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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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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도시와 나<br>성석제 정미경 외 지음, 바람

소설에 관한, 아니 길에 관한 이런 명제가 있다.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되었다.’ 이 명제는 소설을 매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자극해왔다. 길과 여행은 불가분의 관계다. 문맥으로는 전후관계를 형성하지만, 순서를 뒤바꾼다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길이 끝나자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길이 끝나면 여행도 끝이 난다. 그런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길 떠난 이야기가 소설로 진화하기도 하는데, 이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비로소’의 세계다. 여행과 길을 한 편의 소설로 탈바꿈시키는 ‘비로소’라는 문장 부사는 문장 맨 앞에 놓여서 전(前) 역사를 괄호 속에 묶어버리는 ‘그리고’와 동류다. 길과 여행을 대상으로 일반인과 소설가의 차이, 또는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바로 이 두 부사에 대한 의식과 실현에 있다. 최근 출간된 ‘도시와 나’는 여행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지, 소설가에게 여행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예다.

나는 모두가 거부하는 주소를 들고 세비야 한복판에 서 있었다. (…) 강렬한 햇빛은 거리의 모든 것을 한 꺼풀씩 벗겨냈고, 내가 들고 있던 진녹색 수첩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속의 활자들도 조금씩 낡아가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택시들이 마치 오늘의 마지막 택시인 듯 내 앞을 스쳐갔고, 마침내 나는 하얗게 바랜 거리 위에 홀로 남았다. -윤고은, ‘콜럼버스의 뼈’

현대소설은 기본적으로 여행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한 인물이 현실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길을 떠났다가 이런저런 경험 끝에 의식의 전환을 맞아 돌아오는 이야기. 이때 길은 물리적인 공간 이동과 심리적인 내면 흐름을 뜻한다. 물리적인 공간 이동, 곧 주인공이 길을 떠나면서 진행되는 유형을 여로형 소설이라 한다. 주인공이 왜 떠나는지에 대한 분명한 사건이 제시돼야 하고, 길 끝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는 시공간’, ‘비로소’가 작동하는 지점이 그것이다.

여로형 소설



여로형 소설의 걸작으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꼽는다. 버스든 기차든, 어떤 운송 수단을 이용하든 공간 이동과 함께 과거(회상)와 현재가 뒤섞이며 자연스럽게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 모두 안정적으로 공유하는 유형이다. 여로형 소설은 작가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시도하는 형식이자 작가로 입지를 굳힌 후에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벅찰 때마다 휴식처처럼 돌아가 확인하는 원점이다. 해외의 낯선 여행지를 무대로 한 ‘도시와 나’의 소설 중 여로형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은 콜럼버스의 고향 세비야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난 한 젊은 여성의 열흘을 그리는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다.

남자는 내가 내민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 사진 속 남자는 서른 살 무렵의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무렵의 아버지이자 곧 나와 이별할 때의 아버지 모습이었고, 내가 가진 유일한 그의 사진이었다. 나는 이 사람의 행방 때문에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했다. 그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 내가 찾던 주소,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집은 노래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이국의 언어를, 그러나 아버지에겐 이웃 같았을 노랫말들을 선 굵은 가락 위에서 꼭꼭 씹어 삼켰다. 아버지는 그 밤, 거기에 있었다. 노래 속에 살았다. (…) 노란 식탁보 앞의 조그마한 무대, 그 밤의 따블라오… -윤고은, 위의 작품

여로형 소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소설이라는 종자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르적인 속성을 가진다. 언제 어디서나 고전적인 여로형 소설이 씌어지는가 하면, 이와 병행해 21세기적인 새로운 형식의 노마드 서사가 창조되고 있기도 하다. 노마드 서사란 관광 수준의 낯선 풍광과 인물을 소설화한 기행 소설 또는 여행 소설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상(공간)을 이동하는 노마드적인 인물의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 일시적으로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늘 어딘가로 떠나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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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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