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에서 미국과 한국은 남한에 핵무기가 없다고 말했지만, 북한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면 천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북한이 이 말을 믿는다면 왜 구태여 공동성명에 포함시켰겠는가. 설령 북한이 이 말을 믿는다 해도, 한반도는 남북을 다 포함하는 것인 만큼 정말 남한에도 핵무기나 핵계획이 없는지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필자의 의문이었다.
‘적절한 시기’는 ‘절대로 안 준다’는 뜻?
물론 미국이나 다른 6자회담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비핵화’라는 말의 상대로 북한을 상정해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미국은 핵 문제가 북한 때문에 불거진 만큼 북한이 검증대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북한이 ‘Korean Peninsula’를 ‘조선반도’라고 부르는 데는, 정치적으로 한반도 전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이며, 반도 전체의 주인은 당연히 북한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남한은 미제가 강점하고 있는 조선 땅의 반쪽일 뿐이다. 몇 해 전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가 제주도를 방문하고 “여기도 내 땅인데…”라고 말한 것은 그저 감상적인 발언이 아니다. 남북의 국력(國力)을 비교할 때 남한의 우위를 부인하기 어렵지만, 북한은 여전히 역사, 문화, 가치관, 민족주의 시각 등에서 남한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비핵화의 대상이 조선반도일 경우, 남한도 당연히 검증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필자는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 논의에 쓰인 ‘적절한 시기(at an appropriate time)’라는 표현은 ‘절대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철폐하기 전에는 경수로를 제공할 수 없다는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고, 그나마도 그때 가서 ‘제공의 주제(the subject of the provision)’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지 제공하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6자회담 공동성명 발표 바로 다음날 북한이 경수로 제공 전에는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문제삼고 나오는 바람에 더욱 부각됐다. 북한은 경수로를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의 과거행동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필자가 이런 문제를 앞서 말한 ‘워싱턴포스트’의 글을 통해 제기하자 워싱턴에서는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다. 6자회담 협상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직접 ‘abandon’의 뜻을 정의하고 나섰고, 미국 관리들과 한국 정부도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은 자발적으로 핵계획을 ‘포기’하겠다고 했으며, ‘포기’는 ‘철폐’를 의미한다”고 해명했다. ‘검증가능한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해 한미 당국자들은 주한미군 시설을 포함한 남한 내 핵무기 및 핵시설에 대한 북한의 검증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물론 외교협상에서는 용어를 사전적 의미보다 당사자들간에 합의된 개념으로 사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북한이 ‘포기’란 용어를 ‘물리적 철폐’로 받아들인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은 6자회담이 다시 열리기 전에 ‘포기’와 ‘검증가능한 비핵화’의 개념이 명확히 정의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핵화’라는 용어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 생존 때부터 사용해온 말이다. ‘포기’의 개념과 함께 이 용어의 개념에 대해서도 당사자들간에 구체적으로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철폐(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주장해왔다. 4차 6자회담을 끝내면서 미국이 CVID에서 ‘포기’로 한 발짝 물러선 것은 6자회담을 둘러싼 국제 역학관계에서 미국이 불리한 처지에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측 협상대표는 자신들이 물러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또한 워싱턴의 보수 강경파 세력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문제가 될 수 있는 용어에 대해 해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포기’라는 용어를 받아들인 것이 곧 ‘철폐’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CVID에 얽힌 북한과 미국의 속내
최근에 이르러서는 CVID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미국측이 회담장에서 이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기본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의 쓰임과 배경을 분석해보면 핵문제를 둘러싼 협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초까지만 해도 북핵 문제 해결의 목표를 설명할 때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철폐(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CVID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차 6자회담 때다. CVID란 약자(略字)를 회담장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중국측 대표다. 어느 나라 말이든 약자는 전문가들 사이에 그 개념이 충분히 공유될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측은 약자는 약자대로 다른 뉘앙스를 풍길 수 있음을 고려하여 다른 참가국과 언론들이 CVID를 보편적으로 쓰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사용했다.
최초의 표현인 ‘verifiable and irreversible’에다 C(complete·완전한)가 추가된 것은 북한의 우라늄 계획을 포함한다는 뜻이고, I(Irreversible·불가역적)는 처음부터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핵협정(Agreed Framework·조미기본합의)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미국의 인식이 담긴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북한의 핵계획을 철폐할 때 영원히 복구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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