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콘트랙트 통해 거래 내역 자동 전산화
배당, 거래 확인 등 전 과정 블록체인에 기록
주식에 적용하면 의결권 행사도 자동화 가능
美 자산운용사 블랙록 대표 “모든 자산 토큰화될 것”

실물자산(RWA·Real World Assets)의 토큰화(Tokenization)의 개념을 나타낸 그림. AI 생성 이미지
과거 암호화폐를 ‘자금세탁의 도구’라고 혹평했던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이제 “시장의 다음 세대, 증권의 다음 세대는 자산의 토큰화가 될 것”이라며 가장 강력한 RWA 전도사로 변모했다. 블랙록의 이러한 태세 전환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블랙록은 이미 비트코인 현물 ETF를 통해 암호화폐를 제도권 금융상품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화 펀드 ‘비들(BUIDL·BlackRock USD Institutional Digital Liquidity Fund)’도 출시하며 금융의 디지털 전환을 주도했다.
RWA 토큰, ‘자산의 인터넷 시대’ 여명
시장조사기관이 제시하는 청사진으로 토큰화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30년 자산의 토큰화 규모가 16조1000억 달러(약 2경334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씨티그룹 역시 2030년까지 최대 5조 달러(약 7249조 원) 규모의 토큰화된 디지털 증권이 유통될 것으로 예측했다. ‘자산의 인터넷(Internet of Assets)’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블록체인 개발 이전에도 부동산, 매출 채권 등의 자산을 증권으로 바꿀 방법은 있었다. 대표적 예가 ‘자산유동화증권(ABS·Asset-Backed Securities)’이다. RWA 토큰화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자동 전산화다. 기존의 ABS는 실물 계약서를 기반으로 하거나 중앙화된 서버의 데이터베이스에 숫자로만 존재한다. 반면 토큰화된 자산은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라는 일종의 블록체인 기반의 자동 계약 이행 프로그램 위에 존재한다. 계약 내용이 코드로 프로그램화돼 있다. 따로 자산을 옮기지 않아도 스스로 계약 조건을 이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자산의 발행, 거래, 청산, 배당 등의 전 과정이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화된다. 거래 과정은 전부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거래 내역 위변조가 어려운 만큼 보안 측면에서도 RWA는 ABS에 비해 우위를 점한다.
특히 부동산, 미술품 등 ‘비유동성 자산’의 토큰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비유동자산은 높은 거래비용, 복잡한 법적 절차, 그리고 무엇보다 고액의 최소 투자 금액으로 인해 투자가 어려웠다. 마땅한 투자자나 매수자를 구하지 못하면 실제 가치보다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는 이른바 ‘비유동성 할인’이 발생하기도 한다.
RWA 토큰화는 이러한 자산을 잘게 쪼개 소액 투자자도 접근할 수 있게 돕는다. BCG와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ADDX의 연구에 따르면, 비유동성자산 최소 투자 금액을 100만 달러에서 1만 달러 수준으로 낮출 경우, 잠재 투자자 범위가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자산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자산 소유자에게는 자금 조달 비용 감소를, 투자자에게는 포트폴리오 다각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미국의 부동산 토큰화 플랫폼인 ‘리얼티(RealT)’는 이미 주거용 부동산을 토큰화해 전 세계 투자자에게 판매하고 있다. 리얼티는 부동산 투자를 위해 유한책임회사(LLC)를 설립한다. 투자자는 부동산 자체가 아닌, 해당 부동산을 소유한 LLC의 지분을 나눠 갖는 ‘리얼토큰(RealToken)’을 구매한다.
가장 혁신적인 점은 배당 주기다. 전통적인 리츠(REITs)나 임대 수익이 매달 혹은 매 분기 단위로 지급되는 것과 다르다. RealT는 임대 수익이 발생하는 순간 각각의 지분율을 계산해 스테이블코인(USDC) 형태로 투자자의 지갑에 정기 전송한다. 투자자는 ‘RMM(RealT Market Maker)’이라는 거래소를 통해 언제든지 토큰을 매도 및 현금화할 수도 있다. 부동산 매각에 통상 수개월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클릭 몇 번으로 가능해 환금성도 높다.
