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은 진지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리더…후세인과는 격이 다르다
- 김정일, 남북정상회담 후 “DJ의 말은 80%밖에 못 알아듣겠더라”
- 평양에 승용차 광고 출현…신흥 부유층 형성 중
- 북한 핵정책, ‘남아공의 선택’ 따를 것
- 러시아, 한반도 관통 철도사업 위해 수억 루블 투자
- 한국은 ‘북한판 마셜플랜’ 주도해야
그 25년에는 두 차례에 걸친 북한 근무 6년과 남한 근무 5년이 포함된다. 특히 197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처음으로 발령받은 평양은 그가 ‘제2의 인생’을 출발한 곳이다. 스물두 살의 신출내기 외교관이 처음 찾은 북한은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우정을 이어갈 정도로 정든 곳이다.
톨로라야 총영사에겐 그것말고도 한 가지 더 특별한 체험이 있다. 한반도 격변기의 주요 지도자들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일성·김정일 부자 ‘4김(金)’을 모두 만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는 소련 붕괴 전에 북한에서 근무했고, 소련 국제통상부에서도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과 핵발전소 건설업무에 관여했다. 또한 김일성의 통치 후반기와 김정일 체제 구축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김정일이 푸틴과 회담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행 특별열차에 동승하는 등 20일 동안이나 동행했다.
몇날며칠 동안 대륙을 가로질러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는 김정일과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탑승한 열차를 남한까지 연결하는 TSR 프로젝트의 러시아측 협상실무 책임자로 일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2년 11월 옐친 대통령이 방한할 때 동행해 노태우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배석했고, 대선 후보이던 김영삼(민자당), 김대중(평민당), 정주영(국민당)씨도 만났다. 당시 러시아 외무부 한국과장이던 그는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요격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을 재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는 부분적인 통역을 맡는 등 한국과 소련, 한국과 러시아 외교의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또 한국과 소련이 수교할 당시인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양국 관계를 집중 연구한 주인공이다. 지금은 한반도 문제에서 잠시 떠나 있지만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것은 그렇듯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전방위로 활동한 경력 때문이다.
모자 두 개 쓰고 다니는 외교관
톨로라야 총영사는 마치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 휴가를 보내듯 2003년, 비교적 현안이 많지 않은 시드니 총영사로 부임해 근무하고 있다. 시드니에서도 끊임없이 한반도 관련 글을 써서 외신에 보내고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학회에 참석해 강의하는 등 한반도 전문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듯 러시아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로 인정받는 톨로라야 총영사를 여러 차례 만나 그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주로 시드니 동부에 자리잡은 러시아 총영사관에서 이뤄졌는데, 그가 자주 찾는 단골식당에서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현역 외교관이다보니 그는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를 하고 나서는 예외 없이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맥 빠지는 일이지만 그런 조건을 걸고 인터뷰를 시작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인터뷰한 것도 운이 좋은 편이다. 처음에 그는 현역 외교관 신분이라는 이유로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가 ‘신동아’ 인터뷰에 응한 것은 친분이 두터운 김창수 주시드니 한국 총영사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신동아’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이번 인터뷰는 러시아 정부의 관점이 아니고 남북문제 전문가, 또는 학자로서 내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관례에 따라 영어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톨로라야 총영사를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필자에게 강렬하게 전해진 느낌은 그가 아주 잘 ‘준비된 외교관’이라는 점이다.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구사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어 인터뷰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끝내 영어를 고집했다. 한국말 때문에 조금이라도 밀리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톨로라야 총영사가 건네는 이력서를 보니 학력과 경력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한반도 전문 외교관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Science)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로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oscow Institut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교수를 역임했으며, 국제경제와 외교 등을 이슈로 한 다수의 저서와 연구논문을 펴낸 바 있어 학자로서 그의 자부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2003년 시드니 총영사로 부임하기 전에 모스크바에서 IMEMO(러시아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 산하 ‘현대코리아연구센터(Center for Contemporary Korean Studies)’를 설립해 운영했는데 지금도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두 개의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하나는 외교관의 모자고, 하나는 학자의 모자다. 그런데 시드니는 모자를 두 개 쓰고 다니기엔 너무 덥다”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 대목에서 “사실 나는 외교관으로서뿐 아니라 국제문제나 통상문제 전문가 및 학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총영사’라고 부르지 말고 ‘박사’로 불러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고, 필자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굳이 고른다면 김정일 위원장”
러시아 사람을 연상할 때 ‘백곰’을 떠올리는 것은 필자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톨로라야 박사는 키가 2m에 가까운 거구다. 거기에다 러시아 총영사관의 접견실은 농구경기를 해도 될 만큼 넓다. 첫 대면에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뜻밖에 그는 아주 사근사근한 사람이었다.
