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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돌로레스 클레이본

모차르트와 돌로레스 클레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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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 비상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소녀와 마주친 적이 있다. 헝클어진 머리, 터지고 부어오른 입술, 담배가 걸린 소녀의 손가락이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었다. 소녀는 담배를 감추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적개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을 뿐. 알은척도, 말을 걸지도 말고 당신 갈 길이나 가라는 눈이었다. 아래층 어느 집 안에선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날, 같은 시각, 그 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저 가냘픈 손가락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소나타 K333.

소녀의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온 날부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소리였다. 어느 날은 모차르트가 천상의 멜로디처럼, 어느 날은 여자의 비명이 지옥의 울부짖음처럼. 배음처럼 울리는 그 집 남자의 고함과 욕설과 세간을 때려 부수는 소리에 나는 몸을 움츠리고 앉아 숨을 죽이고는 했다. 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몸서리나는 상상을 하다 파출소에 신고한 적도 있다. 경비원을 직접 이끌고 그 집 현관 벨을 누른 이웃도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이웃한 집들은 돌아가며 한 번쯤 어떤 조처를 취해봤을 거라고 짐작한다. 풍문으로 들은바, 그럴 때마다 남자는 “내 집 일”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기 일쑤이고.

얼마 전, 그 집 앞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었다. 남자가 주먹질을 멈추는 대신 이사를 택한 모양이었다. 이사 온 지 불과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나는 베란다에 선 채 가족이 떠나는 걸 지켜봤다. 맥없이 차에 오르던 소녀의 뒷모습과 다갈색 피아노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귓가를 맴돌았다.

스티븐 킹의 소설 중 ‘여인 삼부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있다. ‘로즈매더’ ‘제럴드의 게임’ ‘돌로레스 클레이본’. 그중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가정폭력의 비극성을 실감나게 그려낸 빼어난 문학작품이다.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리틀톨아일랜드라는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입심 좋은 할머니가 밤샘으로 펼치는 ‘수다’정도가 될 것이다. 진술자인 돌로레스의 말을 빌리면 ‘메인주 연안에 떠 있는 조그만 바위 덩어리에서 살아온 두 독한 년’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한 독한 년’은 개기일식이 있던 날 남편을 살해한 돌로레스 자신이고, ‘다른 독한 년’은 돌로레스가 30년 동안 가정부로 일해온 별장의 여주인, 베라 도노번이다.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주인공 돌로레스에게서 나온다. 강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녀의 캐릭터는 불행하고 굴곡 많은 여자의 인생을 다루는 소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과 궁상맞은 신세 한탄의 함정에서 건져내는 하나의 장치가 되어준다.



돌로레스는 고교 시절, 여드름 하나 없는 ‘멋진 이마’를 가진 남학생 조 세인트 조지에게 반해 무도회에 따라간다. 그리고 그 멋진 이마를 만지다가 다른 ‘멋진 것’까지 만져버리는 바람에 배 속에 아기를 갖게 된다. 멋진 이마의 혜택은 딱 여기까지, 결혼 직후부터 그녀는 비용을 치르기 시작한다. 우선 남자가 아닌 술통과 결혼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는 한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진술한다.

“아무 상관도 없던 박쥐 두 마리가 같은 동굴 속에서 나란히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익숙해졌던 생활.”

남편 조는 가장의 권위를 주먹으로 확인시키는 마초이자 질투와 의심의 화신이었다. 돌로레스는 이를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녀의 “팔자려니…”는 이런 뜻이다. 처음엔 매를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일정 간격으로 규칙적인 폭력에 시달리자 부당한 폭력과 압박에 순응하게 되고, 매 맞을 때가 다가오면 급기야 얼른 얻어맞고 불안한 상황을 끝내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증세다.

끔찍한 결혼생활이 계속된다. 낮이면 베라의 하녀로 일하며 돈을 벌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조에게 두들겨 맞는다. 세 아이를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이 그녀를 견디게 한다. 그날도 조는 죽도록 일하고 돌아온 돌로레스를 장작개비로 두들겨 팬다. 그야말로 납죽하게, 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비로소 그녀는 뭔가를 시도한다. 화장품 병을 들어 남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겨버리고 손도끼를 내미는 것이다. 해석하면 이런 뜻일 테다.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 아니면 지금 죽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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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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