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중건해놓고도 “궁내의 대조전이 어둡고 유령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그때 산길이 험준하여 일백리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하여 노숙하였으니 광무제가 부엌에서 옷을 말린 때에도 이런 곤란은 없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비를 맞으면서 끝내 모두 온전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험난한 산천을 지나느라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광해군은 그 후유증으로 1593년 봄과 여름 동안 해주에 머물며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구중궁궐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왕손에겐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런 질병을 ‘노권(勞倦)’으로 규정한다. 노력하고 힘써서 피로한 병이라는 뜻으로, 그 원인과 병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몸의 원기가 줄어들게 된다. 음식물의 기(氣)가 부족해 상초(上焦·심장의 아래, 위장의 윗부분)가 막히고 하초(下焦·위의 아래, 방광 윗부분)가 통하지 못해 속이 더워지면서 가슴속에서 열이 난다. 화가 왕성하면 비토(脾土·지라)를 억누른다. 비(脾)는 팔다리를 주관하기 때문에 노곤하고 열이 나며 힘없이 동작하고 말을 겨우 한다. 움직이면 숨이 차고 저절로 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불안하다. 이런 데는 마땅히 마음을 안정하고 조용히 앉아 기운을 돋운 다음 달고 성질이 찬 약으로 화열을 내리고 신맛으로 흩어진 기를 거둬들이며 성질이 따뜻한 약으로 중초(中焦·위장 부근)의 기를 조절해야 한다.”
임진왜란 후 벌어진 왕위 계승 문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해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더했다. 1608년 선조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북인 정권의 영수이자 대북(大北)파였던 정인홍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라고 건의하는 한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파 영의정 유영경을 공격한다. 선조는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준 후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을 문전박대한다. 심지어 더 이상 왕세자 문안을 운운하지 말고 다시 오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16년 공들여온 왕세자 자리가 무너질 듯한 상실감에, 광해군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광해군은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신, 육체 양면에 걸쳐 극도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즉위 후에도 광해군의 건강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경연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위한 왕의 공부 도량이자 현실 정치의 토론장이었던 경연을 거르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신하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즉위 2년 승정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연 재개를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나의 건강이 회복되면 말을 하겠다. 우선 기다리라’‘근간에 감기가 걸려서 마땅히 조리하고 즉시 할 것’‘내가 비록 병을 참고 견디며 경연을 열고자 하나 만약 이른 아침에 거동하면 더 아플까 염려되니 조금 미뤄서 하자’는 말로 경연을 피해갔다.
오랜 전란과 왕위 계승 암투 속에서 광해군의 몸과 정신은 날로 쇠약해갔지만 그는 스스로 체력 회복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실록은 이런 광해군을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군주로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모범을 보이는 대신, 여색에 집착하고 유교 사회에선 음사(淫事)인 무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출발은 상궁 김개시였다. 실록은 비방(秘方)이란 말로 여색을 탐닉한 광해군을 비난한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로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 춘궁(春宮·동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에게 간택이 되어야 (왕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실록은 환시 이봉정의 입을 빌려 왕의 여성 편력을 까발린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경연을 오랫동안 폐하고 일반 공사의 재결도 태만해서 매양 결재의 날을 넘겼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왕이 항상 침내(寢內)에 있었기 때문에 환시들도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매양 총희(寵姬) 서너 명을 데리고 후원을 노닐었다. 그러다가 꽃나무와 물 바위 등에 이르면 밤낮이 다하도록 지칠 줄 몰랐다.’
광해군은 각종 약재와 섭생으로 몸을 돌보는 대신 무속에 집착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었다.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푸닥거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유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무당이 유학의 성지인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근대 이전의 질병 치료는 병의 원인과 본질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질병을 신의 처벌로 여기면 죄를 회개해야 했고, 귀신이 들어 병이 생겼다고 보면 귀신을 쫓아야 했다. 비문명 세계에선 무속인이 곧 의사였다. 광해군이 오랜 질병으로 힘들어하던 즉위 3년의 기록을 보면 그가 무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