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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팝송의 시대’ 끝낸 70년대의 기린아 김창완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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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년 겨울, 라디오에서는 전에 듣지 못했던 이상한 스타일의 노래들이 마구 흘러나왔다. ‘아니 벌써’ ‘문 좀 열어 줘’ ‘불꽃놀이’‘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제목부터 요상할 뿐더러 마치 AFKN에서 듣는 팝송처럼 다이내믹하고 파격적인 ‘청각적 경험’을 몰고 온 약관의 3인조 형제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이름처럼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 가요계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당시 서라벌 레코드사 사장은 첫 앨범 뒷면 소개글에 “처음에는 그 노래들이 서구 팝송인 줄 알았다가 우리말로 된 순 국산 록음악이라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썼다. 이는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산울림의 노래는 경천동지의 충격을 부르며 전파를 통해 줄줄이 히트를 쳤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중고생들도 ‘아니 벌써!’를 입에 붙이고 다녔다. MBC 라디오 DJ 김기덕씨는 당시 산울림의 열풍을 다음과 같이 압축해 표현한다.

“우리 가요역사에서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집단으로 가사 주요대목을 목청껏 노래한 경우는 딱 세 차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펄시스터즈의 ‘님아’, 산울림의 ‘아니 벌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다.”

산울림이 등장할 무렵 가요계는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으로 청춘문화의 상징이던 포크와 록의 기가 꺾이고 다시 트로트 음악이 판세를 장악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이 기쁨’ ‘노래 불러요’ ‘내 마음은 황무지’ 등 연쇄적으로 폭발한 삼형제의 록 사운드는, 나른해진 음악계의 틀을 깨면서 가요가 트로트로 획일화되는 것을 막아섰다. 비틀스의 미국 상륙을 일컫는 말인 ‘British Invasion’에 빗대어 흔히 ‘산울림 침공’으로 표현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중음악계는 단숨에 청춘의 에너지와 핏기를 회복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사운드도 생판 달랐고, 노랫말도 기존의 틀과 완전히 별개였으며, 심지어 크레파스로 그린 앨범 표지도 그때까지의 일반적인 제작양식을 거부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획기적’ ‘파격’ ‘혁명’ 같은 어휘들은 산울림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에게 산울림의 음악은 청춘의 통쾌함이든 조용한 위안이든 음악적 상호작용의 핵심이었다. 특히 산울림의 구성원 김창완과 김창훈이 서울대 농대, 드럼을 쳤던 막내 김창익이 고려대 공대 출신이라는 ‘신분조건’은 막 출범한 방송사의 대학가요제와 맞물려 한층 대학생들의 관심과 선망을 자극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산울림은 음악적인 시도와 실험을 거듭하며 계속 진화했다. 초기의 통쾌한 록 사운드를 벗어나 이 무렵에는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독백’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너의 의미’와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때문에 가요 관계자들은 “대중의 폭발적 정서와 포근한 정서를 순차적으로 정복한 대중음악가는 가요사상 산울림밖에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산울림은 국내 록밴드로는 마의 벽이라는 ‘앨범 10장’을 넘긴다. 1997년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수록된 13번째 앨범 ‘무지개’가 공식적인 산울림의 최근 앨범. 이후 김창완이 라디오·TV 출연, CF 등에 집중하면서 음반활동은 잠정적 휴지기를 맞았다. 그런 탓에 요즘 신세대들은 김창완을 산울림 전설의 기린아가 아닌 중견 방송연기자로 인식할 정도다.

화석이 된 공룡?

필자와의 인터뷰 약속시간 또한 라디오 방송을 마친 직후였다. 오랜 방송생활 덕분일까, 인터뷰에 관한 한 그는 어느새 프로였다. “근래에는 술을 줄였다면서요?”라는 필자의 의례적 인사에 “누가 그래요? 어디서 틀린 얘기를 들었나 보네. 지난주에도 매일 술 마셨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는 음반활동을 하지 않는 사정, CF모델로 더 유명해진 데 대한 생각, 산울림 음악의 과거와 현재 등 자신의 전반에 대해 마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듯 나긋나긋하게, 때로는 능란하게 이야기를 펴나갔다.

-요즘 음악활동이 뜸합니다. 지난 2001년 여름 ‘록 글래디에이터’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가진 이후에는 별다른 음악활동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음악은 아예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음악적 욕구는 있어요. 지난 연말에도 재즈 팀과 홍대 근처 카페에서 연주하며 놀았는데요. 시간이 나면 공연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음악인에게 중요한 앨범활동이 6년째 무소식입니다. 방송에 전념하는 것 같고요. 솔직히 외부에서 볼 때는 음악에 별 의욕이 없어 보입니다.

“가수가 음반에 왜 관심이 없겠어요? 이미 신곡도 만들어놓았고 부분적으로 녹음한 것도 있지만 판을 내지 않을 뿐입니다. 살 사람이 없잖아요. 몇 번 내봐서 안 된다는 걸 아는 거죠. 그렇다고 소비자에게 동정을 구하는 ‘읍소형’ 앨범을 낼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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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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