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호

대한민국 법원 로고로 거듭난 ‘정의의 여신’ 디케

[브랜드가 된 신화]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서 비롯된 암호화폐 ‘테라’

  • 김원익 홍익대 문과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입력2026-02-10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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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초의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신 가이아

    • ‘테라로사’ ‘테라코타’도 가이아의 흔적

    • 정의 구현, 공정한 재판 관장한 디케

    • 선녀 연상케 하는 대법원 로비 정의의 여신상

    독일 화가 안젤름 포이어바흐(1829~1880)가 그린 ‘대지의 여신’ 가이아. 위키피디아 커먼스

    독일 화가 안젤름 포이어바흐(1829~1880)가 그린 ‘대지의 여신’ 가이아. 위키피디아 커먼스

    그리스신화에서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다. 모든 신과 만물의 어머니다. ‘게(Ge)’ 혹은 ‘가(Ga)’라고도 했고, 로마에선 ‘테라(Terra)’ 혹은 ‘텔루스(Tellus)’라 불렀으며, 영어로는 ‘지어(Gaea)’라고 한다. 가이아, 테라, 지어는 모두 지구, 땅, 토지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가끔 ‘가이아 부동산’이나 ‘가이아 공인중개사 사무소’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모든 그리스 신의 어머니이자 할머니

    가이아는 태초의 카오스(chaos·혼돈)에서 태어났다. 카오스는 거대한 텅 빈 공간일 뿐, 엄밀히 말해 신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신화에선 가이아가 최초의 신이다. 신들은 모두 그녀의 자손이다. 가이아는 우선 혼자서 자신과 비슷한 크기로 별이 총총한 하늘 우라노스, 폭풍우가 이는 태초의 황량한 바다 폰토, 요정들의 처소인 산맥 우레아를 낳았다. 이어 아들인 우라노스와 짝을 이뤄 12명의 거인족 티탄을 낳았다.

    가이아는 계속해서 우라노스와의 사이에 키클로페스 삼형제인 브론테스(천둥), 스테로페스(번개), 아르게스(벼락)와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인 코토스·브리아레오스·기게스를 낳았다. 키클로페스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종족을 총칭하고, 헤카톤케이레스는 100개의 팔에 50개의 머리가 돋아난 괴물을 일컫는다.

    티탄 12신을 비롯한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고 거대한 모습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우라노스는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가이아의 몸속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로 밀어 넣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 분노한 가이아는 티탄 12신 중 막내인 크로노스를 시켜 남편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스 신들의 제2대 왕에 오른 크로노스는 거사 전 어머니 가이아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열한 명의 티탄 신족을 타르타로스에서 꺼내주지만, 키클로페스와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는 여전히 그곳에 가둬두었다. 가이아가 그들을 꺼내주라고 크로노스를 아무리 채근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앞으로 태어날 그의 자식 중 한 명이 반드시 그를 권좌에서 밀어낼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가이아의 저주가 마음에 걸린 크로노스는 아내로 맞이한 레아와의 사이에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차례로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하지만 레아는 막내 제우스만은 시어머니 가이아의 충고대로 크레타섬으로 빼돌려 은밀히 키우도록 했다. 세월이 흘러 헌헌장부로 장성한 제우스는 결국 아버지 크로노스의 배 속에서 형제자매들을 구해내고 그들과 힘을 합해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스신화는 바로 그리스 신들의 3대 왕위에 오른 제우스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올림포스 신족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제우스는 가이아의 손자다. 이처럼 가이아는 모든 그리스 신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다. 헤시오도스가 ‘신통기(神統記)’에서 가이아를 “넓은 젖가슴”을 지녔고 “모든 신의 든든한 처소”라 한 건 그 때문이다. 

    가이아의 로마식 이름은 ‘테라’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창시한 ‘가이아 이론’이란 게 있다. 가이아로 대변되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이론이다. 지구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조절하고 진화해 나가는 거대한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현재의 기후·환경 위기도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닐 터이니 얼마나 좋을까. 

    브라질 환경운동가 호세 루첸베르거가 1987년 설립한 환경재단 이름도 ‘가이아’다. 1992년 독일에서 창간된 ‘가이아’라는 유명한 환경 잡지도 있다. 미국 시카고엔 미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 헌 옷을 모아 재활용하는 자선단체 ‘가이아’가 있고, 영국엔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의 중요성을 고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가이아 재단’이 있다. 어린이 건강기능식품 중에 ‘바이오 가이아’가 있으며, 그리스 와인 양조 회사 중에도 ‘가이아 와인스’가 있다.

    우리나라 맥주 브랜드 중에 가이아의 로마식 이름을 딴 ‘테라’가 있다. 또한 지리학 용어 중에 ‘붉은 땅(赤土)’이라는 뜻의 ‘테라로사’도 있고, 미술작품 중에도 점토를 구워 만든 소상(塑像·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인 ‘테라코타’가 있다. ‘테라로사’라는 이탈리아 지명도 있고, 우리나라 커피 전문점 중에도 ‘테라로사’가 있다. 그런데 그 커피 전문점 영어 스펠링을 자세히 살펴보면 ‘Terrarossa’에서 알파벳 ‘r’과 ‘s’가 각각 하나씩 빠져 있다. 

    우리나라엔 걸그룹 f(x)(에프엑스)로 데뷔한 ‘루나’라는 가수가 있고, 한때 그의 이름을 딴 ‘루나폰’과 ‘루나 화장품’이 출시돼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루나’라는 제목의 노래와 앨범도 아주 많다. 옛 소련이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한 무인 달 탐사 계획도 ‘루나 계획’이고,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한 무인 우주선 이름도 루나 9호다. 

