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택소노미는 글로벌 상황 반영한 조치
EU택소노미·ISO와 큰 틀에서 비슷
한국 산업 특성 고려해 ‘전환부문’ 둬
개발도상국-선진국 동일 조건 아래 경쟁
한국 기업에 위기이자 기회
김동수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소장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고민과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가시적 변화는 머지않아 피부로 느끼게 된다. EU와 미국은 빠르면 2025년부터 모든 수입품에 ‘탄소국경세’를 부과한다. 탄소국경세란 자국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 및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부과하는 관세다. 한국 기업이 EU와 미국이 부과하는 탄소국경세를 부담하지 않으려면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격히 줄이거나, 아예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
유럽은 2030년까지 탄소중립 80% 완료 예정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기업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규제하고, 탄소국경세 부과에 관한 법률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글로벌 추세에 발맞춰 지난해 8월 국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어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30일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이하 K택소노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K택소노미란 6대 환경목표(온실가스 감축, 기후변화 적응, 물, 순환경제, 오염, 생물다양성)에 기여하는 녹색경제활동의 분류를 말한다. 세계 각 나라는 EU와 국제표준화기구(ISO) 등의 녹색분류체계를 참고해 자국형 녹색분류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당초 국내외에서 ‘원자력발전 포함 여부’가 논란이 됐는데 올해 들어 EU가 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편입하면서 환경부도 9월 20일 K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하는 내용의 초안을 발표했다.초안에 따르면 한국이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 완전히 포함하기 위해서는 2031년까지 사고저항핵연료(ATF·원전의 비상노심냉각 기능이 상실돼도 사고 대처 기간을 현저히 개선할 수 있으며, 수소 발생량을 크게 억제해 원전의 안전성을 향상할 수 있는 핵연료)를 적용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사용하고 남은 핵연료 또는 핵연료의 재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방사선의 세기가 강한 폐기물) 처분 시설도 확보해야 한다.
현재 녹색분류체계는 나라마다 사회적 협의 과정을 거쳐 구체화하는 단계에 있다. 과정과 단계에 차이는 있으나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한국 역시 선제적으로 K택소노미를 수립해 탄소중립을 조기에 실현하고, 기업과 시민이 적극적으로 탄소중립을 실천해야 글로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K택소노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글로벌 탄소중립 추세와 기업의 ESG 경영을 연구해 온 김동수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소장은 “특히 탄소중립과 관련한 내용은 국가 간 협약(intergovernmental decision)에 의해 결정되는데, K택소노미는 글로벌 상황을 반영해 추진되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말했다. 김 소장에게 K택소노미의 의의와 한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었다.
지난해 말 한국 정부가 K택소노미 최종안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금융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것은 물론 녹색경제활동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린워싱(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 환경주의)에 대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탄소중립과 관련한 내용은 국가 간 상호협약에 의해 결정되는데 우리 기업이 수출할 때 제재를 받으면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즉, 우리 정부가 K택소노미를 추진하는 것은 국내 상황만 반영한 조치가 아니라 글로벌 상황을 반영한 조치라고 봐야 한다.”
정부가 독자적으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우리가 합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해외 기준을 따르겠다면 K택소노미를 만들 필요 없이 EU나 ISO14030 등 해외 기준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국가 간 제재를 동등하게 취하는 것뿐 아니라 국가 간 상호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K택소노미가 필요하다. K택소노미의 주요 원칙과 기준은 EU택소노미와 ISO14030 등을 참고하되 ‘녹색부문’과 별도로 ‘전환부문’을 나눠 구분해 뒀다. 녹색부문은 어떤 에너지를 친환경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정의하고, 전환부문은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LNG, 혼합가스 에너지 및 화석연료 사용 업종을 일부 포함했다. 한국의 산업 특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그렇다고 K택소노미가 해외에서 통용되지 않거나 한국만의 기준이라고 볼 수 없다. 큰 틀에서 EU와 ISO의 기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택소노미에는 없는 K택소노미의 ‘전환부문’에 대한 논란이 있을 듯하다.
“전환부문을 두고 학계와 관련 업계에서 상충되는 시각이 있다. 전환부문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속도감 있게 친환경 에너지 체계로 전환하지 않고, LNG 등 전환부문에 포함된 사업에 투자가 일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지금과 같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지정학적 이슈가 길어지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충격이 일시에 회복되지 않아 경기침체를 겪을 때는 서로 간에 한시적인 에너지 믹스 전략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K택소노미의 전환부문 전략은 유효성이 있다.”
