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둥지 튼 ‘지혜의 숲’
오래전에 이 지면을 통해 출판도시의 중심 거점인 ‘지지향’을 소개한 바 있지만, 그 ‘지지향’ 안에 인문도서관 ‘지혜의 숲’이 개장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은, 경향 각지에 책이 있는 풍경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구경도 하고 책도 읽고 또 살 수만 있다면 몇 권씩 사서 돌아오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처럼 보였다.
무질서의 질서
과연, 장관이었다. 일단 그런 풍경이 펼쳐졌다. 지혜의 숲은, 출판도시문화재단(이사장 김언호)이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마련한 것이다. 파주출판도시에 입주한 수많은 출판사, 크고 작은 서점과 기관, 그리고 은퇴한 노학자들의 서재에 있던 책이 한자리에 모여든 것이다. 대략 50만 권이 모였고 그중 20만 권 정도가 길고도 높다란 서가에 자리 잡았다. 전체 수장 능력은 100만 권에 달한다.
내 관심의 초점은 이 많은 책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한길사 대표이자 출판도시문화재단을 이끄는 김언호 이사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요즘 버려지는 책이 너무 많다. 책을 처분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고민하는 분이 많은데, 이를 집적해 지혜의 숲을 이룬 곳이 바로 이 도서관이다. 원로 지식인과 학자, 교수가 평생 연구하고 읽은 책, 출판사들이 그동안 펴낸 책 등이 모였다”고 말했다. 서가를 천천히 살펴보니, 길고도 높다란 서가를 빼곡하게 채운 책을 기증한 이들의 면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일면 아름다운 풍경인데, 두 가지 면에서 씁쓸한 점도 있다. 먼저 책이 모여든 일차적인 원인이랄까, 김언호 이사장의 말대로 ‘처분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는 시대라는 점이다. 소설가 문순태는 2013년 8월 14일자 ‘광주일보’ 기고문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7년 전 정년퇴임할 때 연구실 책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더니 필요한 책만 골라가겠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나눠줄까 했으나, 조교는 학생들이 재미있는 책들만 가져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쓰레기장에 버릴 수는 없었다.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에는 선후배 작가들과 동료 문인들이 사인을 하여 기증한 것도 많고, 가난했던 시절 용돈을 아껴가며 어렵게 구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중략). 많은 책이 쓰레기가 되고 있다. 광주·전남에서 1년이면 30명 넘는 교수가 퇴직하고, 그들이 소장하던 수만 권의 책이 버려지고 있다. 전공서적 중에는 구하기 어려운 책도 많다. 그뿐인가. 광주 시내 도서관에서도 한 달이면 한 트럭 분량의 헌책이 폐지가 된다고 한다.”
이런 정황이 일차적으로 씁쓸하다. 그리하여 천, 천, 히 완상하며 ‘지혜의 숲’을 살펴보는데, 귀한 책들이 용케도 폐기처분되지 않고, 정성껏 읽어줄 독자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서가를 채우고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절반 이상의 책이 어른 키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잔뜩 꽂혀 있다. 이 점이 두 번째로 씁쓸하다. 건축가 김병윤(대전대 교수)과 디자이너 김현선(김현선디자인연구소 대표)이 설계한 ‘지혜의 숲’은 책과 더불어 한두 시간을 충분히 소요할 수 있을 만큼 그 동선이 부드럽고 조명 또한 아늑하다. 누가 굳이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책을 고르고 자리를 잡아서 앉고 가만히 한두 페이지씩 넘겨보는,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준다. 그런데 서가가 너무 높다. 6월 중순 본격적인 개장을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도서관용 안전 사다리 같은 것이 비치될지 몰라도 만약 이 상태대로라면 이 안에 모여든 책의 3분의 2는 ‘전시용’이다. 수많은 책이 다양한 행로를 따라 모여들었지만, 지적 호사와 한나절 산책을 위하여, 누군가의 블로그 이미지를 위하여, 또 누군가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아주 근사하게 만들어진 ‘책으로 된 병풍’이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