우선 ‘말랑말랑’한 질문부터 꺼냈다. 그가 직접 만나본 네 사람의 남북한 지도자에 대한 느낌부터 물었다. “김영삼, 김대중, 김일성, 김정일 중에서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는데, 그는 “현역 외교관한테 그런 걸 물으면 답변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조크를 곁들였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예상과는 달리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답변했다. 물론 그 답변에 앞서 다음과 같은 외교적 수사를 붙였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네 분 모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다. 그래도 굳이 고른다면 김정일 위원장이다.”
그는 네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그들의 정책성향, 음주습관 및 사투리까지 비교해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얘기들을 들려줬다. 지금부터 그의 얘기를 1인칭 화법으로 풀어보자.
시간 순서대로 얘기해보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양으로 간 신출내기였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을 만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날 때마다 그의 풍모와 언변에서 소문으로 들은 것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소련과 북한 모두 통제사회였지만, 김일성 시대의 북한은 전체주의체제였다. 50년 넘는 기간을 그런 형태로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 국가의 퇴행을 의미하지만, 그의 지도력만큼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그가 사망했을 때, 나는 모스크바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남한과 미국의 내 친구들은 “김정일 체제는 곧 붕괴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내가 “후계작업은 오래 전부터 진행됐고 김정일은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말해줬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특히 한국 친구들은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더 잘 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김정일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술자리에선 통 크게 마셔야”
비교적 자주 만난 김정일 위원장 얘기부터 해보자. 나는 그와 함께 술 마실 기회가 많았는데 그는 소문대로 술이 아주 센 사람이다. 그렇다고 서방에 잘못 알려진 대로 ‘주정뱅이’는 절대로 아니고 굳이 얘기하자면 ‘애주가’다.
한번은 내가 술자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걸 보고 “지금 톨로라야가 외교적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래서 내가 “장군님, 저는 술이 약해서 포도주를 마십니다” 하고 둘러댔더니 “그렇구나. 그럼 포도주를 마셔도 좋다”고 했다.
사실 김정일은 외교관과 외교적 언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교관들이 솔직하지 못하고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김정일이 술자리에서 ‘톨로라야가 지금 외교를 한다’고 말한 것은 “톨로라야가 지금 체면이나 차리면서 의례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선 탁 털어놓고 통 크게 마셔야 한다”는 게 그의 음주철학이니 내가 포도주 홀짝거리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열차 편으로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일행의 기념촬영. 오른쪽 끝이 톨로라야 총영사.
그러다가 시간이 돼 행사장으로 입장하는 순간, 그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됐다. 나중엔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처음엔 아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문 안에서와 문 밖에서의 모습이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
군중을 향해 눈빛과 손동작 하나까지 철저하게 연출하는 김정일을 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건 내가 김정일과 함께 20일 정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도 느낀 점이다. 그는 아주 진지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리더로서 러시아 친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 면모가 김일성 사후 11년을 거뜬히 버텨내는 저력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곁에서 지켜본 김정일은, 미국에서 빗대는 것처럼 사담 후세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오히려 로열 패밀리의 면모를 지녔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왕족의 풍모를 지녔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러시아의 한 공장을 방문한 김정일.
김영삼 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자주 만났다. 식사초대를 받아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대체로 비서들이 준비한 것 같은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소련과 한국이 수교한 뒤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옐친 대통령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한 관계자들과 함께 KAL기 요격사건을 마무리하기로 했는데 합의점이 도출되지 않아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이다.
