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접촉과 교섭, 사랑과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장면들을 강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강은 무심하지 않다. 강은 저 혼자 흐르지 않고 저 혼자 질주하지 않는다. 강은 언제나 땅과 교섭하고 대화한다. 자갈밭 위에서 물살은 봄날 나물 캐러 나온 소녀들처럼 재잘대며 흐르고 덩치 큰 바위를 만나면 바위얼굴을 은근슬쩍 쓰다듬다가 (“오, 너 여기 있었구나”) 손목 잡힐세라 얼른 비켜난다. 높은 곳에서 강물은 흰 속살을 드러내며 깡충깡충 뛰어내리거나 좔좔 미끄럼질 타고, 깊은 곳에서는 안단테의 느린 리듬에 몸을 싣는다. 고운 모래밭을 만났을 때 강물은 그 자신도 맑은 얼굴이 되어 마치 오래 기다린 바람이 치마폭을 출렁이듯 얕은 모래밭 위로 넘실댄다. 이 넘실거림은 강이 땅과 관계 맺는 비밀스러운 만짐과 비빔, 스밈과 적심의 절정을 연출한다. 그렇게 해서 강과 땅 사이의 그 모든 접촉의 신성한 제의들과 그 모든 즐거운 교섭의 에로스로부터 강바닥 수초들이 태어나고 강가의 나무와 수풀이 자라고 물의 안팎에서 생명들이 자라 ‘강의 가족’을 일군다.
강의 에로스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강과 인간의 접촉관계다. 생존 목적의 활동이 인간 활동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문명의 초기 단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강과의 자유로운 교섭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즐거운 유년의 추억이며 성장의 비밀이라는 사실이다. 여름날 강에서의 물장구, 멱 감기, 겨울의 얼음지치기, 발목을 간질이는 물살의 찰랑거림, 빛나는 모래와 자갈들, 돌 틈의 가재와 웅덩이의 쉬리 떼, 새와 나무와 구름과 꽃, 물속에 잠긴 달, 쏟아지는 강변의 별빛 - 이 모든 것과의 교섭이 우리를 키운 비밀스러운 힘의 기원이다. 성년이 되어서도 우리는 강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그 그리움은 우리를 자라게 한 힘의 기원을 향한 향수 때문이며, 강과의 교섭에서 얻어진 그 경이로운 힘에 대한 겸손한 존경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한강은 이런 에로스의 강, 접촉과 교섭의 강이 아니다. 오늘의 한강은 회색의 거대한 시멘트 옹벽들 사이에 포로처럼 갇혀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볼품없는 물길에 불과하다. 그 강은 땅과의 교섭을 잃은 지 오래다. 시멘트 옹벽 사이에 갇힌 한강은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를 향해 질주하던 포로 수송용 열차행렬을 생각나게 한다. 그 수송열차행렬에 벗어남, 자유, 대화, 소통이 허용되지 않았듯이 지금의 한강에도 자유와 소통, 접촉과 대화는 없다. 땅과의 접속을 차단당한 강은 인간과의 접촉도 상실한다. 사람들은 강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고 강물에 발목을 적실 수도 없다. 강폭은 넓어지고 수심은 깊어져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 강물로 뛰어들 수 없다. 이 한강은 어릴 적 우리가 뛰어들어 첨벙대던 강, 멱 감던 강, 무릎 위로 올라오는 물살과 장난치며 놀던 그런 정겨운 강이 아니다.
강 양쪽의 옹벽 너머에는 또 시멘트로 된 이중 삼중의 연안 고속도로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이 한강은 우리가 사랑할 만한 강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괴물이 되어버린 강이다.
