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갑작스러운 단전(斷電)으로 미국으로부터 발전함(發電艦)까지 지원받는 신세이던 한국이 세계 6위의 원전(原電)대국(大國)이 된 요인은 무엇인가. 원폭을 만든 미국은 핵개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자 재빨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으로 핵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한국은 이 변화에 편승했다.
1945년 8월6일 미국의 B-29 폭격기가 우라늄 원자폭탄을 투하한 직후의 일본 히로시마.
광복을 맞은 조선은 미국의 군정(軍政)을 받게 됐다. 한심한 조선 사정을 파악한 미 군정장관 대리 찰스 헬믹 미 육군 소장은 “한국은 자국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인력이 없어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미군이 지원을 중단하면 한국 경제는 소달구지가 끄는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고 농사를 짓지 않는 900만 한국인(당시 남한 인구)은 굶주림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희망 없는 나라’에서 세계 6위의 ‘원전대국’으로
광복 당시 한국(남한)이 갖고 있던 전력 생산시설은 한반도에 설치된 전력 생산 시설의 11.5%에 불과했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일본과 만주 그리고 중국에 있던 동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시작된 공산 독재를 피해 적잖은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왔으므로 한국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로 인해 한국의 전력 자급률은 4%대로 떨어졌다.
미군정이 끝나가던 1948년 5월14일, 북한은 한국을 상대로 전력 송출 중단 조치를 취했다. 그로 인해 일순간에 전력 부족 현상이 일어나 곳곳에서 ‘블랙아웃’과 ‘브라운아웃’ 현상이 발생했다. 당황한 미군은 2만㎾급 전기를 생산하는 자코나(Jacona)와 6500㎾급 전기를 생산하는 엘렉트라(Electra) 발전함(發電艦)을 인천항과 부산항에 보내, 전력난에 대처케 했다. 이후 북한은 1950년 6월25일 기습공격을 감행해 한국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한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적인 산업국가이자 IT(정보기술)산업을 주도하는 나라로 발전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기가 있어야 한다. 풍부한 전기가 있되 값이 싸야 산업체들은 생산비 부담이 적어져 가격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의 전기 값은 1982년 이래 거의 변화가 없다. 1982년 1월부터 2005년 12월 사이 물가는 평균 193% 올랐다. 하지만 전기 값은 2.4%밖에 오르지 않았다.
한국의 전기 값이 이렇듯 싼 것은 원자력 발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현재 20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는데 이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력이 한국에서 소비하는 전체 전력의 40% 정도이다. 한국 원전에서 생산하는 전기는 다른 발전소, 예를 들면 유연탄 화력발전소나 가스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보다 가격이 훨씬 더 싸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기 때문에 전기 값을 낮출 수 있었고 값싼 전기 덕분에 재빨리 정보화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세계 3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다.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30% 정도로 한국보다 약간 낮다. 일본의 전기 값은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비싼 편이다.
2004년 기준으로 한국의 kWh당 전기값은 74.58원이고 일본은 165.88원이다.
한국과 일본은 원자력발전 비율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왜 한국의 전기 값은 일본보다 싼 것일까. 그 비밀은 원전의 ‘무정지(無停止) 운영’에 있다. 한국은 운전 무정지 기간이 가장 긴 나라이다. 원전을 멈춰 세운 일이 적다보니 한국 원전은 그만큼 전기를 많이 생산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전체 전기 값을 낮출 수 있는 요인이다. 한국이 세계 11위의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데는 원자력발전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
핵무기의 등장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꼬마) 모형.
1945년 6월말 니미츠 미 해군 원수가 이끄는 태평양군은 혈투를 벌이며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3개월 간 치러진 이 전투에서 미군은 1만2000여 명이 희생됐는데 일본인은 그보다 10배 많은 12만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인의 희생이 컸던 것은 일본 군인과 지역 주민이 그야말로 결사항전(決死抗戰)했기 때문이다. 군인과 주민이 싸우다 모두 죽자는 옥쇄(玉碎) 전략이었다.
이것이 전쟁을 지휘하는 미군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로서는 충격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데 이렇게 큰 희생을 치렀으니 일본 본토에 상륙할 때는 얼마나 많은 미군과 일본인이 희생될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도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리면 일본 군인들은 항복하는 대신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투신자살을 했다.
