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북부의 주장이 지배적인 통념이 되었고, 대법원 또한 추후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법적 정당성은 물론 그가 제시한 정치적 논거, 곧 연방 탈퇴가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수 있고 다수의 지배에 위배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링컨은 전쟁기간 중 인신보호영장을 정지시켰고, 전신과 언론을 검열했으며, 전쟁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체포 구금했다. 링컨은 국가 변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를 정당화하고, 추후 이를 형사소추하지 못하도록 면책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런 반(反)입헌주의적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상찬되어왔다.
링컨은 노예제의 고리를 끊은 ‘위대한 해방자’요 평등의 수호자로 일컬어져왔다. 1939년 흑인 여가수 매리언 앤더슨이 인종차별에 항의해 그의 기념관 앞에서 성악 공연을 한 것도,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그 계단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것도 링컨의 이런 대중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1863년 노예해방령을 발표할 때까지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다. 아니, 그때에도 무조건적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해방령은 반란 상태에 있던 남부 주 노예들만의 해방을 명시했을 뿐, 이미 탈환된 루이지애나나 연방에 남아 있던 노예주의 노예들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은 도의적 양심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승리를 위한 전략적·정치적 고려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인종평등, 흑백통혼 반대한 링컨
물론 링컨은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할 사회악(惡)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그의 주장은 새로 연방에 편입되는 주에 노예제가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차원 이상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링컨은 인종평등과 흑백간의 통혼(通婚)에도 반대했다. 그는 흑백이 완벽한 평등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 믿었고, 흑인의 해외 식민을 통해 인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왜 국민적 영웅으로서, 더 나아가 인류의 사표로서 추앙받아온 것일까. 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제까지 링컨을 주제로 씌어진 책이 무려 1만6000권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많다. 이렇게 많은 책이 출판된 것도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링컨의 대중적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비극적 죽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연극배우 출신 존 윌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은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가 애퍼매톡스 법원에서 항복한 지 불과 6일 만의 일이다. 게다가 그가 총탄에 쓰러진 4월14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수난일이었다. 전쟁의 고통을 종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던 사람들에게 이는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비쳤다. 예수가 죄 많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링컨 또한 노예제라는 죄악에 대한 징벌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전쟁으로부터 연방을 구하고 죽음을 당한 순교자로 인식됐다.
‘링컨 신화’의 감춰진 이야기들
입지전적인 삶의 이력 또한 그에 관한 신화를 양산해온 한 요인이다.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서 태어난 첫 대통령이다. 켄터키의 시골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에 입성하기까지 그의 삶은 미국인이 문화적 이상으로 동일시할 만한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는 프랭클린적 자수성가형 인물인 동시에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존 윈슬롭과 같은 청교주의자이고, 또한 제퍼슨을 연상시키는 공화주의자다. 요컨대 그는 19세기 미국사회가 지향하는 모든 이념을 한몸에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이상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