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용후핵연료는 그냥 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이를 재처리하면 다시 원자력발전 연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란 문제를 50년 후로 미뤄놓았다. 한국에서는 비핵화 선언이 사용후핵연료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저준위 처분장을 짓는 데만 20년을 허비한 한국은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 폐기물 처리를 결정하는 데
- 또 몇 년을 보낼 것인가.
경주에 들어선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개념도.
중저준위 폐기물은 글자 그대로 방사능의 정도가 낮은 것으로 원자력발전소 운전원이나 보수요원이 사용한 장갑, 덧신, 가운, 걸레 그리고 각종 교체 부품 따위다. 또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산업체와 병원, 연구기관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도 중저준위 폐기물로 구분된다.
고준위 폐기물은 사용후핵연료 자체나 이를 자원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재처리할 때 발생하는 방사능에 오염된 폐기물을 말한다. 자체 처분 폐기물은 일정 기준 이하의 방사능을 띤 것으로 사업자가 소각, 매립 또는 재활용 등의 방법으로 처분할 수 있다.
사용후핵연료, 95% 이상 재활용 가능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사용후핵연료이다. 사용후핵연료는 95% 이상을 재활용할 수 있어 폐기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사용후핵연료를 폐기물로 보고 직접 처분할지 아니면 재처리하여 자원으로 재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 정책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방사능 수준이 낮은 중저준위 폐기물이다.
방사성 폐기물은 처리과정에서 방사능 발생량을 줄이고 추후 폐기물의 수송과 최종처분에 적합하도록 최종 생성물을 화학적·방사선학적으로 안정된 형태로 변환시켜야 한다. 감용(減容), 안정화된 방사성 폐기물은 탄소강으로 만든 드럼 같은 포장용기에 넣어 임시저장한 후 궁극적으로는 영구처분한다.
처분의 목적은 방사성 폐기물이 해를 끼칠 수 있는 기간 생태계로부터 격리해 인간과 자연환경이 방사선에 의한 장애를 받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폐기물 격리는 매질(媒質)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육지처분(Land Disposal)
방사성 폐기물을 지하 매질에 격리하는 방법이다. 1940년대 미국에서 핵무기를 제조할 때 발생한 폐기물을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인접지역에 파묻은 것을 계기로 전세계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다.
▼ 해양토기(Sea Dumping)
1946년 미국에서 처음 시도한 이래, 주로 국토가 협소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유럽공동시장(OECD/NEA) 회원국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해양 투기량이 증가함에 따라 해양 오염 가능성이 제기돼, 1972년 ‘폐기물 및 기타 물질의 투기에 의한 해양오염 방지에 관한 런던조약’이 발효되어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그 밖에도 심해처분(Seabed Dis-posal), 빙하처분(Ice sheet Disposal), 우주나 도서(島嶼)를 이용하는 방법 등이 제안되었으나, 현재 여러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거나 활용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신뢰성이 검증된 육지처분뿐이다.
일본 로카쇼무라 처분장 전경.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육지처분은 1940년대 미국에서 핵무기 개발계획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천층(淺層)에 묻어 처분한 이래 각국의 자연과 인문사회적 환경에 맞춰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 방식은 처분시설을 지표면 가까이에 설치하느냐, 지하 깊은 곳에 설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천층처분과 동굴처분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방식은 처분시설 내부를 콘크리트 등으로 보강하는지에 따라 다시 단순
스웨덴 포스마크 처분장.
단순 천층처분은 지표면에 트렌치를 파 폐기물을 넣고 그 위에 파낸 흙이나 흙에 점토를 혼합한 것을 1m 이상의 두께로 덮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인구밀도가 낮고, 기후가 건조해 처분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나라에서만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반웰(Barnwell) 처분장이다.
경주는 인공 동굴처분 방식 채택
인공방벽 천층처분은 단순 천층처분 부지를 확보할 수 없는 경우, 기존 부지의 자연적 특성에 공학적 방벽(防壁)을 보강해 폐기물 처분계통의 종합 성능을 향상시킨 것이다. 지상 또는 지하에 콘크리트 트렌치를 만드는 방식으로 프랑스의 로브 처분장과 일본의 로카쇼무라 처분장이 여기에 속한다.
단순 동굴처분은 기존 폐광 가운데 지질 및 기타 조건이 적합한 장소를 선택해 처분시설로 개조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암염(巖鹽) 폐광을 활용한 독일의 아세(Asse) 처분장이 대표적이다.
인공 동굴처분은 처분에 적합한 폐광을 찾기 어려울 경우 택하는 방식이다. 지하암반에 인공적인 동굴을 뚫고 처분시설을 건설해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처분시설의 구조나 배치를 최적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스웨덴 포스마크(Forsmark) 처분장과 핀란드의 올킬루토(Olkiluoto) 처분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 두 처분방식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방사성 폐기물에 함유된 방사성 핵종을 소멸될 때까지 인간 생활권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을 수 있다. 방사성 폐기물을 장기간 안전하게 격리하려면, 처분장이 들어선 지역과 인근에 활성단층이 없어야 한다.