사랑할 수 없는 강은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는다. 기억에서 사라진 강은 잊힌 강이다. 한강은 오늘도 거기에 있고 어제처럼 오늘도 우리 눈앞을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강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다. 강과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의 끈, 접촉의 끈, 대화의 끈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 물리적 대상인 한강은 거기 있으나 사람들과 교섭하는 존재로서의 한강은 우리 마음과 기억에서 떠난 지 오래다. 한강은 우리가 잃어버린 강, 잊어버려야 하는 강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로, 전철로 재빨리 건너고 잊어버려야 할 어떤 것, 출퇴근길을 더디게 하는, 그러므로 속도와 효율을 위해서는 없는 편이 더 나았을 귀찮은 장애물, 그 존재의 귀함이나 친밀성을 경험할 길이 없는 천덕꾸러기다.
서울 상암지구 하늘공원에서 본 한강의 석양.강에 대한 유년의 추억은 우리를 키운 비밀스러운 힘의 기원이다. 성년이 되어서도 우리는 강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오른쪽).
그것들은 그냥 시멘트 덩어리이거나 쇳덩이다. 옹벽과 연안도로들, 그리고 그 도로에 인접한 거대 아파트들만이 한강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한강의 교량들도 강을 죽이고 강을 소외시킨다.
한강을 되살린다는 것은 한강에 가해진 이런 소외와 박탈, 분리와 망각의 조건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한강 르네상스’라 할 때 그 ‘르네상스’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는 아직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르네상스’라 불리는 것들의 핵심에는 두 개의 지향, 혹은 두 개의 가치가 놓여 있다. 하나는 생명과 사랑의 복구로서의 ‘에로스의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회복’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은 동어반복일지 모른다. 에로스의 회복 없이 인간회복은 가능하지 않고, 인간회복은 이미 그 자체로 에로스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강의 르네상스’에 부여할 수 있는 최선의 의미는 강과 인간, 강과 땅, 강과 모든 생명 가진 것 사이의 친밀한 접촉과 교섭, 대화와 공생의 관계를 한강에 되돌려주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강을 되찾아주고 강에 인간을, 흙과 바람과 생명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이 관계 복구의 지향은 다른 어떤 목표보다도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며 다른 어떤 목표보다 우선한다. 그것은 지금 한강을 고립시키고 있는 분리와 소외의 조건들을 제거하고 수정해서 한강을 ‘강다운 강’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도 역사의 흔적이 스며 있다. 왼쪽은 겸재 정선이 양화나루 일대를 그린 ‘양화진’(간송미술관 소장)으로 가운데 높은 언덕인 잠두봉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와 조선군이 교전한 현장이다. 사진은 오늘날의 잠두봉. 절두산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강의 기억
한강은 그 무심해 보이는 얼굴 너머로 슬픔과 상처, 좌절과 실패의 역사를 감추고 있다. 한강은 140년 전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을 만난 곳이다. 그 최초의 조우가 충돌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886년 로즈 제독의 프랑스 제국 함대는 7척의 군함과 1000명의 병력으로 한강 양화나루까지 거슬러 올라와 잠두봉(지금의 절두산) 앞에서 조선군과 교전하고 강의 하구로 내려가 강화도를 점령한 뒤 한 달간 섬을 약탈한다. 그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들은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다. 19세기 서양 제국주의의 파도가 조선의 강물과 맞닥뜨린 그 충돌의 순간으로부터 우리의 근세는 시작된다. ‘서세동진(西勢東進)’의 첫 물결이 밀어닥친 곳, 거기가 한강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현대 한국이 근대적 산업체계를 성공시키면서 그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 갖다 붙인 이름이 ‘한강의 기적’이다. 한강의 기억은 단순하지 않다. 한강은 풍경 이상의 기억과 역사의 강이다. 갈매기 날아오르고 유람선 뜨는 강의 풍경 이미지들을 한 꺼풀씩 벗기면 역사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들이 무더기로 드러난다.
