유리한 방향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한 것이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음모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 즉 현재 세계금융시장에는 미국의 가장 우수한 경영대학원 법과대학원을 나온 영재들이 몰리고 있다, 이들이 최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금융상품 새로운 금융기법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개발하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미국의 재무성 관료들도 따라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의 새로운 기술혁신·금융혁명을 미행정부가 제대로 감시하고 규제하기에 점점 역부족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미정부는 재무성 고위관료나 연방은행책임자들로 대개 월스트리트에서 수십년간 금융경험을 쌓은 성공한 경력자들을 데려다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 퇴임한 재무성의 루빈 장관이나 현재 연방은행 총재인 그린스펀도 모두 월스트리트 출신이다. 심지어 세계은행의 총재도 월스트리트 출신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경향이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의 세계경제정책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세계경제의 발전을 월 스트리트의 발전, 즉 미 금융가의 발전에 연계시키는 사고다. 더 나아가 월 스트리트의 안정과 발전을 세계경제의 안정과 발전을 재는 잣대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필자는 바그와티 교수도 이러한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미 세계적으로는 단기투기자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미국 주도의 IMF 등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새로운 세계금융질서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백 번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만이 이 문제해결에 대하여 소극적이다. 그들이 왜 소극적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 나라가 왜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연대하고 미국의 양심적인 지성인들과 연대하여 미국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사실 미국의 저명한 대학교수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단기자금에 대한 규제와 신금융질서기구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다. 양식 있는 정치인들까지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우리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IMF의 개혁만이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아시아통화기금(AMF)이라는 제도적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미국이 이를 반대한다고 하여 우리 정부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비록 일본이 먼저 주장했다 해도 그 기본방향이 옳으면 이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에 의견차이가 있다면 서로 논의하면서 개선하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금융질서의 개혁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다. 단기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IMF 개혁 등 산적한 문제의 해결에 우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세계에 우리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민관(民官)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없이는 세계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도 약소국의 자주적 세계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운 국가혁신체제(國家革新體制)를 구축해야 한다.
최첨단 신기술 분야에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선진국의 새로운 정보통신혁명과 유전자혁명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과학이나 기술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선진국들의 기술패권주의는 더욱 강화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이미 IMF 위기를 맞기 이전부터 우리의 기술수준(중화학 공업 등)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예컨대 가까이 있는 일본의 선진기술장벽은 넘을 수가 없고 동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저임금 추격도 이겨내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국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푸는 확실한 방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산업정책을 포기한 것을 잘못이다. 올바른 산업정책의 부재가 몇몇 산업분야에 공급과잉문제를 일으켜 금융위기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 하여도 여전히 국가는 중요하다. 시장만능주의는 잘못이다. 정부가 나서서 민관합작(民官合作)의 신산업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만 그 집행방식이 과거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시대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더 시장친화적(市場親和的)이고 시장조화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실패를 줄일 수 있는 공무원에 대한 올바른 보상제도·교육제도·감사제도의 개혁, 즉 관료개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되 민관학(民官學) 합동의 신산업정책, 신과학기술정책, 신기업정책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 올바른 교육정책과 노동정책이 결합해야 한다. 종합적이고 새로운 국가혁신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 새로운 미래 비전과 청사진을 전제로 민관학이 함께 노력하여 3자간의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진국의 기술·정보패권주의를 극복하고 그들과 우리 간 정보와 지식의 격차를 축소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시급한 일 하나는 교육부와 노동부 그리고 과기처의 통합이다. 이를 하나로 묶어 미래부(未來部)로 명명하고 신국가혁신체제 구축을 주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국가혁신체제의 구축은 결국 개별기업이 단기이익 추구에 급급하지 않고 성장력의 극대화를 위한 슘페터적 혁신(Schumpeterian innovation)의 주체가 돼야 성공할 수 있다. 끊임없는 기업혁신을 통하여 ‘투자가 투자를 부르는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학계와 더불어 산업정책적 지원, 산업기술개발 인프라, 교육과 훈련 인프라, 그리고 노사관계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우선 대학과 정부출연 연구소 그리고 기업연구소들이 더욱 긴밀히 연결해 무엇보다 이들이 새로운 세계수준의 정보와 기술의 공급원, 그리고 신지식의 끊임없는 생산지가 돼야 한다. 중고등학교가 수동식 암기와 입시의 지옥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개발할 수 있는 창조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학교 가정 직장이 첨단 정보통신기술로 긴밀히 연결된 거대한 평생학습장이 돼야 한다.
직장도 이제는 더 이상 노사대립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사대립은 20세기적 산업주의시대의 현상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의 직장은 노사가 상호신뢰하고 협력 하여 신기술 신지식을 공동학습하고 공동개발하는 장이 돼야 한다. 노사가 함께 슘페터적 혁신에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경쟁 속에서 지식노동자도 살고 기업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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