협상은 결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블랙박스가 원인이었다. 우리가 블랙박스 사본을 건넸더니 남한 관계자는 끝까지 원본을 요구했다. 그는 “‘Black box’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Blank box(빈 상자)’를 가져왔다”면서 투덜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KAL기 사건은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부득이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사건 발생 시점이 모스크바에서는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소련 공군은 모스크바의 고위층에 도무지 보고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이나 일본을 통해 한국에 연락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서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라. 한국의 군사분계선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가서 지뢰를 밟아 죽었다면, 그게 누구의 잘못인가. 당시 KAL은 소련의 극동 군사비밀 지역인 비행금지구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참 유감스런 사건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블랙박스 원본을 꼭 받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당시 여당 대표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그 일로 마음이 상했는지 취임 후 러시아 외교관들을 도무지 찾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미국측으로부터 그가 러시아 외교관과 접촉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과는 자주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아주 박식했고 북한과 러시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북한에서 근무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질문했고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의 측근 중에서는 특히 임동원씨와 가깝게 지내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을 만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두 분보다는 측근들의 가치관이 아주 판이하다는 것이다. YS 측근들은 거의 1970년대 수준의 대북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DJ 측근들은 매우 전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한국말을 제법 할 줄 알기 때문에 사투리도 구별하는데, 네 사람의 지도자 모두 특유의 사투리를 사용한 탓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특히 DJ의 사투리는 공부를 많이 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잘 알아듣는다.
그건 나뿐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후 나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을 8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서로 갈라져서 지내다보니 언어의 이질화가 심화된 것이다. 내 느낌으로는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이질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른 듯싶다.
나는 DJ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YS가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실망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고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YS의 견해를 존중한다. 그럼에도 정치적 뿌리가 같은 두 그룹의 견해차이가 그토록 크다는 것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YS와 DJ로부터 휘호를 받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YS는 그 유명한 ‘大道無門’을, DJ는 ‘萬族一家’를 써주었다. YS의 면모에서는 ‘부러지되 휘어지지 않는’ 강직한 지도자상을 느꼈고, DJ에게는 ‘존경심이 절로 생기는’ 위인의 면모를 느꼈다.
솔직히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DJ한테서는 늘 멀리 내다보는 미래의 비전과 신념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DJ를 ‘한국의 간디’라고 생각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덤이 있긴 하지만, 그것말고도 여러 가지 업적으로 그는 러시아에서 ‘위대한 한국인’으로 추앙받는다.
노태우 대통령도 몇 차례 만났는데 특별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다. 그는 군 출신답지 않게 매우 부드러운 분이었다. 사실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김종필씨다. JP는 나와 함께 보드카를 마시면서 러시아 소설 ‘카추샤’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몇몇 대목은 암송하기도 했다. 그는 정말 멋쟁이였으며 로맨티스트 정치인이었다. JP에 관해서 하나만 덧붙이자면 나와 비슷한 취향을 지녀서인지 인간적으로 정감이 느껴졌다.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안정과 평화의 유지다.”(2000년 6월15일, 6·15선언 논평)
“북한은 이라크나 이란과 다르다. 그들은 대화와 변화를 원한다.”(2002년 9월2일, ‘뉴욕타임스’ 인터뷰)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북한의 정권교체보다 북한정권의 개혁을 유도해야 한다.”(2004년 5월21일, 시드니 강연회)
북한문제와 관련한 톨로라야 박사의 주요 발언이다. 대략 2년 주기로 한 발언들인데,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 제1국장의 위치에서 한 말이므로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근간과 북한에 대한 진단 및 전망이 포함됐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체제는 역사적 퇴행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김일성 체제는 스탈린식 전체주의였으며 역사적으로 퇴행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은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통치 아래 북한은 결국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할 것”이라며 희망이 담긴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해 시드니 한인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초청강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많이 쏟아냈다. 특히 “북한이 언젠가는 시장경제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그런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북한은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대북 포용정책이 아주 중요하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경제적·안보적 이유 때문에 핵무기 개발에 강한 의지를 표명해왔다. 그들은 핵문제의 선결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 경제원조, 포괄적인 협력관계를 보장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붕괴를 바랐던 것으로 믿었다. 2001년 클린턴 전 대통령이 계획대로 평양을 방문했다면 북한 핵문제는 타결됐을 것이다….”