이 역사의 강 한강에 대한 기억의 상당 부분은 폭력, 지배, 전쟁과 관계되어 있다. 한강 인도교는 철교와 함께 전근대의 반도 공간에 들어선 최초의 근대적 교량이다. 이 교량을 만든 것은 일제 식민세력이다. 반도 전역을 소위 ‘근대적 공간’으로 재편하려 했던 식민지배자들의 기획 속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화려했던 것의 하나가 한강을 가로지른 두 교량이다. 선사 이래 수천년 동안 나룻배와 뗏목의 기억만을 가진 강에 어느 순간 철근과 시멘트로 된 우람한 수평의 직선 구조물이 들어선 것이다. 조선인의 인지구조에 오랫동안 각인되어온 강은 물과 뭍의 무한하고 가변적인 접선이 만들어내는 부드럽고 섬세한 곡선이다. 수평의 거대한 직선 다리는 이 섬세한 곡선의 강을, 혹은 강의 곡선을, 한순간에 무력화한다. 그것은 곡선을 향한 모든 시선을 거두어 그 자신에게로 집중시킨다.
최초의 한강 다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놀라움은 이 영웅적 근대구조물을 향한 시선이동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그 시선이동은 우리의 문화사적 성찰이 아직 주목하지 못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그것은 위풍당당한 영웅,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힘, 찬탄과 경배가 필요한 대상의 출현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식민지 수도 경성의 심리학에는 심대한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핵심은 근대 구조물로 대표되는 ‘강대한 힘’에 대한 외경과 선망이 근세 조선인의, 그리고 마침내는 현대 한국인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지금의 한강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강의 남북 양안에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시멘트 옹벽들을 축조하고 모든 곡선을 두들겨 패 직선화하고 물과 뭍의 접촉을 차단한 지금의 한강 환경이 만들어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러나 그 80년대 군사정권의 심리학은 그 이전 군사정권의 심리학에 이어져 있고 통틀어 군사정권 시대 30년을 지배한 통치의 문법 전체는 식민지시대의 통치학에 연결되어 있다. 식민시대 이후 ‘근대화’의 이름으로 가장 과감한 국토 재편을 기획하고 단행한 것은 역대 군사정권이다. 하나뿐이던 한강다리는 스무 개 이상으로 늘어나고 시멘트 포장도로와 고속도로는 수십배 수백배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같은 국토 재편에 대한 국민 대중의 심리적 저항이나 반감의 크기는 60년대 이후 개발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미미한 수준으로 약화된다. 식민시대의 ‘신작로’가 국토의 “맥을 끊는다” 해서 조선인의 저항에 더러 부딪히기도 했다면 60년대 이후 군사정권 시기의 직선도로 만들기와 터널 뚫기에서 전통적인 유기체적 ‘맥’의 개념은 거의 완전히 소멸한다. 그러나 이 소멸에 대한 저항의 기록은 미미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사항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군사정권 후기의 기념비적 한강 치수 사업을 포함한 60년대 이후 국토개발 기획의 통치학적 심리적 뿌리는 식민시대의 근대적 통치학에 닿아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근대적인 것의 위용과 효율에 대한 대중적 찬탄과 선망 역시 식민시대에 그 심리적 기원을 두면서 60년대 이후 개발주의에 의한 이념적 강화기를 거쳐 지금 이 시점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지금의 살벌하고 비인간적이고 반생태적인 한강 풍경을 초래한 우리의 정치적 문화사적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길다.
‘한강 르네상스’ 사업은 이 길고 깊은 뿌리를 걷어낼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에로스의 강을 말하고 인간회복과 강의 회복을 말했지만, 이 모든 ‘회복’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속도, 효율, 지배, 개발은 물질적 근대의 핵심 가치들이다. 근대 건축 구조물이 지닌 직선지향성과 평면지향성은 이런 가치와 직결되어 있다. ‘한강 르네상스’가 강의 잃어버린 곡선을 되찾고 생태계를 복원하고 인간과 강의 접촉 동선을 확보하는 등의 작업을 위해 속도, 효율, 지배, 개발의 근대적 가치들을 내팽개칠 수 있는가? 개발주의 이념이 시민 인구의 넓은 층에 깊게 침투해 있는 지금 서울시가, 서울시장이, 무슨 수로 개발주의의 집요한 요구를 잠재울 것인가?
