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낭만 도시’ 샌프란시스코, ‘약쟁이 천국’ 되다

[잇츠미쿡] 법 하나 바꿨을 뿐인데…

  •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前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입력2023-10-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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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 주변 마약 문제 때문에 ‘재택근무’ 권고

    • 절도 경범죄 기준 금액 400달러 → 950달러로 인상

    • 주민들 “마약 소지 투약 처벌 수위 다시 높여라”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위치한 낸시펠로시연방빌딩. [동아DB, Gettyimage]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위치한 낸시펠로시연방빌딩. [동아DB, Gettyimage]

    금문교와 차이나타운을 비롯해 여러 명소가 꾸준히 관광객의 사랑을 받아온 미국 서부의 대표 도시 샌프란시스코.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낭만의 도시’는 지금 홈리스와 마약 문제로 진통을 앓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대낮에도 마약 거래가 횡행하고, 마약에 취한 홈리스족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일상이 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1967년 스콧 매켄지가 노래 ‘샌프란시스코’에서 묘사한 ‘친절한 사람들이 있고 여름이면 사랑이 꽃피는 도시, 설렘이 넘치고 활기가 찬 도시’는 마약으로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마약에 취한 홈리즈족의 천국으로 변모한 데에는 ‘선한 의도’로 만들어진 하나의 법안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한낮 길거리에서 대놓고 투약하는 중독자들

    샌프란시스코 시청을 기준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낸시펠로시연방빌딩(Nancy Pelosi Federal Building). 이 빌딩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8월 초 연방보건복지부로부터 ‘당분간(for the foreseeable future) 재택근무를 권고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연방빌딩 상황을 감안해 한동안 사무실로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일하라는 얘기였다.

    8월 11일자 현지 신문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보도에 따르면, 재택근무를 권고한 이유는 건물 주변의 마약 문제 때문이었다. 전 연방하원의장(한국의 국회의장)이자 샌프란시스코가 지역구인 낸시 펠로시 의원 사무실을 비롯해 보건복지부, 노동부, 교통부, 사회보장국 등 연방정부 기관이 빽빽하게 입주해 있는 18층 규모 연방빌딩이 건물 주변 마약 문제로 인해 출입을 제한한 것이다.

    트위터(트위터명 World Peace Movement)에 샌프란시스코 마약 문제를 고발해 온 대런 스톨컵(Darren Mark Stallcup)은 8월 14일 낸시펠로시연방빌딩 주위를 둘러보며 영상을 촬영해 올렸다. 그가 올린 영상과 글을 보면 연방빌딩 직원들에게 재택근무 권고령이 내려질 만큼 건물 주변엔 대낮에도 ‘좀비 마약’ 펜타닐을 투약한 홈리스가 진을 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도 “마약상 수십 명이 주기적으로 연방빌딩 앞과 옆, 건너편 길에서 교대로 약을 팔고, 약쟁이들은 방금 산 마약을 피우거나 코로 흡입하거나 주사한다”고 보도했다.



    펠로시 의원은 4월 28일 법무부 장관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샌프란시스코를 마약수사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해서 펜타닐 마약 조직과 싸우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트위터 인수 후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있는 트위터 본사에 수시로 출근하는 일론 머스크는 4월 11일 이런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펜타닐을 사는 건 엄청 쉽다. 샌프란시스코에선 사람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펜타닐을) 사고 대낮에 당신 앞에서 투약한다. 숨어서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차를 타고 트위터 본사로 출근하면서 거의 매번 이걸 목격하고 있다.” 펠로시 의원의 서한과 머스크의 트위터 글은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홈리스 마약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보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마약중독자 홈리스에게 공급되는 마약은 대부분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뒤 마약 카르텔의 공급망을 통해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온다. 최종 판매상은 주로 마약 카르텔과 연관돼 있는 온두라스 출신 이민자들이다.

