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왕좌의 게임’으로 본 2020 美 대선 삼국지

자기생존주의 vs 중도적 개혁가 vs 새로운 혁신가

  •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nsfsr@khu.ac.kr

    입력2019-07-31 14: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차기 美 대선, 글로벌 정치 미래와 기후 위기 분기점

    • 자기생존주의 트럼프, 재선 후 목표는 ‘검찰 기소 피하기’ ‘가문의 영광’

    • 새 혁신파 목표 ‘프랭클린 루스벨트 2.0 시대’ ‘그린 뉴딜’

    • 중도개혁파 목표 ‘오바마 없는 단조로운 오바마 시대’

    • 누가 집권하건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 양상 바뀔 것

    (왼쪽부터)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카밀라 해리스

    (왼쪽부터)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카밀라 해리스

    2020년 미국 대선 레이스의 막이 올랐다. 반격을 노리는 민주당에서는 25명의 주자가 출사표를 던졌다. 공화당에서는 현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나선다. 미국 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올해 초 출간된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를 통해 트럼프라는 ‘파괴적 리더’가 탄생하는 과정과 전조를 면밀히 추적했다. 그는 영화와 정치, 철학을 넘나드는 융합적 접근법으로 ‘트럼프 시대’에 대한 또 하나의 독해법을 제공했다. 안 교수가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빗대 내년 미국 대선의 의미를 심층 해부했다. [편집자 주]

    전 세계 ‘덕후’들의 진한 아쉬움 속에 미국 HBO의 드라마 시리즈 ‘왕좌의 게임’이 종영했다. 하지만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이 드라마의 바탕이 된 원작 소설의 결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왕좌의 게임’의 현실 버전인 정치 게임의 시나리오도 아직 진행형이다. 

    다가오는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그 미래 줄거리를 규정하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왕좌의 게임’에 담긴 심오하고 풍부한 은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단연코 2020년 정치 게임 드라마를 이 시각에서 조망할 수밖에 없다. 

    ‘왕좌의 게임’은 단지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영웅들의 투쟁 서사가 아니다. 나는 ‘왕좌의 게임’을 한편으로는 ‘정치의 의미(보다 넓게는 인생)’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 생존 기반의 미래에 대한 은유’로 해석한다. 

    정치의 의미란 무엇인가. ‘왕좌의 게임’은 극단적인 자기생존주의자(세르세이 여왕), 중도적 개혁가(존 스노), 새로운 혁신가(아리아 스타크)의 대결이란 점에서 미래 정치 게임이다(급진주의의 한 유형인 ‘자코뱅주의자’ 대너리스 여왕 유형은 미국 대선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아 배제했는데 그녀의 팬들에게 이해를 구한다).



    저승사자의 소환장

    인류 생존 기반의 미래란 무엇인가. 인류가 국가별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죽을힘’을 다해 기후 파국과 싸우지 않으면 결국 패배해 대멸종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은유(겨울이 온다)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 생존 게임이다. 

    마찬가지로 2020년 미국 대선은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 간 권좌 투쟁이 아니다. 이번 대선은 미국, 나아가 글로벌 정치의 미래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극단적 자기생존주의자(트럼프와 그의 가족), 중도적 개혁가(오바마 2.0 그룹), 새로운 혁신가(뉴딜 2.0 그룹) 간 싸움이다. 

    다른 한편으로 2020년은 다가오는 6번째 대멸종의 겨울(기후변화에 따른 파국) 앞에서 인류가 과연 함께 싸울 수 있을지 결정하는 전환점이다.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미 지난해 초에 2020년까지 인류는 기존 발전주의 경로를 급격히 바꿔야 한다는 적색경보를 발령한 바 있다. 

    올해 5월 호주에서 발간된 ‘기후 위기에 대한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 보고서’는 2020년에서 2030년 사이에 전시 수준의 동원 노력이 없다면 전 세계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빠르게는 2050년경부터 기후 위기 탓에 재앙 수준으로 변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중요한 대선이 미국 역사에서 또 있었을까? 

    만약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이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물론 ‘지옥의 사자’와 같은 뉴욕 연방검찰청 등의 기소를 재임(再任)을 통해 4년간 더 피할 수 있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지금까지 트럼프는 뮬러 특검의 칼날을 대통령직을 활용한 수사 방해와 공화당 주도 상원의 협조, 뮬러 개인의 신중함 등 요행에 기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간인 신분이 되는 순간 트럼프와 그의 가족은 ‘저승사자의 소환장’을 피할 길이 없다. 