그는 또 “공산당을 포함한 북한사회 전반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면서 특히 북한경제와 관련해 “물품거래뿐만 아니라 외환거래도 제한적이나마 가능해졌으며, 평양의 경우 승용차 광고가 게재되는 등 신흥 부유층이 형성되고 있다”며 “지금의 북한은 러시아의 15년 전 상황과 무척 흡사하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10∼20년 후에는 북한도 결국 시장경제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획경제는 거의 사라졌다. 북한경제는 이제 국가소요경제, 합작경제, 시장경제체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최근에는 블랙마켓마저 구축돼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필을 일컬어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자칫 수필문학을 모독하는 언사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마무리 인터뷰를 피차 부담이 덜한 ‘수필’처럼 진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인터뷰 장소로는 아무래도 포도주라도 한 잔쯤 곁들일 수 있는 식당이 좋을 듯싶어 “아는 식당이 있냐?”고 물었더니,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두레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기왕이면 인터뷰를 주선한 김창수 시드니 총영사도 함께하고 싶어서 연락했더니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간간이 질문도 던져 필자의 부담을 덜어줬다.
시간의 흐름이나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대답하는, 문자 그대로 방담(放談)이 이뤄졌다.
-한국음식 중에서 어떤 걸 제일 좋아하나.
“두말할 나위 없이 김치다. 특히 김창수 총영사 댁의 김치가 기막히게 맛있어서 실컷 얻어먹고 집에 돌아갈 때 한 보따리 싸간다. 내가 한인촌을 자주 어슬렁거리는 것도 김치 때문이다.”
-언젠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은 이라크나 이란과 다르다. 그들은 대화를 원하며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이 미국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의미인가.
“북한은 체제존립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미국과 계속 대화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러시아의 북한 전문가들은 미국 외의 국가들이 나서서 북한의 변화를 도와주면서 독립국가로서 인정받게 하는 것만이 북한이 아시아의 안정과 세계자유주의 증진에 기여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북한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난 50년 동안 변한 것보다 더 많이 변했다”고 주장했는데,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시작됐나.
“나는 2002년 북한이 개혁정책을 표방하기 전에도 그런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김정일은 자기가 계획한 일을 변함없이 추진하는 사람이다. 지금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이미 1990년대부터 준비된 것이다.”
북한판 ‘마셜 플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소련 시절에 건설된 북한 내 기업이 한국의 협력으로 재건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인가.
“러시아는 북한에 있는 구소련시대의 산업시설을 남한의 자본과 러시아의 전문기술을 합해 개선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구소련은 북한에 70여 개의 산업시설(주로 전기·철강 등 중공업 분야)을 건설한 실적이 있다. 또한 북한과 몇 가지 장기적인 협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한반도 관통 철도사업(Trans Korea Railroad)’인데, 우리는 이미 수억 루블을 그 사업의 현장연구와 준비과정에 투자했다. 다음 단계의 투자가 원활하도록 남한의 전략적인 결정(자본투자)이 뒤따르기를 바란다. 그게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부채상환이 돼도 좋을 것이다(“Maybe even as Russian repayment of debt to Korea”).
에너지 분야에서의 공동(협조)사업도 매우 희망적이다. 러시아는 극동과 남북한을 일원화하는 에너지 구축망 건설을 원하고 있다. 올해 2월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한 및 러시아의 ‘3자 회담’이 열렸다. 러시아의 가스를 남북한에 공급하는 문제도 수년에 걸쳐 논의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러시아의 주정부 업체인 가스포름의 회장이 가스공급관 설치 가능성과 또 다른 관련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평소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확대해 북한을 더욱 믿을 수 있는 협상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남한의 대북 강경론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른 것이다.
“나는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이 남한에서 국내문제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논평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학자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남북한의 협조가 증진되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선 남한이 새 기술이나 경영 또는 국제적인 사업경험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북한을 도와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사회도 북한 돕기에 나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원조나 도움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북한 경제발전의 단계와 목표를 분명하게 구분한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2003년 11월 나는 그것을 가칭 ‘북한판 마셜 플랜’이라고 불렀다. 남한은 이 계획을 준비하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해야 하며 국제사회의 참여를 이끌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2004년에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 대해 한마디 언급해달라.
