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합니다.’
‘명상 가지고는 안 되지.’‘스님은 뭘 하십니까?’
‘나는 선(禪)을 하지.’‘명상이나 선이나 같은 것 아닙니까?’
‘명상과 선은 다르지!’‘둘이 어떻게 다릅니까?’
‘삼삼은 팔십일의 소식이 뭐지?’
‘삼삼은 구. 구구는 팔십일이라는 뜻 아닙니까.’
‘틀렸네!’
‘그렇다면 스님이 생각하시는 정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되묻자 스님은 죽비를 내게 사정없이 내리쳤다. 죽비로 대답을 한 것이었다. 보통 스님이 죽비를 내리치면 예의상 순순히 맞는 게 관례이지만 나는 얼른 한 손으로 죽비를 잡았다. 일단 법 거량(擧揚)에 들어가면 예의나 체면은 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스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가 나서 죽비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스님! 지금 화(anger)가 보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숙소에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찝찝했다. 개운하지 않고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앙금 같은 게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 이 감정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명상했다. 나중에 보니 죽비를 때린 사람도 없고, 죽비를 손으로 잡은 사람도 없음을 깨달았다. 모두 공(空)한 것이다. 계곡에 바람이 한번 휙 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대낮에 닭이 지붕에 올라가 한번 꼬끼오 하고 운 것이었다. 본래는 너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였다. 죽비를 휘두른 사람도 없고, 맞은 사람도 없는 이 상태를 근원의 상태라 생각한다. 이름을 붙여 본다면 ‘관음(觀音)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명상은 바로 근원의 마음을 찾는 일이다. 물론 명상이나 선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때를 벗기는 물소리

한바다 선생이 머물고 있는 지리산 피아골의 산골산장.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잘 들려 근원의 마음을 찾는 데 유용하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마다 성격과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도 각기 다르다. 내가 효험을 본 방법은 소리다.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소리에 마음을 집중한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에 마음이 항상 왔다갔다하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근원의 마음으로 소급해갈 수 없다. 따라서 일상적인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물소리다. 귀로 들리는 물소리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상념들을 잠시 잊게 된다. 어느 순간 나와 물소리가 하나가 된다. 마음의 움직임이 멎으면서 내면(靈性) 세계가 열린다. 본래 마음을 회복한다고 할 수 있다. 내단학(內丹學)에서 말하는 수승화강(水昇火降)도 이 상태를 가리킨다.
계곡에서 철철 흐르는 물소리를 계속 듣다보면 번뇌가 말끔히 씻긴다. 그러면 우리의 깊은 마음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소리는 마음을 때를 벗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목욕이 중요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매일 목욕할 수 없었지만 목욕이 갖는 의미는 매우 깊었다. 목욕은 성스러운 행사에 가까웠다. 마음의 때를 벗기고 거듭난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洗禮)의 진정한 의미기도 하다.
지리산 피아골처럼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잘 들리는 곳이 근원의 마음을 찾는 데 유용하다. 이 ‘산골산장’도 물소리를 듣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산장 주위를 감아돌면서 물이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근원의 마음을 찾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계곡에서 며칠씩 머물러야 한다. 밤낮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쉬다 보면 근원의 마음이 느껴진다. 잠을 자면서도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