    흔히 미국 대통령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상식적인 가설이 있다. 재선 이후 대통령의 목표는 ‘역사 속에서 위대한 흔적 남기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역사학자들의 순위 매기기에서 몇 위인지 매우 궁금해 측근과 심층 토론까지 하곤 했다고 한다. 재선 이후 트럼프는 어떨까? 

    트럼프는 이 점에서도 일반적 대통령들과 조금 다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역사 속 위치가 아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매일 자신을 칭송하는지 여부와 자신의 브랜드 가치다. 특히 재선에 성공한 후 트럼프의 관심사는 임기가 끝난 뒤 감히 뉴욕 연방검찰청 등이 그와 가족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대중의 지대한 사랑을 받는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자기 브랜드 구축 전략

    아마 트럼프가 생각하는 세 가지 브랜드 구축 전략은 한반도나 중동에서의 성과를 통한 노벨평화상 수상과 보수적 대법원의 영구적 지배, 그리고 일자리 대통령일 것이다. 임기 중 이 세 가지를 이룬 대통령이 설령 민간인 신분이 되더라도 검찰이 건드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트럼프의 숨은 셈법이다. 

    2020년 이후에는 트럼프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와 그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에 더 주목해야 한다. 나는 6월 30일 판문점에서 이뤄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격적 만남에는 이방카와 쿠슈너의 역할도 있었다고 추측한다. 

    사실 트럼프의 귀를 둘러싸고 두 진영이 오늘도 치열하게 다툰다. 하나는 트럼프의 극단적이고 강경한 본능과 궤를 같이하는 호전주의(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등) 진영이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실용주의적이고 ‘돈 냄새’를 맡는 귀신같은 본능과 궤를 같이하는 현실주의(이방카와 쿠슈너 등) 진영이다. 

    이방카와 쿠슈너는 중동과 한반도 지형 재편을 통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이들 부부의 활약이 자기 가문의 지속적인 영광과 추후 검찰 기소를 피할 좋은 포석이 될 수 있다. 다만, 트럼프는 지나치게 셈법에 밝고 냉정한 사위가 나중에 자신보다 더 경제적으로 잘나갈까 걱정일 뿐이다.

    혼돈의 세계와 서구 자유주의 세력

     2019년 6월 18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대선 출정식. [동아일보 박용 특파원]

    2019년 6월 18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대선 출정식. [동아일보 박용 특파원]

    하지만 트럼프 개인의 욕망과 동기가 아니라 국제정치학의 틀로 트럼프 재집권의 의미를 요약할 순 없을까? 물론 위에서 언급한 트럼프 개인의 목표와 그것이 국제정치에서 실제로 갖는 함의는 다르다. 

    트럼프의 의도와 무관하게 재선 후 ‘트럼프 2기’는 미국이 공들여 만든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물론 국내의 민주공화국 제도에 더욱 깊은 자상(刺傷)을 남길 어두운 시기가 될 것 같다. 그래도 집권 1기 때는 재선이라는 목표 덕분에 트럼프의 파괴적 욕망이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었다. 연방정부 폐쇄 조치(셧다운) 사태에서의 굴복, 미·중 무역분쟁 일시 봉합, 이란 미사일 공격 명령 철회 등에서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는 쉽게 물러났다. 이는 모두 재선을 염두에 두고 결정된 일이다. 

    2020년까지 재선이라는 목표보다 더 우위에 있는 건 트럼프에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후 트럼프의 파괴적 욕망과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신봉,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강경 보수주의 세력을 누가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장 효과적인 제어판은 노벨평화상과 경제 호황에 대한 트럼프의 성취욕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심한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일 집권 2기에는 트럼프가 동맹과 적을 상대로 마구 휘두르는 칼날에 베인 ‘제도적인 부상자’가 국내외에 즐비하게 생겨날 수 있다. 만약 영국에서 ‘트럼프주의자’인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까지 총리로 당선되면 어떻게 될까. 트럼프주의 신봉자인 트럼프 자신, 존슨,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삼각연대가 만들어낼 혼돈의 세계는 서구 자유주의 세력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2기의 트럼프가 ‘왕좌의 게임’ 결말에 그려진 세르세이 여왕의 비극적 최후처럼, 세상의 파괴적 혼돈만이 아니라 결국 자기 파괴의 결말에 이를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왕좌의 게임’의 다소 달콤한 결말과 달리, 오늘날 세계에 드리운 ‘우주의 기운’은 그리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야기로 쏠리진 않은 것 같다. 과거 클린턴 대통령의 별명은 ‘펀치 백’이었다. 아무리 맞아도 다시 더 큰 탄력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 별명을 트럼프가 물려받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수성과 창업