“러시아와 한국의 2004년 정상회담은 우리가 몇 해 동안 열망하던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러시아와 남한이 국교를 맺은 이후 가장 결단력 있고 거시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다. 핵문제를 포함한 한국의 현안에 대한 상호이해도 정상회담에서 전례가 없는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남아공의 선택’
-러시아의 대(對) 한반도 정책의 핵심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참여한 한반도 평화정책에 힘입어 북한이 국제적 협조 속에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한반도 주변정세가 안정돼야 하고 안보가 확실히 보장돼야 한다. 그것은 한반도 문제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한국의 통일이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발전을 불러오는 것이라면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국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상반된 상황도 우려하고 있다.”
-북핵문제와 관련해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이며, 해결방안과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해달라.
“북한은 핵무기를 북한체제의 존속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긴다. 북한이 단순히 안보나 원조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핵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정말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고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정립한 다음에야 핵에 의한 견제가 필요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남아공의 선택’이라고 부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동안 핵무기를 국제적인 협상카드로 활용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어지자 지체 없이 폐기했다.”
-25년 동안 북한을 연구해온 학자의 시각에서 북한은 얼마나 변했고, 또 앞으로 얼마나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비록 1998년 후반부터 (러시아의 전문가들이 느끼기에는) 수면 아래에서 미묘한 흐름이 있었지만, 1998년 9월 헌법개정을 통해 김정일이 국가 수반으로 공식 추대된 후 변화의 전환점이 마련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경제체제도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서 주(道)정부 분야, 정부와 자본가가 공동 참여하는 개방주도 분야, 사기업 분야, 그리고 음성경제 분야 등으로 구성된 혼합경제 체제로 바뀌었다.
사상면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 중심의 공산주의에서 국수공산주의(國粹共産主義·단군사상 또는 번영하는 국가이론)로 바뀌고 있다. 정치구조도 당 중심에서 군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전체주의에서 벗어나 독재주의로 변화되는 조짐도 있다. 외교정책의 우선순위가 ‘국가적 자유화투쟁’에서 세계, 특히 서방과 간격을 줄이는 실질적인 목표로 옮겨졌다. 남북한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든다.”
-2005년 현재 남북한의 차이를 어떻게 보고 있나.
“남한과 북한은 한 나라에서 쪼개진 개체들이다. 그래서 기질이나 전통이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구조 측면에서 서로 너무 멀어진 상태다. 남북한 두 나라 모두 내가 방문한 여러 나라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공상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내 느낌은 두 나라가 우주의 다른 행성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내부 논리와 자부심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생활환경이나 국민의 정신세계, 사고방식, 취미가 다르고, 언어도 이질감이 심화돼 있다. 그것은 꼭 쌍둥이 형제가 어릴 때 헤어져 다른 조건에서 자라난 것과 같다. 심지어 다른 시대에서 성장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집단 탈북은 바람직하지 않아
-2005년 초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앞으로는 다수의 탈북자가 한꺼번에 이송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우선 나는 최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인사들 중에서 (일선에서 물러난 임동원씨를 제외하면) 정동영 장관을 가장 주목하고 있다. 그는 현재 책임 있는 위치에서 남북한의 미래에 대해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다. 그 점 때문에 언젠가는 그가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을 거라고 예상하는데, 이 시점에서 그의 의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소위 북한 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대부분은 경제적 목적의 이주민인데, 이는 세계적인 추세다. 물론 정치적 망명자나 형벌체제를 피해 탈출한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상황이 너무 극화돼 있고 정치화됐다는 것이다. 난민문제는 공산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한 심리적인 전쟁에서 압력의 도구로 사용돼 왔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톨로라야 총영사는 시드니에 있는 한국 음식점 ‘두레’를 즐겨 찾는다.
-정 장관은 “북한체제의 변형에 반대하지 않는다”고도 했는데….