글로벌 철강 기업, 脫화석연료 가시화
한국 기업의 탄소중립 움직임은 사실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선진국에서 주창하는 ‘2050년 탄소중립 완료’ 가능성을 두고 관련 업계에서는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적지 았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탄소중립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철강업종에서도 글로벌 기업들의 눈에 띄는 진전이 벌써부터 포착되고 있다.‘녹색부문’도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의 업종은 아직 탄소배출 비율이 59%로 높다.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데.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 온실가스 다(多)배출 산업의 경우 조기에 탄소중립 달성이 쉽지 않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글로벌 탄소중립 동향과 해외 동종업계 탄소중립 동향을 고려하면 산업 내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우리나라 기업이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해외 기업과 경쟁을 벌인다면 수출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택소노미를 떠나 ESG 전반을 이야기할 때 기준 요건이 개발도상국이라고 해서 낮고, 선진국이라고 해서 더 높지 않다. 동일한 조건 아래 경쟁할 때 택소노미를 잘 충족하는 기업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런 면에서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을 녹색부문에 편입하는 것은 과격하다’고 말할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경쟁력을 강화시킬지 살펴봐야 한다.”
해외 기업들의 동향은 어떤가.
“일부 국가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다. 스웨덴 철강기업 사브(SSAB)와 독일 철강기업 티센그룹(ThyssenKrupp)은 이미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 세계자원연구소(WRI), 세계자연기금(WWF) 등이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온실가스 배출 삭감을 목표로 발족한 사업인 ‘과학 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cience Based Targets Initiative)’의 목표 승인까지 받았다. 티센그룹은 2025년까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그린 철강 생산설비를 일부 갖출 것으로 알려졌고, ‘2030년까지 300만t 이상을 그린 철강으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또한 룩셈부르크의 세계 최대 철강 기업인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은 2년 내 탄소중립과 관련한 구체적 목표를 수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탄소중립 기술도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도 지금 택소노미를 충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논할 때가 아니다. 택소노미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수출경쟁력이 떨어지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과거 우리나라 기업들은 혁신적 활동을 굉장히 잘 해왔다. 탄소중립 초기 단계에서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 국내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겠지만, 궁극적으로 특유의 혁신 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기업에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K택소노미에 따르면 2025년부터 환경성적표지 작성지침에 따라 전(全)과정 평가 기준이 도입된다. 준비도 없이 평가부터 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EU의 경우 탄소국경 조정세 시범 사업이 내년에 시작된다. 당장 대상 산업에 속한 국내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 전과정 평가를 해야 하니 급한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도 당장 적용해야 하는 건 맞다. 기업의 준비 사항을 참작해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분명한 건 국가별로 환경성적표지와 같은 ‘환경 라벨링 제도’가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EU의 경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단계별로 추진하는 것도 좋지만 탄소국경 조정세의 선제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환경성적표지 제도를 조기 시행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여러 환경성적표지제도를 운영해 왔다. 따라서 그 제도들을 경험 삼아 향후 제도를 개편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시행 앞두고 정부 차원 지원 필요
기준도 까다롭다. K택소노미 녹색분류체계 적합성 판단 절차를 보면 활동 기준, 인정 기준, 배제 기준, 보호 기준 등 4가지 기준을 전부 충족해야 한다.“구체적으로 경제활동이 활동 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러 환경 목표에 대한 기술적 조건을 충족했는지, 환경파괴를 야기하지 않았는지, 노동·안전·반부패·인권 등을 침해했는지를 포함해 4가지 사안을 동시 충족했는지 보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온실가스를 줄인다고 물을 오염시키거나 생물다양성을 파괴해서는 안 되고, 아동인권을 침해하거나 중대재해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동시 충족이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녹색경제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필요조건이다. 각기 독립적 요소인 듯해도 상호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하나를 충족하면 다른 것을 어길 수밖에 없는 그런 개념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녹색경제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는 걸 천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K택소노미를 이행하지 못하면 기업 생존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된다.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아직 현장에서는 준비가 안 됐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래서 정부 차원의 탄소중립 기술 R&D투자 확대가 필요하다. 단순 R&D 지원이 아니라 공격적인 R&D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RE100 추진 여건 개선 등 정부의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지원과 정책 개선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탄소중립 경제’ ‘녹색경제’라고 부르는 이 체제로의 전환은 용역과 함께 재화를 생산해 수출로 이윤을 창출해 온 우리의 산업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큰 위기인 동시에 상당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EU나 영국, 미국은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이 확정됐거나 준비 중인데, 우리가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면 지금부터 훨씬 더 강력한 지원 및 촉진 정책을 펼쳐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탄소중립 경제를 위한 규제의 시간이 아니라 촉진과 육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정혜연 차장
grape06@donga.com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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