    2019년 6월 26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에이드리엔 아슈트센터에서 열린 민주당의 첫 대통령 후보 TV토론회에서 경선 후보 10명이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 팀 라이언 하원의원, 훌리안 카스트로 전 주택도시개발 장관, 코리 부커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 제이 인즐리 워싱턴 주지사, 존 덜레이니 전 하원의원. [AP=뉴시스]

    2019년 6월 26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에이드리엔 아슈트센터에서 열린 민주당의 첫 대통령 후보 TV토론회에서 경선 후보 10명이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 팀 라이언 하원의원, 훌리안 카스트로 전 주택도시개발 장관, 코리 부커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 제이 인즐리 워싱턴 주지사, 존 덜레이니 전 하원의원. [AP=뉴시스]

    ‘왕좌의 게임’에서 아리아는 자신의 언니 산사와 달리 그저 좋았던 시절을 수성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미래학자인 박성원 박사는 이를 수성 모델과 다른 창업 모델이라고 흥미롭게 유형화한 바 있다. 오늘날 카말라 해리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매리안 윌리엄슨, 제이 인슬리 등 소위 진보파 대선후보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후보 간 이념적 스펙트럼은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기존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대혁신이자 새로운 길이다. 

    물론 이 창업의 모범은 과거에 이미 존재했다. 미국 진보의 황금기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딜 시대다. 루스벨트는 비록 귀족주의적 기질의 리버럴이었지만 진보주의 운동의 대폭발과 ‘레닌 모델’과의 절박한 싸움 속에서 새로운 길로 뉴딜 노선을 추구했다. 그 핵심은 노동과 자본의 균형 복원 및 케인스주의적 사회 투자 국가다. 국제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국제 통화체제를 통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구축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는 오늘날 혁신의 귀감이지만 지금 진보주의 후보들의 야심은 이를 훨씬 넘어선다. 당시 뉴딜주의는 일부 주에서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구축하는 정도였지, 기본적으로 미국적 진보주의 수위를 넘지 않았다. 

    반대로 지금 진보주의 후보들은 민주당 노선 전반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하는 데 관심이 크다. 이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진보적 사회운동 기반의 정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들을 배제한 뉴딜과 달리, 무지개 인종연합 등을 통한 더 다양하고 더 평등한 미국을 추구한다. 특히 뉴딜 노선과의 결정적 차이는 기후 위기에 대한 전시 수준의 비상조치 대응 노선에 있다. 

    외교안보 노선에서도 이들은 큰 전환을 추구한다. 미국의 협소한 이익을 추구하는 노선 대신에 이들은 ‘그린 뉴딜’의 지구적 연합(신마셜 플랜)과 동맹 구축에 주력하려 한다. 중국에 대해서도 난폭한 패권 경쟁과 개입주의 노선 대신에 절제된 개입 및 노동과 인권 등 보편주의적 규범 준수에 대한 압박과 기후 위기 협력을 동시에 추구한다. 따라서 한반도 노선과 관련해서도 좀 더 보편주의적 어젠다로 북한을 압박하려 할 것이다. 

    이들 뉴딜 2.0 노선의 그린 뉴딜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 이는 어디까지나 지구적 운동의 성장 여부와 의회에서의 지형 변화와 연계돼 있다. 뉴딜의 성공은 폭발적 대중운동이 루스벨트를 압박한 효과다. 하지만 국가 내 민생 이슈보다 기후 위기 이슈는 그 지구적 성격상 대중 동원과 국제협력이 훨씬 더 어렵다. 

    만약 미국의 선라이즈 운동, 영국의 멸종 반란 운동이 대규모 촛불 운동으로 발전하고 동시에 국제적 혁신 자본이 신재생에너지 동맹을 강고히 발전시킨다면 이들의 미래는 밝다. 마치 뉴딜 혁명 초기 노동과 일부 국제주의 자본의 연합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길의 지구적 시대가 열릴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하다. 이미 퇴조기 사이클에 접어든 미국 내 망가진 정치 지형과 유럽과 일본 등의 파시즘적 세력의 성장, 중국의 신권위주의적 개발 체제의 잔존 등을 고려할 때 왕좌의 게임에서와 같은 대규모 협력의 전망은 밝지 않다. ‘왕좌의 게임’ 드라마에서조차 기후 파국 앞에서 ‘세르세이파’는 함께 하기를 선택하기보다는 협력파들이 기진맥진하길 기다렸지 않은가.