더구나 지금은 근대와 후기근대(혹은 탈근대)가 중첩해 있는 시대다. 후기근대의 물질적 가치체계를 요약하는 것은 시장, 경쟁, 생존이다. 우리가 ‘강다운 강’이라 부른 아름다운 생태의 강, 에로스의 강은 기본적으로 속도, 효율, 지배, 개발의 근대 가치들에 동조하지 않으며 시장, 경쟁, 생존의 가치를 절대화하게 하는 이 시대의 엄혹한 명령들과도 거의 정반대편에서 맞서는 다른 가치들의 존중과 활성화를 요구한다. ‘한강 르네상스’는 시대의 명령에 맞설 용기를 가지려는 것인가 아니면 개발, 효율, 경쟁, 생존, 시장 등등의 가치를 ‘르네상스’의 이름 아래 재포장해 궁극적으로는 그 가치체계에 네 발로 더 잘 봉사하고자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한강회복 사업이 간단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고 깊은 딜레마들에 포위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한강은 이미 시멘트로 뒤덮인 견고한 터널식 수로가 되어 있다. 이미 되어 있고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헐어내는 ‘언두잉(undoing)’의 작업은 단순한 ‘디몰리션(demolition)’만으로 되지 않는 복잡하고 힘겨운 과정들을 포함한다. 작업이 외피적 장식의 차원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도처에 불가능의 지점들이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강 둔덕에 걷기와 어슬렁거림, 어울림과 누림이 가능한 문화거리를 만들기 위해 양안 고속도로들을 철거하고 고층 아파트들을 밀어낼 수 있는가? 그 많은 한강다리에 인간적 공간을 도입하는 일은 가능한가? 이미 강을 떠난 곳에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서울에서 접수생활구역(waterfront town)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우리는 한강의 모습을 바꾸어보고자 하는 서울시의 노력을 도와야 한다. 한강은 시청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고 국민의 것이다. 그런데 그 한강, 지금의 한강은 시쳇말로 ‘꼴불견’이다. 그 꼴불견의 강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한강은 다시 아름다워져야 한다. 한강을 되살려내기 위한 지혜의 첫 번째 소스는 한강 그 자체다. 무엇보다도 한강은 ‘두터운 문화’를 갖고 있다. 한강 유역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적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복합유적 보유지다.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까지의 유적들도 있다. 미사리와 암사동의 선사주거지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백제 유적들은 한강을 중심으로 전개된 두터운 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원이다. 한강은 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삼국에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섯 개 왕국에 젖줄을 대준 강이다. 이처럼 두터운 역사를 가진 강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오랜 문화 유적과 기억을 가진 강은 일시적 볼거리나 제공하는 강과는 그 정신적 차원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전쟁과 상처,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도 한강의 정신문화적 차원을 두텁게 한다. 한강은 우리가 그동안 소홀히 팽개쳐온 그런 정신의 차원, 혼의 차원이 깊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한강변에서 꽃핀 ‘장터문화’는 한강이 가진 두터운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을 대표한다. ‘장터’는 현대의 ‘시장’과는 다르다. 돈의 신이 지배하는, 그러므로 우리가 가끔 대문자 ‘엠(M)’으로 표기할 필요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 현대의 ‘시장(market)’이다. 시장은 구체적 행위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낼 필요가 없는 거대한 추상이다. 그러나 ‘장터(market place)’는 추상의 거대 공간이 아니라 작은 구체적 공간이다. 살과 땀과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구체적 행위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거래를 진행하는 곳, 사고파는 행위가 놀이의 차원을 넘나들기도 하는 장소다.