    마약·절도 시달린 기업들, 샌프란시스코에서 철수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문제는 단순히 주거시설 제공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숙소 제공을 거절한 홈리스가 절반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7월 7일 현지방송 KRON4 보도를 보면, 샌프란시스코 시청 직원들이 올해 홈리스 2344명을 찾아가 숙소를 제안했을 때 받아들인 사람은 1065명에 불과했다. 54%는 숙소 제안을 거절했다. 대부분 ‘마약할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아 숙소를 거절한 것으로 해석됐다.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샌프란시스코에 홈리스가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거리에서 마약을 구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문제는 마약 문제와 직결돼 있다. 2022년 샌프란시스코시의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홈리스 인구는 7754명, 그중 4397명(약 57%)이 거리에 살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8월 7일 ‘샌프란시스코가 홈리스 성지인 까닭(Why San Francisco Is a Homeless Mecca)’이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신문은 캘리포니아,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홈리스 마약 문제를 악화시킨 주범으로 2014년 11월 캘리포니아 주민투표에서 통과된 주민발의 47호(Prop. 47)를 거론했다.

    주민발의는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해서 통과시키는 통상적 방식이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법안을 내고 일정 규모의 서명을 받아 선거 때 투표에 부쳐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안전한 동네 학교 법안(The Safe Neighborhoods and School Act)’이란 이름으로 홍보된 주민발의 47호는 민주당의 강성 좌파 진영의 지원을 받으면서 찬성 59.61%, 반대 40.39%로 통과된 캘리포니아 주법이다.

    투표 당시에도 논란이 뜨거웠던 주민발의 47호의 핵심은 절도와 마약 소지 투약 처벌 수위를 크게 낮추는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주 교도소 시설이 포화 상태가 되자 이참에 절도와 마약 범죄 처벌 수위를 낮춰 교도소 포화 문제도 해결하고, 교도소에 투입되는 예산을 줄여 교육 재정 등에 투입하자는 취지였다. 흉악 범죄가 아닌 경우 교화와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개인의 회생 가능성을 높이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주민발의 47호는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매장절도(shoplifting) 범죄의 경우 절도금액 950달러까지는 경범죄(misdemeanor)로 약하게 처벌하도록 했다. 1980년대 이후 경범죄 기준은 절도금액 400달러까지였는데, 물가인상을 감안해 금액을 두 배 이상 올린 것이다. 처벌이 약해지면서 상점들의 피해는 커졌다.

    절도 건수는 최근 들어 줄어든 걸로 나오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현지 언론 샌프란시스코스탠더드 보도를 보면, 20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찰에 보고된 단순 절도 건수는 1만2700건으로 2019년 같은 기간의 1만5300건보다 크게 줄어든 걸로 나온다. 문제는 아예 매장 문을 닫는 곳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약국 겸 식료품점 체인 월그린(Walgreens)은 2021년 샌프란시스코 매장 5곳의 문을 닫았고, 지난해에도 2개 매장 문을 닫았다. 2022년 3월 시내 중심가에 대형 매장을 연 식료품점 홀푸즈마켓은 13개월 만인 2023년 4월 직원 안전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매장절도가 빈번하고 마약중독자들이 인근 거리에서 산 마약을 화장실에서 투약하자 견디다 못해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식료품점 세이프웨이도 5월에 매장 한 곳의 문을 닫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뒀던 회사들도 방을 빼는 곳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글로벌 테크기업 메타(구 페이스북)와 세일즈포스는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을 줄였다. 인력 감축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거환경 악화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부동산 시장조사업체 CBRE에 따르면 2014년 4분기 6.6%였던 샌프란시스코 상업용 사무실 공실률은 2023년 2분기 31.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해로움 줄이기’ 정책이 가져온 부작용