    존 스노와 버락 오바마

    위의 창업파에 비하면 중도적 개혁파의 목표는 다소 싱겁다. 즉 오바마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창업파에 비하면 현실성이 더 높다. 미국 민주당 유권자만이 아니라, 미국 시민 전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일단은 혁신가 아리아 스타크의 ‘새로운 불확실한 여정’보다 중도적 개혁가 존 스노의 ‘품위 있고 충실한 관리자 ’역할에 좀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다. 

    민주당 유권자층에서도 이들은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바이든 전 부통령은 마치 존 스노처럼 ‘트럼프만 없는 품위 있는 세상’을 대선의 테마로 삼았다. 이 진영에는 바이든을 비롯해 피트 부트저지, 코리 부커, 베토 오로크 등이 속한다. 이들은 민주당 내 중도적 성향 및 개혁적 공화당 유권자층에 폭넓게 어필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오바마가 등장할 때처럼 유권자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트럼프 시절 망가진 오바마의 중도개혁 노선과 좀 더 절제된 외교안보 노선으로의 복원은 현실감은 있지만 뜨거움이 약하다. 사실 오바마 시대에 대한 민주당 유권자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대통령 3선을 금지한 헌법의 제약이 없고, 오바마가 다시 출마한다면 얼마든지 표를 줄 자세가 돼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보다 솔직한 심정을 물으면 도대체 오바마가 국내외적으로 크게 이룬 게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존 스노는 세르세이 여왕(자기생존주의자)을 꺾고 새 왕권을 세웠다. 오바마도 공화당 후보를 두 번이나 물리치고 민주당 정부를 세웠다. 그런데 스노와 오바마는 그 처절한 승리 후 무얼 건설하고자 했는가? 

    물론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안 성취는 오늘날 ‘비토크라시’(거부권 정치)의 미국 정치 지형에서 큰 성과다. 하지만 이 개혁안은 ‘민주당안’이 아니라 공화당 성향의 어젠다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주도한 성과도 작지 않다. 하지만 이는 선언일 뿐이지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협약은 아니다. 

    그저 일단 트럼프를 내려오게 하고 품위 있고 지혜로운 관리자 시절을 추구하기에는 지금 보통 사람들의 삶은 너무 고달프고 기후 재앙의 열기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에 대한 비상조치와 점진주의 및 절차주의는 사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한반도 왕좌의 게임’의 미래

    지금까지 2020년 미국 대선의 의미를 트럼프식 극단적 자기생존주의 진영, 카말라 해리스식 새로운 길, 조 바이든식 중도개혁파의 삼국지 게임으로 살펴봤다. 이 게임은 단지 미국 내 ‘왕좌의 게임’이 아니다. 지구적 정치 지형, 좁게는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과도 긴밀히 연계돼 있다. 

    지면 한계상 여기서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을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간단히 두 가지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누가 집권하든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의 양상이 크게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카오스 시대에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이렇다. 미국이 북한과 상당히 가까이 상호 접근한 지점에서 멈추는 시나리오(미국 민주당 의회 비준이 필요한 직전 단계에서 합의하는 방식)가 있다. 또 미국과 중·러 간 새로운 타협에 의해 미군의 역할이 재조정될 가능성도 있다. 

    다른 하나는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제기되는 어젠다가 2022년 한국 대선에서도 주요한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 대선은 대개 몇 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 대선의 어젠다를 선제적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린 뉴딜(코르테스 하원의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엘리자베스 워런), 기본소득(앤드루 양 IT 사업가)은 2022년 한국 대선을 규정하는 핵심 어젠다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선을 기점으로 단기적으로는 2030년(중기적으로는 2050년)까지 우리는 수많은 새로운 기적과 ‘블랙 스완’(black swan·발생 가능성이 작지만 일어나면 큰 파급효과를 불러오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2020년 미 대선을 대선 자체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된 ‘글로벌 왕좌의 게임 10년 시리즈’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키워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포용적 경로에 대한 논의와 기후 위기에 대한 비상 대응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 대전환기,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상과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미국이나 한국에서 공히 낸시 프레이저 뉴스쿨대 교수의 ‘안토니오 그람시’적 표현처럼 ‘낡은 것은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은 여전히 태어나지 않은’ 궐위(闕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10년의 시나리오 플래닝과 대담한 실천 로드맵을 위한 초당적 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안병진
    ● 1967년생
    ● 서강대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 및 美 뉴스쿨대학원 정치학 박사
    ● 경희대 미래문명원장, 총장실 정책실장
    ● 現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 저서: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예정된 위기’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