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쿠이현 미가타에서 열린 사쿠마 쓰토무 정장의 추모제.
잠수정이 침몰하고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침몰 위치가 확인됐다. 이튿날 인양된 제6호 잠수정은 인근 해군기지로 예인됐다. 그 무렵에는 유럽에서도 잠수정 침몰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대개의 경우 죽은 승무원들이 해치 가까이에 떼지어 몰려 있는 것이 인양된 잠수정의 일반적인 광경이었다. 잠수정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결과였다.
훨씬 훗날의 일이지만, 2000년 여름에 러시아 해군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가 노르웨이 북쪽 수심 100m 해저에 침몰한 사건이 있었다. 118명의 승무원이 전멸한 이 끔찍한 사고에서도 달리 감동적인 후일담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로 미뤄볼 때 쿠르스크 호의 함내 모습이 일반적인 예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제6호 잠수정의 해치를 열면서도 그와 똑같은 처참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고조사 반장이던 요시카와(吉川) 중령의 입에서 처음엔 절규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쿠마 정장의 시신은 사령탑에, 기관 담당 중위는 전동기 곁에, 기관 담당 사병은 가솔린 기관 앞에, 조타병은 조타석에, 공기수(空氣手)는 공기 압착관 앞에…, 14명의 승무원 모두 각자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질식사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에 매달렸다는 증거였다.
군복 주머니 속의 메모
더욱 놀라운 것은 사쿠마 정장의 군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였다. 그 같은 극한 상황에서 기록을 남긴 것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더욱 경이로웠다. 침몰 직후 실내등이 다 꺼지고, 산소는 점점 희박해져 갔으며, 가솔린에서 생겨난 가스가 들어차는 등 사고 이후의 상황이 시간별로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침몰 원인과 침몰 후의 상황을 밝혀두어 잠수정 사고방지와 성능개선 등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도록 한 게 분명했다.
연필로 깨알같이 적은 사쿠마 정장의 마지막 기록은 ‘그렇지만 승무원 일동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직을 잘 지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함. 12시30분 호흡이 몹시 고통스러움’이었고, ‘12시40분이 됨’에서 끝을 맺었다. 그와 더불어 메이지 천황에게 올리는 상소문도 발견됐다고 한다. 내용은 이랬다.
소관(小官)의 부주의로 폐하의 잠수정을 침몰시키고 부하를 죽여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국가를 위해 맡은 바 직무를 행하다 쓰러져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천하의 사람들이 이번 잘못을 들먹이며 장래 잠수정 발전에 타격을 가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입니다. 바라옵건대 다들 더욱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그런 오해 없이 잠수정의 발전 연구에 전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유감도 있을 리 없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한 통의 짤막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히 폐하께 말씀 올림. 제 부하의 유족들이 곤궁해지지 않도록 배려해주시기를, 제 염두에는 오직 이것밖에 없음.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혹시,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군부가 국민들 사이에 반전이나 염전(厭戰)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꾸민 조작극이 아닐까. 버럭 그 같은 의심이 치밀 만큼 사쿠마 정장이 마지막으로 취한 조치는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인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행위였다.
일본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영국 신문 ‘글로브’는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체력적으로 용감할뿐더러 도덕적, 정신적으로도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례는 없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주재 외국 무관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거나, 미국 의회 의사당 내에 사쿠마 정장의 유서가 원문 그대로 전시되기도 했다니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도리도 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