“강요로 이뤄진 변화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랫동안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변화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특히 많이 의심 받으면서 코너에 몰려 있는 북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4월13일 호주 NSW주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북한관계자 환영리셉션에 초청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관계자들이 주최하는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그런 일들은 그들이 국제사회로 나오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식량난은 어떻게 보나.
“북한은 해마다 농업을 ‘최우선 과업’으로 선언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자연환경이 열악해 식량의 자급자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농업 발전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농업기술이나 농업작물을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엔 북한이 식량을 수입할 만한 국가 수입을 창출할 수 있도록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한다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의 연장이며 또한 햇볕정책을 발전시킨 정책인데, 시기적으로도 알맞고 생산적인 측면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의 공식 입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남북한의 화해와 협조를 적극 지지한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에 대해 남한 안에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의 역사적인 운명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권의 세대교체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즉 사회의 중심세력이 서로 싸우던 전쟁세대에서 전후세대로 바뀌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고려인들(재 러시아동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은 어떤 것인가.
“러시아에는 지금 100개 이상의 민족이 있다. 러시아 정부는 그들을 모두 자국민으로 보고 있으며 출신국가별로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소수민족이 그들만의 문화, 언어, 국가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뛰어난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작업태도, 사업기술, 농수개발 등은 러시아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던 남한과의 교류가 정상화되면서 러시아에 있는 한국교민사회와 남한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비록 러시아 한국인의 조상은 북한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김정일 체제는 민주주의 향한 디딤돌
-김정일 체제와 김일성 체제를 체제의 안정성과 건강성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김일성 체제는 스탈린식의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으로 역사적 퇴행이었다. 김정일은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발걸음이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반 두 번 평양에서 근무했는데, 평양의 외교타운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 있었나.
“평양의 외교관은 숫자도 적고 매우 고립된 채 살고 있다. 지금은 과거보다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렵다. 또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고 여행하기도 쉽지 않다. 생활수준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1970∼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그나마 이주·이동의 자유가 신장됐고, 사람들과 사귀는 기회도 많아졌으며, 편의시설이나 오락·유흥시설을 비교적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1980년대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어떠했나.
“1960∼70년대 평양은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 전략의 연장선에서 1984년 소련에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핵 분야에서의 협조는 오로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준수한다는 조건으로 두 곳에 경수로를 건설하기로 약속했고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그 준비작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물을 지금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활용하고 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시 서울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는데, 모스크바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었나.
“김일성 사후 북한이 붕괴하리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신중한 전문가들은 이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인사들과 여러 차례 입씨름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런 예측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를 기계적으로 북한에 적용한 결과다. 그러나 북한은 일종의 관료계급사회로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외부의 압력을 상당히 잘 견뎌낼 뿐만 아니라 내부의 압력도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안다.”
낙지볶음과 빅토르 최
인터뷰는 늦은 시각까지 계속됐다. 인터뷰 중간에 한국에서 온 가수 박강성이 방문했다. 시드니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공연(‘신동아’ 2005년 3월호 600쪽 참조)에 출연할 박강성이 북한의 현실을 알기 위해 톨로라야 박사를 찾은 것이다.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한 톨로라야 박사는 한국음식점 두레식당에서 가장 매운 음식인 낙지볶음을 주문해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인터뷰 중간에 그가 피아노를 연주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독한 음악 애호가’다. 특히 하드록을 좋아해, 시드니에서 열리는 하드록 공연을 즐겨 관람한다. 러시아 한인동포 출신으로 요절한 록 가수 빅토르 최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평양에서 근무할 때 러시아에서 온 하드록 그룹과 함께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질 때 그는 북한 인공기가 표지에 그려진 붉은색 책 한 권을 필자에게 건넸다. 2003년 말 뉴질랜드에서 발간된 ‘북한의 위기와 그후(The North Korean Crisis and Beyond)’라는 제목의 공저 책자였다. 그 중에서 톨로라야 총영사가 집필한 ‘북한의 정권교체냐, 아니면 정권내부의 변화냐?(Regime Change or Regime Trans-formation?)’라는 제목의 글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대목이 많았다. 그 글은 북한문제에 대한 필자의 인식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이끌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