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일 사건 이후 우리 정부는 이라크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고, 방문을 엄격히 제한해왔다. 외교관이나 현지 진출 기업의 주재원 등 극히 제한된 인원이 여행허가증을 발급받아 이라크를 여행한다. 외교부는 여행 목적이 명확한 방문자에 한해 경호팀과 안전한 숙소를 확보했다는 서류를 확인한 다음 허가증을 발급해준다.
필자와 카메라기자 두 명 등 취재팀 3 명도 며칠에 걸쳐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서야 여행허가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여행허가증을 발급받아 취재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바그다드 여행자들은 주로 두바이나 카타르 등 걸프 지역에서 비행기를 바꿔 탄다. 두바이 공항에서 바그다드행 비행기를 타면서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바그다드를 수십 차례 여행했지만 비행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대부분 육로로 다녀야 했다.
두바이 거쳐 바그다드로
전쟁 기간에 이라크로 입국하기 위해서는 옆 나라 요르단의 암만에서 렌터카를 계약하는 것이 첫 번째 절차였다. 이라크 치안 상황이 악화하면 할수록, 또 국경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도로 사정과 거치는 도시들의 여건이 나빠질수록 렌터카 운전사에게 지불하는 비용도 늘어난다.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바그다드행 렌터카는 편도 5000달러를 부를 만큼 구하기 어려웠다. 전쟁 특수 속에서 렌터카 기사들은 한 번 운전해 몇 년치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호부즈 빵을 챙기고 보온병에 차를 넣어 옆 좌석에 던져두면 그때부터는 ‘인샬라(신의 뜻)’다. 운이 좋으면 바그다드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신의 가호가 없다면 반군에게 납치되거나 강도들에게 목숨을 잃는 일도 생긴다. 그것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암만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1000km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폭격에 허리가 부러진 육교들과 망가진 자동차들, 시골 읍내에서 울부짖던 아낙네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전쟁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기억들, 이를테면 새벽 하늘에서 쏟아질 듯 빽빽하던 별들과 사막의 바람에 핏빛 양귀비가 흔들리는 풍경에 취해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시골 어느 식당에서 이스티칸 유리잔에 뜨거운 차를 마신 기억도 날 것이다. 국경을 통한 육로 이동은 불안하고 피곤한 고행임에도 이런 낭만적인 순간도 가져다 준다.
바그다드로 향하는 항공기 운항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이라크 상공이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되면서 전면 금지됐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에는 반군의 공격 위험으로 바그다드행 여객기는 운항되지 않았다.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치안이 차츰 안정을 찾으면서 항공기 운항도 서서히 정상화했다. 현재는 에미리트항공과 카타르항공 등이 바그다드행 항공기를 운항한다.
필자로서는 11년 만의 바그다드 방문이었다. 2004년 2월, 이라크에서 두 달간의 체류를 마지막으로 바그다드에 작별을 고했다. 11년 만에 다시 찾은 이라크, 예전에는 사담 국제공항으로 불리던 바그다드 공항은 공항으로서의 면모를 제법 갖췄다.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궁에 집중 포화를 퍼부었는데 방송사와 공항 등 주요 시설에도 폭격을 가했다. 미군의 공습을 피하려 이란 등 인근 국가로 피신한 항공기들이 이라크로 돌아와 재운항한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VIP터미널에서 한 시간가량 대기하자 우리를 게스트하우스로 태워갈 차량이 도착했다. 공항에서 게스트하우스까지는 40분 걸렸다. 바그다드 시내로 들어서자 다양한 색깔의 선거 포스터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규격이나 장소 제한도 없이 건물 벽과 가로등, 로터리 주변에 수십, 수백 개가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다. 의원 328명을 뽑는 이번 선거에 9000명이 입후보했다고 하니 27대 1의 높은 경쟁률이었다. 여성 후보의 포스터도 많이 보였다.

비스마야 신도시 PC 플랜트 준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