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홍성찬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