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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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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왕세자와 아일라 위스키
그러면서도 총각 시절에는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길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결혼만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 젊고 순진한 여자와 해야 한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운트배튼은 찰스의 배우자로 자기의 손녀 아만다를 적극 추천했다. 몇 차례의 예비 작업을 거쳐 1978년 찰스와 아만다가 함께 인도로 여행 가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구설수를 염려한 양가 부모의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이듬해(1979) 그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그의 요트에 몰래 장착해놓은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그 후 인도 여행을 마치고 온 찰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만다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다. 그러나 폭파 사건으로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막냇동생 등 가족을 잃은 충격에 휩싸인 아만다는 왕실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결국 1981년 7월 29일, 찰스는 세인트폴 성당에서 스펜서 백작 가문의 딸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이애나는 20세의 처녀로 찰스와는 12살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1977년에 다이애나의 집에서 처음 만났고, 찰스가 연정을 느끼게 된 것은 1980년 여름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위 증언에 의하면 찰스는 그렇게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다이애나도 찰스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의 교제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자, 아버지인 필립 공이 찰스에게 ‘네가 어떻든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녀의 명예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충고했다.

결혼 이듬해 장남 윌리엄이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84년 차남 헨리가 출생할 때까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고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1985년에 접어들면서 깊은 갈등과 불화의 단서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 찰스의 오랜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볼스(1947년생)가 갈등의 원인이었다. 찰스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생활이 아니라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르는 일종의 통과의식이었던 모양이다.

찰스는 왕세자비의 자리를 메워줄 고분고분한 여자를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다이애나는 의외로 자의식이 강했다. 그녀는 찰스가 과거의 왕처럼 다른 애인을 두고 버젓이 공적 활동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990년대 초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가 매스컴을 통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다이애나는 한 작가에게 자신의 암담한 결혼생활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을 쓰도록 했다. 결국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국회에서 왕세자 부부의 공식 별거를 발표하게 되었다. 같은 해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가 1989년에 나눈 사적인 전화 통화내용이 도청 자료로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다이애나의 죽음, 찰스의 재혼

1995년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BBC의 시사프로 ‘파노라마’와 인터뷰한 다이애나가 과거 그녀의 승마교관이었던 전 육군 소령 제임스 휴이트(1958년생)와 혼외정사를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자 다이애나의 둘째아들인 해리 왕자가 휴이트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에 대해 휴이트는 훗날 다이애나와의 만남은 해리를 출산하고 난 다음부터라고 밝힘으로써 소문은 공식 부정되었다.

찰스의 한심한 행태와 다이애나의 충격적인 고백에 분노한 엘리자베스 2세는 그해 12월 정식으로 이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그 이듬해인 1996년 8월 28일, 정식으로 이혼을 발표했다. 그 후 다이애나는 세계를 무대로 적극적인 봉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창 활동하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한 지하차도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이집트 출신 백만장자의 아들인 도디 파예드(1955~1997)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찰스 왕세자는 2005년 4월 9일 윈저성의 성공회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오랜 연인 카밀라와 결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만일 찰스가 영국 왕에 즉위하면 카밀라를 정식 왕비(Queen Consort)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원이 공식적으로 반대했고 국민의 반대 여론도 강해 현재는 찰스가 왕위에 올라도 카밀라는 왕비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왕의 배우자라는 의미를 지닌 ‘빈(Princess consort)’으로 부르기로 결정된 상태다.

한량 기질을 가지고 있는 찰스에게서 술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 찰스는 우연히 술을 접했다고 한다. 16세로 1964년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 스쿨’에 다닐 때였다. 그는 영국방위군의 일원으로 해군 사관 훈련을 받기 위해 스토나웨이 섬에 가 있었다. 그런데 신문기자 몇 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도망 중에 한 퍼브(pub)를 발견하고 황급히 들어가게 되었다. 퍼브 주인은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찰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술은 ‘체리브랜디(cherry brandy)’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사냥 여행 등에 나섰을 때 양친에게 ‘마시는 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양친은 체리브랜디라고 대답해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아이의 질문에 자세히 대답하는 것이 귀찮아서 체리브랜디라고 한 것이지 항상 그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니다.

체리브랜디를 맛본 찰스는 독하고 이상한 맛에 좋은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은 뒤따라온 신문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엄격한 왕세자 교육 과정에 있던 찰스는 술에 대한 경험을 쌓지 못했다. 술에 대한 경험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술과의 인연에 스카치위스키가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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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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