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기 만드는 과정은 힘도 들지만, 줄곧 집중해야 한다. 옹기장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고 만다.
“언제부터 이 마을이 옹기마을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저희 집안만 해도 옹기 일을 해온 지 6대째가 되는지 7대째가 되는지 잘 모르는걸요. 제가 듣기로는 옹기마을이 된 지 700년쯤 된다고 해요. 옹기를 만드는 집도 많았지만 옹기를 직접 만들어 굽지 않는 집이라도 옹기를 팔거나 가마를 관리하거나, 어쨌든 모두 옹기와 관련된 일로 먹고살았죠. 저의 외가도 처가도 모두 옹기를 굽던 옹기장이 집이었습니다.”
강진이 어떤 곳인가. 부안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비색이 탄생한 곳이다. 강진군이 ‘고려청자 발생지’로 발굴, 새 단장하고 매년 청자 축제를 여는 곳이 이곳 봉황리에서 불과 7~8km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 더 올라가서는 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도자(陶磁)의 맥은 2000년대 초반 발굴된 칠량 삼흥리의 가마터에서도 확인되었다. 가마터 17곳에서는 청자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의 세련된 도기(옹기)와 기와가 대량 출토되었다.
“제가 젊었을 적에 어른들이 이곳은 옹기가 더 오래됐다, 청자가 더 오래됐다고 말씨름을 하시곤 했습니다. 여기서는 옹기와 사기(자기)가 함께 발전해온 것 같아요.”
그릇 기술의 역사로 보면 청자 등 자기가 도기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지만, 자기와 도기의 기술은 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왔다. 도기와 자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재료인 흙의 재질과 굽는 온도인데, 부드럽고 차진 흙에 자기보다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도기에 속하는 옹기는 신석기시대 등장한 토기의 성격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역사 깊은 그릇이라고 정윤석 옹기장은 말한다.
“빗살무늬토기부터 시작된, 흙으로 만든 그릇의 역사가 옹기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자기는 오래전에 이미 예술품이 되었지만 옹기는 아직도 실생활에 쓰이는 그릇 그대로의 효능을 가지고 있지요.”
원수 집에 쳐들어가 장독부터 부수는 이유
그의 말처럼 옹기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매우 다양하게 써왔다. 소중하고 귀한 술이나 장도 옹기 독에 담아 보관했지만 똥을 담는 똥항아리와 똥거름을 나르는 똥장군까지, 옹기는 신성한 것에서 아주 일상적인 데까지 두루 쓰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굿할 때 상차림은 꼭 옹기로만 쓰기도 한다.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는 종종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안방과 사랑방을 차지해왔으나 정신적인 면, 영적인 성격은 오히려 옹기가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 보면, 집안끼리 싸움이 나거나 원수의 집에 들어가 맨 처음 하는 일이 그 집 장독대의 독부터 깨는 일이었다. 간장이나 된장은 몇 년씩 두고 먹는 음식의 기본재료여서 현실적으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장독대가 깨지는 것은 곧 그 집안이 망하는 것을 상징한다. 장을 담글 때도 옛사람들은 삼가는 마음으로 담갔다. 우선 좋은 날을 잡아 목욕재계했고, 장이 익어갈 때면 독에 솔가지를 걸어두고 버선을 거꾸로 붙여 부정을 막았다. 그뿐인가. 장독대는 우리 어머니들의 기도처였다.
이렇게 장독이 영험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옹기로 만든 그릇에서 익는 장과 술, 식초 등 발효식품이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이 아니라 옹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옛사람들은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며, 정치가 문란해지면 술맛이 망가진다고 보았으니, 이는 장과 술을 담글 때 정성을 다 기울일 수 있다면 이미 그 집안과 사회는 안정되고 풍족한 세상이라는 뜻일 게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영적인 심성을 담고 있는 귀한 옹기의 전통이 정윤석의 대(代)에 이르러 자칫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아니, 그는 옹기가 한창 잘나가는 시절부터 옹기가 빠른 속도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시기,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오늘날까지 옹기의 부침을 모두 겪어냈다. 그리고 그 부침의 물결 따라 옹기장이 정윤석의 인생도 함께 흔들려왔다.
그가 처음 옹기에 입문한 것은 열여섯 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도중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보다 2년 늦게 졸업하게 됐습니다. 선생님들도 중학교 진학을 적극 권하셨지만, 형편이 안 되는 바람에….”
공부를 잘했던 그로서는 공부를 포기하기가 아까웠을 것이다. 그는 젊은 호기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면 공부할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그러나 서울 영등포역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부닥친 광경은 어지러운 서울거리였다. 그는 이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듯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당시 영등포역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저를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
그가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여관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하숙보기’로, 영등포역에 나가 여관에 묵을 손님을 데리고 오는 호객 일이었다. 그나마 일자리는 잡은 셈인데, 칠량 아름다운 바닷가에 살던 소년은 난장판인 영등포역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곧 고향과 가족, 동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