    암호화폐 중에 2022년 대폭락 사태로 수많은 투자자를 나락으로 빠뜨린 ‘테라’와 ‘루나’가 있다. 테라는 앞서 언급했듯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로마식 이름이고, 루나는 티탄 신족 ‘달의 여신’이던 셀레네의 로마식 이름이다. 달(셀레네=루나)이 지구(가이아=테라)의 위성인 것처럼 두 암호화폐는 자매 사이다. 이들 암호화폐를 만든 대표의 탈법성과 도덕성을 떠나 정말 기발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한 손엔 천칭, 다른 손엔 칼 대신 법전

    그리스신화엔 한 손으로 천칭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든 여신이 두 명 등장한다. 하나는 ‘법의 여신’ 테미스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딸로 ‘정의의 여신’인 디케다. 두 여신의 칼은 법과 정의를 엄정히 구현하고,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엄격히 구별해 내겠다는 각오의 상징이다. 천칭은 어느 쪽으로 조금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공정함의 상징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로비에 세워져 있는 정의의 여신상. 그리스신화 속 ‘정의의 여신’인 디케를 모델로 했다. 뉴시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로비에 세워져 있는 정의의 여신상. 그리스신화 속 ‘정의의 여신’인 디케를 모델로 했다. 뉴시스

    우리나라 대법원과 법원의 로고는 이 두 여신 중 하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여인이 오른손으로는 칼 대신 법전을 품에 안은 채 왼손으로는 천칭을 든 모양새다. 그렇다면 그 로고의 모델은 두 여신 중 누구일까? 바로 디케다. 테미스가 신의 의지나 법 혹은 관습을 관장했다면 디케는 정의 구현이나 도덕적 질서, 공정한 재판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신통기’에 따르면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 된 후 ‘지혜의 여신’ 메티스에 이어 티탄 12신의 하나로 고모였던 테미스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 ‘계절의 여신’ 호라이 세 자매를 두었다. 호라이는 ‘호라(Hora)’의 복수형으로 세 자매를 총칭하는 이름이며, 두 세대로 나누어진다. 그중 디케는 바로 호라이의 두 번째 세대 세 자매 중 하나다.

    호라이의 첫 번째 세대는 계절이나 12시간, 12개월을 담당한 여신들로 처음엔 세 자매였다가 점차 계절이나 달의 수에 맞게 네 명, 열두 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호라이의 두 번째 세대는 ‘질서의 여신’ 에우노미아,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정의의 여신’ 디케 세 자매를 말한다. 각기 질서, 평화, 정의라는 뜻인데 어머니인 ‘법의 여신’ 테미스의 속성을 타고났다.

    ‘신통기’에 따르면, 그중 디케는 “신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제우스 신의 딸이자 고결한 성처녀”로서 안개로 몸을 감춘 채 이 세상 곳곳을 암행하며 인간의 “부당한 판결과 수치스러운 행동”을 감시하는 3000명이나 되는 제우스의 파수꾼 중 하나다. 

    디케는 로마에선 ‘유스티티아’라고 이름만 달라진다. 유스티티아도 두 손에 각각 천칭과 칼을 들고 있다. 하지만 15세기 말부터 한 가지 특성이 부가된다. 그것은 그녀의 눈을 천으로 가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스티티아의 눈가리개는 인종, 계급, 성별 등을 보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유스티티아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레이디 저스티스(Lady Justice)’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굳이 우리말로 옮겨 ‘정의의 부인’이라고 할 순 없을 테니 ‘정의의 여신’ 혹은 ‘레이디 저스티스’라고밖에 할 수 없을 듯하다. 이 호칭은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내 헤라마저 ‘법의 여신’ 테미스에겐 깍듯이 ‘Lady’라는 경칭을 붙였다는 데서 착안한 것 같다.

    법원, 법대, 로스쿨마다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상은 세계 어디서나 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법과 관련한 단체나 기관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경내에 정의의 여신상을 만들어 전시한다. 심지어 서양 문화권에선 사람의 왕래가 잦은 광장, 분수 등에도 여신상이 세워질 정도다. 조각상의 이름은 ‘정의의 여신’을 비롯해 ‘디케’ ‘아스트라이아’ ‘유스티티아’ ‘레이디 저스티스’ 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법원과 법원 로고에만 정의의 여신상이 형상화된 것은 아니다. 각 대학교의 법대나 로스쿨 앞에도 거의 정의의 여신상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특히 대법원 로비 정면 상단 벽엔 정의의 여신상이 하나 조성돼 있는데, 다른 나라 정의의 여신상과 사뭇 달라 이채롭다. 여신의 얼굴, 머리 모양, 의상 등이 우리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선녀를 연상시킬 만큼 한국적이다.

    이에 비해 일산 사법연수원 도서관 내에 세워져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얼굴과 옷차림새가 수더분하고, 오른손에 든 칼의 끝도 너무 뭉툭해 여신의 풍모나 기운이 전혀 우러나지 않는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쪽 옛 대한변호사협회 회관(당주동) 앞 도로변에도 ‘법의 여신상’이라는 이름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도 얼굴과 복장이 이국적이며, 오른손으로는 천칭을 들고 왼손 손바닥으로는 끝이 땅바닥에 닿은 칼의 손잡이 끝을 슬며시 누르고 있다. 눈도 지그시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대한변호사협회 회관은 서초동으로 옮긴 지 오래다. 하지만 이 여신상만은 굳게 남아 임대용 건물로 쓰이는 옛 회관 빌딩을 굳게 지키고 있다. 근처에 볼일이 있을 때면 너무 무료하고 고독할 그 여신상을 찾아 한참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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