저러한 기백이라면 미군은 일본 본토를 장악하더라도 주민 속에 숨어든 반미 게릴라들의 엄청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군 연합참모본부는, 맥아더 육군 원수가 이끄는 남서태평양군은 1944년 말이 필리핀에 상륙했지만 야마시타(山下奉文) 일본 육군 중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주둔 일본군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필리핀에서만 1년 가까이 ‘버벅’거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으려면 일본 본토를 장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 본토 상륙에 앞서 규슈(九州) 섬 상륙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올림픽 작전으로 명명한 규슈 상륙작전에 군과 맥아더군을 중심으로 14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6군을 투입하기로 했다(1945년 11월1일 작전 감행예정). 그러나 일본인의 저항이 거셀 것으로 예상해 규슈 전체를 장악하는 데 1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도쿄(東京) 근처로 상륙해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작전을 펼친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은 코넷작전으로 명명했는데, 이 작전에는 맥아더 군과 니미츠군을 더하고 독일의 항복으로 여유가 생긴 유럽전선에서 일부 부대를 데펴와 치르기도 했다. 1946년 봄으로 예정한 코넷작전에는 제8군, 제 10군, 제 1군(예비)을 동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군을 투입해도 일본의 항복을 받는 데 또 상당한 기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군 최고 지휘부인 대본영(大本營)은 ‘1억 옥쇄’를 외치며 바람을 잡았다. 규슈와 일본 본토 장악 후 예상되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일본인의 항전 의지를 꺾기 위해 미국은 두 가지 작업을 검토했다.
하나는 일본인의 집단심리 분석인데 이 작업은 심리학자인 베네딕트 여사가 맡아 미국 내 일본인을 상대로 세밀한 심리 조사를 벌였다. 베네딕트는 훗날 일본인의 집단심리를 밝힌 이 연구를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공개했는데,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충격과 공포’를 줘서 악착같은 일본인을 일거에 제압하는 방법의 모색이었다. 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은 생존을 건 혈투였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총력을 다해 새로운 병기(兵器) 개발에 노력했다. 이 노력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때 핵무기와 미사일, 레이더라고 하는 3대 첨단 병기가 출현했다.
미국과 일본 영국 독일 등 전쟁에 참여한 각 나라는 3대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중 가장 앞서간 것이 미국이었다. 3대 무기 가운데 가장 관심이 높았던 것은 엄청난 화력을 가진 핵무기였다. 미국은 이를 개발하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을 가진 사업을 비밀리에 펼쳤다.
맨해튼 프로젝트
1945년 7월16일 미국은 이 프로젝트로 개발한 고농축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을 뉴멕시코 주 앨러머고도에서 실험함으로써 개발 성공을 확인했다. 맥아더군은 필리핀 전투에서, 니미츠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의 게릴라전을 막 평정했을 때였다. 핵실험 성공을 확인한 미 연합참모본부는 핵무기 사용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사상 최초로 원폭 사용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왼쪽)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리틀보이는 TNT 1만3000t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13킬로톤의 위력이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실험한 핵무기가 애초 4킬로톤의 위력(실제 폭발 위력은 0.55킬로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북한 핵무기보다는 3배 이상 위력이 강한 셈이다.
플루토늄 폭탄은 길이 5m에, 직경 1.2m, 무게가 4.5t이었다. 무게는 고농축 우라늄탄과 큰 차이가 없으나 길이와 직경이 더 길고 모양이 똥똥해 이 폭탄은 ‘뚱보(Fat man)’라는 별명을 얻었다.
통상 플루토늄탄은 고농축 우라늄탄보다 위력이 강하다. 뚱보는 22킬로톤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규슈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시기 미 연합참모본부는 꼬마와 뚱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1945년 8월6일 ‘티니안’이라고 하는, 미군이 장악한 북태평양의 한 섬에서 이륙한 509 폭격대 소속 B-29 폭격기(조종사 : 폴 티베츠 대령)가 히로시마(廣島) 상공으로 날아가 꼬마(고농축 우라늄탄)를 히로시마 상공 570m 쯤에서 이 폭탄을 폭발시켰다.