시장을 지배하는 최고의 명령이 ‘경쟁’이라면 장터의 거래 규칙은 ‘교환’이다. 시장에서 사람은 ‘기능’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반면 장터에서 사람은 언제나 기능 이상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러나 한때 번성했던 ‘마포나루’는 그런 조선시대 장터의 하나다. 그것은 사람들이 강과 이마를 맞대고 살았던 ‘워터프런트 타운’의 한 형태다. 한강 복원 기획은 이런 형태의 장터문화에서 배울 것이 많다. 한강에서 기획되는 그 어떤 축제도 주민의 삶에 기초한 이런 종류의 토착 장터문화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공허한 소비성 행사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생업활동이 강과 구체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한강을 살리는 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지금의 한강은 위락업소들을 빼면 시민의 생업활동과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다. 나루가 사라지면서 한강은 운송, 물류, 혹은 어항의 그 어느 기능도 수행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팔도에서 양곡을 실은 조운선들이 몰려들던 양화나루, 어물공급을 담당하던 마포나루 등을 현대에 복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서울은 서해시대를 앞두고 강의 항구도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개해야 한다.
이 문제는 지금도 한강 하류를 틀어막고 있는 남북한 대치구도와 직결되어 있다. 강물은 서해로 흘러들지만 민간선박은 한강 하류를 통해 서해로 나가거나 서울로 들어올 수 없다. 한강 하구는 민간선박의 통행이 금지된 군사구역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전쟁과 관계된 한강의 기억을 자세히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한강을 무기력한 강으로 만든 요인의 하나가 전쟁구도라는 사실만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해 전에 화가 임옥상은 그 막힌 한강 하구를 상징적으로 뚫기 위해 임진강과 한강의 물살이 만나는 서해 수역까지 진출해보려는 선상 평화행진을 시도했으나 좌절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을 통한 서해 출입의 실현 없이 한강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가치와 비전
한강의 인문학적 가치와 비전을 말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절실하고도 기본적인 윤리적 질문들에 응답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문명의 가장 이른 아침들이 강에서 열렸다면 문명을 지탱하는 지속적인 힘도 강에서 나오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일강은 지금도 흐르지만 그 강에서 나온 문명은 소멸하고 없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른 강들은 지금도 유구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의 문명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업시대의 강은 땅의 위대한 젖줄이 되어주었고 산업시대에도 제조업을 위한 강의 효용은 컸지만 그러나 지금 같은 고도 기술시대, 농업과 굴뚝산업이 생산의 위계서열에서 지배적 지위를 잃어버린 시대에 강의 효용, 강의 효율, 강의 가치는 무엇인가?
강은 직선, 속도, 경쟁과도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비효율과 느림의 패러다임이다. 강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 삶의 현장에서 2선 3선의 가치로 후퇴해버린 시대에 강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은 강의 가치를, 효용과 효율이라는 것의 의미를, 속도와 경쟁의 가치들을, 그리고 생존의 명령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각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인문학은 바로 그 ‘다른 각도’와 ‘다른 방식’들을 공급한다.
상아탑에 안주하던 인문학을 그 탑에서 떠나 우리 시대의 절절한 문제들과 대결하게 한 사람의 하나가 현대 이탈리아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프리모 레비다. 그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화학을 공부한 과학자다.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나치라는 이름의 고도 효율체제가 자행하는 살육과 파괴의 폭력을 견디어내는 동안 그가 대면해야 했던 가장 절실한 화두는 “도대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였다. 이것은 물론 인문학의 핵심적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레비의 경우 그 질문은 연구실에서, 책에서, 상아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절멸수용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질문에 대한 레비의 응답이 무엇인가도 여기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 자체다. 그것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며 어딘가 정답이 있는 질문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응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한강의 질문’으로 돌리고자 한다. 나는 레비의 그 질문을 한강의 질문으로 삼는 것이 한강의 인문학적 가치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한국이 레비가 겪었던 절멸수용소와 유사한 상황조건에 놓여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비의 그 질문이 우리 시대의 세계에 가장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 된 순간에 오히려 그 질문을 기피하고 그 질문으로부터 열심히 도주하려 한다. 그 질문을 망각한 사회가 고도 효율에도 불구하고 나치 같은 지옥의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나는 평화의 강, 생명의 강, 공생의 강을 지향하는 것이 한강의 비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전은 한강을 유연한 강, 에로스의 강, 서로 다른 가치와 지향들도 공생의 체계 속에 관용하고 아우르는 열림의 강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전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던져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 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 강은 흐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