또 자연동굴이 형성될 수 있는 석회암 지역은 피해야 하고, 사람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과 많은 사람의 식수원이 되는 상수원 보호구역도 피해야 한다. 지하수의 흐름이 적고, 균일하고 단단한 암반이 있거나 지질학적으로 안정된 곳이 처분장으로 적합하다.
우리나라의 경주에 건설하려고 하는 처분장은 인공 동굴처분 방식에 속한다. 견고한 지하암반으로 이루어진 동굴 안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폐기물을 넣은 드럼을 저장한다. 이 처분장이 폐기물 드럼으로 다 채워지면 남는 공간은 자갈과 콘크리트, 점토 등으로 채워 입구를 철저히 밀봉한다. 인간 및 생태계로부터 완전히 격리하는 것이다.
경주에 들어설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처분장은 2008년에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 건설된 처분장의 용량은 10만드럼이고, 최종적으로는 80만드럼을 처분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이 처분장을 짓는 데는 3만9200m2의 부지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라에 따라서는 안전성을 보다 더 확보하기 위해 중준위에 속하는 필터나 이온교환 수지 등은 사일로(Silo)에 처분하고, 저준위에 속하는 폐기물만 터널에 처분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천층처분 방식을 채택한 미국은 폐기물을 A·B·C 등급으로 분류해, 준위가 가장 높은 C 등급 폐기물을 맨 아래에 처분하고 다른 폐기물을 그 위에 처분하고 있다.
동굴처분 방식(왼쪽)과 천층처분 방식(오른쪽)
원자력발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용후핵연료를 재생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산업에 쓰이는 연료와는 달리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는 재처리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기술은, 우라늄 농축 기술과 함께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한 일부 국가만 독점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면, 재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액체 폐기물이 바로 고준위 폐기물로 처분대상이 되고, 재처리하지 않는다면, 사용후핵연료 자체가 고준위 폐기물이 돼 처분대상이 된다.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고 처분하는 것을 직접처분이라고 한다.
고준위 폐기물에 포함된 반감기(半減期)가 긴 핵종에서 많은 양의 방사능과 뜨거운 열이 나온다. 따라서 이 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문제가 된다.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은 큰 어려움이 없으므로 현재 방사성 폐기물 관리의 현안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준위 폐기물을 관리하거나 처분하는 데는 네 가지 방안이 제시돼 있다.
첫째, 폐기물 또는 사용후핵연료를 300년 정도 장기 보관한 후 처분방안을 강구한다. 둘째, 지하 300~1000m의 암반에 처분하고 밀봉한다. 이는 직접처분을 계획 중인 나라들이 고려하는 방법으로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가 택하고 있다.
셋째, 두 번째 방안과 같되 처분장을 바로 밀봉하지 않고 수백년 동안 개방한 상태로 관리하다 나중에 밀봉한다. 미국은 유카산(Yucca Mountain) 처분장에 MRS(Monitored Retrievable Storage) 라는 개념을 적용해 이 방식을 채택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넷째,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고려하고 있는 방안으로 적절한 처리 후 처분하는 방법이다. 재처리 후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재활용하고, 반감기가 긴 악티나이드 핵종은 핵변환(241쪽 기사 참조)시켜 처리함으로써, 처분해야 할 폐기물 양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미국은 GNEP(‘지넵’으로 읽는다. Global Nuclear Energy Partnership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 세계 원자력 파트너십’로 번역할 수 있겠다) 정책을 통하여 이를 추진하기로 공표한 바 있다.
농축과 재처리 막은 비핵화 선언
스웨덴은 사용후핵연료를 지하 500m의 심지층(深地層)에 직접처분하기로 결정하고, 2010년까지 부지를 선정할 예정이다. 핀란드도 같은 개념의 처분장을 2020년경 운영할 예정으로 있다. 스위스나 영국도 심지층 처분이 기술적으로 안전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고준위 폐기물을 처분할 때는 지하 300~1000m 깊이의 심지층에서 방사성 핵종이 어떤 상태를 보이는지에 대한 실험과 데이터의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몇몇 선진국에서는 지하 실험시설(URL·Underground Research Laboratory)을 건설해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까지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중앙집중식 중간저장 시설을 짓기로 했다. 여기에 각 원전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옮겨 50년 정도 보관한 후 그때 가서 직접처분을 할지 아니면 재처리해 고준위 폐기물만 고화(固化) 처리할지를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사용후핵연료에서 열을 발생시키는 세슘(Cs)과 스트론튬(Sr) 같은 핵종을 분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는 핵 비확산성 핵연료주기 기술과 관계된 것으로 관계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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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후핵연료의 처리에 대한 우리나라의 정책은 ‘나중에 결정하자’는 ‘Wait and see’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채택한 비핵화 선언에는 농축과 재처리 관련 시설을 갖지 않기로 돼 있어 문제이다. 비핵화 선언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방안 연구개발이나 정책 도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분명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활용하고 방사성 폐기물의 발생량 축소와 핵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사용후핵연료 처분 문제에 대한 논의를 확대해 국가적인 어젠다를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