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여자로 변한 곰이 사냥꾼을 잡아 남편을 삼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던가. 이젠 남편이 인간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믿었던 곰은 남편의 동굴 밖 출입을 허용했고 그게 재앙이었다. 곰이 잠든 사이 남편은 강을 건너고 목이 터지게 돌아오라 외치던 곰은 끝내 외면당하자 아이들과 함께 깊은 강물에 몸을 던진다.
공주에 다다라 큰 강줄기를 이루는 금강은 과거 이곳 곰나루에서 급한 물살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배가 뒤집히고 피해가 거듭되자 사람들은 곰의 원혼 탓으로 보고 그를 달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공주의 옛 지명 웅진, 즉 곰나루의 너른 백사장과 푸른 송림 안에는 지금도 그 사당이 있다. 1972년에는 백제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곰의 석상이 발굴돼 사당에 그 복제품을 모셔 놓았다.
곰나루 전설은 백제 역사와 흡사하다. 서울에서 쫓겨와 웅진에 두 번째 도읍을 차렸던 백제는 60년 만에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겨 떠나간다. 정든 이들을 보내며 애틋한 그리움에 공주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곰나루 상류에 자리잡은 공산성에 올라가보면 당시 공주가 느꼈을 애틋함이 한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공산성은 해발 110m에 불과한 야트막한 동산이다. 낮지만 천연의 요새다운 요건을 두루 갖췄다. 금강을 옥띠처럼 두른 데다 그 북으로는 차령산맥, 남으로는 계룡산이 철벽 방어선을 만들어준다. 성의 북쪽 공북루에 오르면 금강이 발 밑 절벽 아래로 출렁인다. 강 건너 백사장은 사람들의 손짓까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탁 트였다. 그 둑 너머 공주 신시가지의 건물과 조형물도 손바닥에 놓인 듯 가깝다.
사방 경계에 이처럼 좋은 입지를 갖춘 만큼 공산성은 역사에 그 이름을 숱하게 남겼다. 통일신라 말기 왕위 쟁탈전이 여기서 비롯됐다. 후삼국 왕건과 견훤의 쟁패과정에선 공산성이 첫 번째 점거목표로 등장했다. 거란의 침입을 당해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렀고 조선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한 곳도 공산성이었다.
창칼로 전쟁을 하던 시절은 그렇다 치고 요즘 공산성은 공주에서 으뜸가는 산책로로 각광 받는다. 소나무와 갈참나무 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사이 오솔길을 거닐며 성의 동서남북 누각은 물론 왕궁지와 정자, 연못 터를 돌다보면 이런 호젓한 성이 왜 그런 험한 전란의 중심에 섰는지 문득 의아해진다.
고개를 들면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성안 마을의 납작한 자태가 정겹게 다가온다. 오솔길엔 머리 희끗한 노부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짱을 끼고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문화유산해설사는 “여긴 주로 중·노년의 데이트 코습니다. 영화를 뒤로하고 사라진 백제 역사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고 뼈 있는 해설을 건넨다.
우리의 해설사는 사실 공산성에 들르기 전 무령왕릉에서도 백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토로했다. 능에서 발굴된 매지권에 “백제왕은 돈 1만 매로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지하의 여러 관리에게 보고하고 이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쓴다”고 써놓은 걸 설명하며 “땅은 토지신에 속한 것으로 무소불위의 왕도 멋대로 쓰지 못한다는 백제인의 정신이 여기 깃들여 있다. 요즘 그런 겸손이 있기나 한가”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