원폭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이다. 원폭은 본래 갖고 있는 위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다. 이유는 한꺼번에 터지지 않고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시차를 두고 터지기 때문이다. 성냥이 가득 찬 성냥통에 불을 붙이면 큰 불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하지만 성냥을 일렬로 늘어세운 후 불을 붙이면, 불이 성냥 하나 하나에 옮겨 붙는 식으로 전파되므로 큰 불과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핵분열을 하게 해줘야 효율이 높아진다. 반면 그 시간이 길어지면 효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핵무기에서 핵분열은 100만분의 1초 이내에 이뤄진다. 그러나 100만 분의 1초는 폭발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데는 너무 긴 시간이다. 1억분의 1초로 핵분열 시간을 단축해야 효율이 극대화한다.
그러나 1945년만 해도 1억분의 1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핵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핵무기의 효율이 낮았다. 꼬마의 효율은 3% 이하였고, 뚱보는 그보다 높아 20% 이하였다.
핵폭탄 투하 공개한 트루먼
그날 히로시마는 꼬마로 인해 중심부 12㎢가 초토화했다. 부서진 가옥은 6만여 호였고 사망자는 7만8000여 명, 부상자는 8만4000여 명에 달했다. 또 수천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폭격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사실을 공개하고 7월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이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반응은 없었다. 그리하여 사흘 후인 8월9일 나가사키(長崎)에 뚱보를 투하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사망자 2만여 명, 부상자 5만여 명, 가옥 2만여 호 완파, 2만5000여 호 반파의 피해가 발생했다. 위력이 훨씬 더 크고 효율도 훨씬 높은 핵폭탄을 투하했는데 나가사키가 당한 피해는 히로시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이유는 지형 조건이었다. 히로시마는 廣島라는 한자 이름 그대로 넓은 평지에 들어선 도시다. 반면 나가사키에는 산이 많다. 플루토늄탄의 폭발이 높은 산에 의해 차폐되어 더 센 폭탄을 맞았음에도 피해를 덜 본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 가옥은 대부분 목조(木造)였다. 목조 가옥은 폭발이나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 석조 건물이나 벽돌 건물, 시멘트 건물이 적었던 것도 히로시마의 피해를 더욱 크게 한 요소로 꼽힌다. 미국은 일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8월15일 일본의 쇼와(昭和) 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미국은 1억 옥쇄를 외치는 일본인의 저항심을 잠재우고 일본을 장악해 1952년까지 7년간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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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 것은 이때 조선은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따라 일본이 돼 있었다는 점이다. 연합국은 일본을 약화하기 위해 일본이 장악한 식민지의 독립을 결정했는데 그 덕분에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관계로 바로 독립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일본과 같은 군정을 받게 되었다.
강력하던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발로 무너졌으니 한국인들은 원폭을 ‘신이 다루는 무기’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원폭 투하 덕분에 조선의 독립은 빨라졌고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미국과 일본인들은 덜 희생될 수 있었다. 극악스럽던 일본을 단 ‘두방’으로 무너뜨렸으니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핵무기를 전지전능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생겼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만능론이 등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은 해군 함대를 전진 배치하는 방법으로 세계 문제에 관여했다. 육군이나 공군 파병은 힘들지만 바다는 당시는 3해리, 지금은 12해리까지만 연안국의 영해이고 나머지는 주인이 없는 공해(公海)이므로 미국 함대는 바다를 통해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공해에서 발진한 군사력으로 연안국을 초토화할 수 있는 해군력의 대표가 바로 항공모함이다. 항공모함 덕분에 미국은 공해를 자국의 안마당으로 만들어버렸다.
퇴조한 핵 폭격 만능론
해군을 통한 세계 지배 전략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미 공군 폭격기를 이용한 핵폭탄 투하였다. 극악스럽던 일본이 핵폭탄 두 발에 항복했으니 핵폭탄을 떨굴 수 있는 폭격기만 있으면 미국은 어떤 전쟁에도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갖게 되었다. 1947년 미 공군은 B-36이라는 초대형 폭격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 공군에서는 B-29보다 큰 이 폭격기에 원폭을 싣고 가 떨구면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니 해군과 육군은 이제 필요 없다는 인식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출현한 또 다른 신무기인 미사일과 레이더, 그리고 소련의 핵실험으로 인해 무너졌다.