    주민발의 47호는 중죄(felony)였던 마약 소지 투약을 경범죄로 바꿨다. 최장 1년 동안 수감될 수 있고 1000달러까지 벌금을 내야 할 수 있지만 중죄였을 때에 비해 처벌이 가벼워졌다. 중죄라면 2∼3년 감방에 가고 더 많은 벌금을 내야 한다. 마약 소지 투약에 대한 처벌이 가벼워지자 처벌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마약 문제와 관련한 ‘위해 저감(harm reduction·해로움 줄이기)’ 정책을 단순화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마약 투약자를 처벌하거나 비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약 오남용 피해를 줄이고, 안전하게 투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

    저널리스트 에리카 샌드버그는 2020년 9월 14일자 시티저널에 쓴 ‘샌프란시스코 죽음의 연민(San Francisco’s Deathly Compassion)’ 제목의 글에서 마약과 관련한 위해 저감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샌드버그는 마약중독자인 척 빈 가방을 메고 시민단체와 교회 등이 시의 지원을 받아 거리에서 마약중독자에게 물품을 공짜로 제공하는 장소 세 곳을 찾아갔다. 그는 가방에 마약 투약자들이 위생적으로 투약하도록 제공하는 일회용 주사기, 혈관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기구, 펜타닐 흡입을 위한 빨대와 알루미늄 포일, 소독용 알코올 패드와 거즈, 반창고 등을 가득 채웠다. 그가 주사기 170개를 비롯해 다양한 투약 지원 물품으로 가방을 채우는 동안 어느 누구도 ‘치료에 관심 있느냐’고 묻거나 관련 자료를 나눠주지 않았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32년 동안 경찰로 근무한 뒤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제임스 더들리(James Dudley). 그는 6월 12일 샌프란시스코스탠더드 인터뷰에서 “2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마약 관련 범죄에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 투약자나 길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조무래기 마약상을 처벌하려면 많은 경찰력과 행정력이 필요한데, 그렇게 해봤자 경범죄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처벌이 어려워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마약을 투약했다가 경찰에 붙잡혀도 하루 이틀 안에 풀려나는 게 대부분이다. 6월 26일 CBS 방송이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마약 거리 텐더로인 지역에서 펜타닐을 투약한 뒤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한 남성은 “하루이틀 정도 잡아둘지 몰라 걱정했는데 12시간 만에 풀려나 다행이다”라고 인터뷰했다.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홈리스들의 마약 투약과 길거리 마약 거래 처벌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론이 악화하자 5월 30일부터 6월 1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시는 경찰을 동원해 대표적인 마약 거리를 단속했다. 그 결과 마약상 390명을 체포했고 펜타닐 3000만 명 투약 분량(61㎏)을 압수했다. 펜타닐 외에 다른 마약도 95㎏을 압수했다. 값이 싸고 환각 효과가 높고 중독성이 강해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퍼진 ‘좀비 마약’ 펜타닐의 압수량은 2021년 이후 640% 증가했다. 마약 투약 혐의로 58명의 홈리스를 붙잡아 5명은 병원으로 보냈고, 11명은 경범죄로 벌금을 부과했다. 42명은 잠시라도 마약을 투약하지 못하도록 구치소에 가뒀다가 풀어줬다.

    마약을 투약하다가 급사한 홈리스 숫자도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시에서 발표한 마약 남용 사망자 보고서(Report on Accidental Overdose Deaths)에 따르면, 2017년 222명이던 마약 남용 사망자 숫자는 지난해 647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올해 7월 말 현재 473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장소는 텐더로인, 소마 등 시청 주변의 대표적 홈리스 거리가 70% 가량을 차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주민발의 47호 이후 캘리포니아의 홈리스 마약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도시다.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같은 도시 상황도 샌프란시스코와 크게 다르다고 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2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 Berkeley) 정부학연구소(IGS)가 캘리포니아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60%가 넘는 응답자가 주민발의 47호를 개정하는 데 찬성했다. 절도 범죄, 마약 소지 투약 등의 처벌 수위를 낮춘 법을 비판한 응답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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