미술품도 RWA로 나눠서 거래
영어권에서 높은 인기를 끈 고가 미술품 조각 투자 플랫폼 ‘마스터웍스’는 미술품의 소유권을 토큰화해 판매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조금씩 돈을 들여 미술품을 살 수 있게 됐다. 플랫폼이 웹2.0 방식의 공동 구매 모델을 정착시켰다면, 블록체인은 한발 더 나갔다.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훈미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은 2021년 7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유권을 NFT(대체불가토큰·Non-fungible Token)로 발행했다. 동아DB
RWA를 블록체인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산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이를 “기술적 표준을 만든다”고 말한다. 각 자산의 성격을 금융기관 및 정부 규제에 맞게 분류하는 방식이다. 초기 암호화폐 시장을 주도한 ERC-20 표준은 누구나 자유롭게 전송할 수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특성 때문에 규제 준수가 필수적인 실물자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증권형 토큰에 특화된 새로운 표준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ERC-3643(이하 T-REX)이 대표적이다. T-REX에는 ‘신원 확인 시스템’이 탑재돼 있다. 사용자가 토큰을 전송하려 할 때, 스마트 콘트랙트는 즉시 블록체인에 있는 신원 확인 시스템에 요청을 보낸다. 수신자의 신원을 확실히 검증한 뒤에야 토큰 전송을 승인한다. 이를 통해 블록체인을 사용하더라도 금융당국의 규제를 준수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토큰화가 완료됐다고 해서 법적 소유권이 자동으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부동산 등기나 주주 명부는 여전히 관공서나 예탁결제원의 중앙 서버에 존재한다. 이러한 온체인과 오프라인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V·Special Purpose Vehicle)이 생기고 있다. 자산 소유자는 부동산이나 채권을 SPV에 매각하거나 신탁한다. 이로써 SPV가 해당 자산의 법적 소유자가 된다. SPV는 이 자산을 기초로 블록체인에 토큰을 발행한다. 이 토큰은 SPV에 대한 지분, 수익 청구권, 혹은 부채 성격 등 다양하다. 토큰 보유자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통해 SPV가 창출하는 수익(임대료, 이자 등)을 배당받을 권리를 가지게 된다.
가치 유통 비용 없애는 RWA
RWA는 현재의 주식시장도 혁신할 수 있는 기술이다. 주식시장은 매매 체결 시점과 실제 자산 및 대금이 교환되는 결제 시점 사이에 시차가 있다. 특히 시장이 열리지 않는 시점이 취약하다. 이 기간 주식을 거래한 상대방이 파산하거나 회사가 상장폐지 처분을 받게 되면 투자자는 돈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위험을 막기 위해 청산소, 예탁결제원, 수탁 은행 등 수많은 중개 기관이 존재하며, 대규모의 증거금이 묶여 있어야 한다.블록체인 기반의 RWA는 이를 ‘원자적 결제(Atomic Settlement)’로 해결한다. 원자적 결제란 자산의 인도와 대금의 지급을 동시에 실행하는 방식이다. 이 결제 방식은 구매자가 돈(혹은 토큰)이 있고, 판매자가 자산이 있음을 블록체인으로 확인한 후, 자산과 돈의 교환을 동시에 처리한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중개기관도 증거금도 필요 없다.
중개 과정의 자동화는 비용 절감으로 직결된다. 영국의 핀테크 기업 ‘칼라스톤’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자산운용사가 RWA를 도입할 경우 자산 관련 펀드 처리 및 운영비용을 약 23%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조 원을 운용하는 대형 펀드에는 천문학적인 이익 개선 효과를 가져다준다.
주주 명부 관리, 배당금 계산 및 지급, 의결권 행사, 세금 공제 등 수작업이나 별도의 시스템으로 처리되던 업무도 스마트 콘트랙트로 자동화할 수 있다. 기관투자자들은 결제를 위해 묶여 있던 담보금이 해방됨에 따라, 유휴 자금을 다른 곳에 투자해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법과 규제가 자동 적용된다는 점도 블록체인 금융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각 국가나 기관이 요구하는 복잡하고 파편화된 법규를 토큰 개발 단계에서 내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거주자에게 판매가 금지된 상품이라면, 한국 주소나 한국 국적 소유자에게는 토큰 전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토큰에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 규정에 따라 1년간 매도가 불가능한 보호예수 규정도 자동 적용 가능하다. 사람이 개입해 제한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토큰은 배당 측면에서도 주식보다 유리하다. 채권의 이자나 주식의 배당금이 발생하면, 특정 시점에 토큰을 보유한 사람이나 법인을 자동으로 확인해 각자의 지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자동으로 분배한다.
이를 활용하면 수천, 수만 명의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보내기 위해 은행 이체 수수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배당을 실행하는 순간 수분 내에 배당금 분배가 완료된다. 주주총회 투표 역시 블록체인상에서 이루어진다. 토큰 보유량에 비례하여 투표권이 부여되며, 투표 결과는 위변조 불가능한 원장에 기록되어 즉시 공개된다. 이는 소액주주들의 권리 행사를 돕고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인다.
실물자산과 블록체인의 만남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그 파급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의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다. 인터넷의 등장은 정보의 유통 비용을 ‘0’으로 수렴시키며 정보 혁명을 일으켰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RWA는 ‘가치’의 유통 비용을 없앤다. RWA는 단순히 아날로그 자산을 디지털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자산의 소유, 거래, 관리, 활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9월 2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세계경제포럼 의장인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을 접견하고 있다. 뉴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