덩치 큰 전략폭격기는 적국에는 큰 목표물이 된다. 폭격기가 원폭을 떨구려면 적국의 방공망이 완전 궤멸돼 있어야 한다. 전략폭격기는 적국의 전투기가 단 한 대도 떠오르지 못하고 방공포나 방공 미사일이 날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적국 상공으로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레이더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레이더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이미 개발돼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발전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접근하는 거의 모든 비행기를 발견해낼 수 있게 되었다.
적군은 방공레이더와 방공포, 방공미사일을 특별한 곳에 숨겨둔다. 그리고 B-29나 B-36 같은 대형 전략폭격기가 들어올 때 이를 가동해 이들을 격추한다.
레이더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전략폭격기를 이용한 핵폭탄 투하 전략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핵무기는 사람이 타지 않은 채 매우 빨리 날아가는 미사일에 탑재해 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전략폭격기의 가치는 더욱 하락했다. 이 미사일은 육지에서 쏠 수도 있고 함정(잠수함 포함)에서 쏠 수도 있으니 해군의 중요성이 다시 높아졌다.
그 후 핵무기와 미사일이 한몸이 돼 발전해 갔다. 미국은 핵무기를 탄두 형태로 실은 아트라스, 타이탄, 미니트맨 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 나갔다.
레이더와 미사일 분야가 정교하게 결합하면서 미사일을 맞추는 미사일이 개발되었다. 최근 미국에서 완성했다고 하는 MD(미사일 방어체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개발됐으니 이제는 핵폭탄을 폭격기로 싣고 가 떨군다는 개념은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핵무기 만능론도 쇠퇴했다.
1948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것도 미국의 핵무기 만능론을 쇠퇴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미국의 가장 큰 가상적국이었는데,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했으니 여차하면 미국이 먼저 소련의 핵무기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더 이상 세계를 좌지우지하지 못하고 소련과 대립하는 냉전 단계로 접어들었다.
1952년 미국의 중요한 우방국인 영국도 핵실험에 성공했다. 영국의 성공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영국의 핵무장은 소련의 주의를 미국과 영국 양쪽으로 흩어놓는 효과가 있었다. 1960년 ‘자주의식이 유난히 강한’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가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핵개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것인데 이러한 도미노 현상이 오래 진행되면 선발 핵개발국인 미국의 강점은 상실된다. 또 여러 나라가 핵을 갖게 됨으로써 지구는 공멸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핵개발 도미노를 막아라
각국이 주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핵개발 도미노 현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앞서 나가는’ 미국이 현명한 판단을 했다. 소련의 핵실험 이후 핵 독점 상태가 깨지자 미국은 평화적인 목적에 한해 핵 기술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만 8년째 되는 날인 1953년 12월8일, 유엔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며 원자력발전 등 평화적인 목적으로 핵을 이용하려는 나라에게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핵에 관심이 있던 나라들이 미국과 접촉했는데, 이는 냉전시대 미국 지지 세력을 크게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젠하워가 이런 제의를 한 데는 미국 나름의 준비가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은 핵을 무기가 아닌 동력원(動力源)으로 개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즉 핵분열을 천천히 일어나게 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핵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잠수함을 움직이는 동력원으로 원자로를 사용하게 된 것인데, 원자로를 동력원으로 하는 잠수함은 1년 정도 수면으로 부상하지 않고 물속에서 잠항할 수 있다. 미국은 1954년 1월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Nautilus·프랑스의 공상과학 소설가 졸베르가 쓴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괴물체 이름을 딴 것이다)함을 진수함으로써 ‘핵잠(核潛) 시대’를 열었다.
핵잠은 그 후 덩치를 키워 핵탄두를 탑재한 거대한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싣게 되었다. 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따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자력을 잠수함의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발견이 ‘원자력발전’ 시대를 열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제로 유엔에서 연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설 덕분에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도 원자력을 이용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한국이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으로 성장한 계기는 아이젠하워의 선언에 있다.
세계 원자력발전소 운영 및 건설 현황 (2005년 12월 31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