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들은 정의를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절제되지 못했다. 정의는 공동체의 필수 가치임에 틀림없으나, 독선이나 아집으로 함몰되기 쉬운 감성적 가치이기도 하다. 진보주의자들은 친일(親日)세력이 광복 후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군사독재 시절 용공조작이나, 노동자·농민의 피폐한 삶에도 울분을 누르지 못한다. 결국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한 역사’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런 시각은 공정하지 못하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여야(與野)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전직 대통령들이 처벌됐고, 대통령의 아들들이 구속됐다. 또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하던 진보성향의 김대중·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주영이나 이병철처럼 빈손으로 시작해 부(富)를 이루고 재벌이 될 수 있었던 한국의 정치·사회·경제구조는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집권한 진보주의자들의 실책이라면, 과도한 ‘정치적 도덕주의’를 표방하고 ‘정의’를 지나치게 큰 소리로 부르짖음으로써 평화나 화합을 외치는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해온 점이다. 민주사회에서 ‘통합의 정치’를 구현하려면, ‘사악한 것’을 통제하기보다는 ‘정의의 요구’를 자제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권력자보다 더 무모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들은 비판자나 반대자의 도덕성과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아 스스로 무덤을 파고 실패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386 진보주의자들은 정의의 복원을 표방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이나 부동산 정책, 사학법 개정 등 많은 국정사안에 ‘징벌적 어젠더’의 범주로 접근했다. 하지만 개혁사안들에 징벌적 어젠더로 접근하는 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을 수밖에 없다. 개혁의 이름으로 낙인을 찍고 징벌을 내리는데 어떻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49명에 이르는 다나오스의 딸들은 첫날밤에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죄로 깨진 항아리에 영원히 물을 부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지만,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왜 자진해서 그런 벌을 받으려는가.
보수주의자들의 권력 금단현상
성경에 ‘베풀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경구가 있다. 권력을 가졌던 보수주의자들은 한동안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베푸는 데 인색했다. 이처럼 베풀기를 주저하자 통째로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했다. 개혁을 통해 사회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는 진보주의자들의 포효는 기득권의 아성을 깨겠다는 부르짖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은 관직과 부, 명예는 물론 젊은이들의 표심(票心)까지 빼앗긴 상황이 됐다. ‘차떼기’라는 불명예스러운 용어는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그 당에 희망을 건 보수에게도 부도덕한 존재로 낙인찍는 개념으로 작용했다. 보수가 빼앗긴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도 빼앗겼고 ‘통일’이란 말도 빼앗겼다. ‘개혁’ ‘정의’ ‘역사’ 등의 용어도 더는 보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빼앗긴 보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늙음과 쇠약함, 통한과 후회, 눈치 보기 말고 남은 것이 있는가.
모든 걸 빼앗기다시피 한 보수주의자들이 열패감에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안절부절못한 채 초조해하고 또 지나치게 자기방어적인 태도가 역력하다. 권력을 왜 잃었는가에 대한 통렬한 반성보다는 권력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있는 까닭이다.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정교화함으로써 국민을 설득하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 ‘시대에 졌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비겁한 게임을 한 김대중 정부에 졌다’며 회한에 젖어 있다. 권력을 빼앗긴 데 대한 회한이 강하다 보니 ‘큰 바위 얼굴’처럼 이상(理想)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추스를 여유를 잃어버린 채, 미국 비판에 탐닉하고 북한 껴안기에 집착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실수를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인 양 행동해온 것이다. 물론 비판은 해야 하지만,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이 무엇인지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한두 사람 말로 국가가 무너지나
또한 전통적으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다.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진되는 의견과 가치관을 너무나 쉽게 이단시하고 매도했다. 이념적 이단아 추방을 위해서는 고대 아테네에서 유행했던 오스트라시즘(ostracism)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동이불화(同而不和)’만을 주장했을 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펄쩍 뛰었다. 이러한 태도는 6·25전쟁의 참상과 이후 지속된 북한의 도발행위를 체험하고 베트남 패망을 목격한 보수주의자들의 자기방어 메커니즘의 발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준칙을 떠올리게 할 만큼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경직된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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