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역할로 사는 삶과 본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은 다르다. 그에게 매듭은 김은영이라는 자신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매듭을 하는 순간은 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지요.”
더욱이 놀라운 것은, 역할로 사는 삶과 자신으로 사는 삶이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조화를 이뤄왔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삶은 여러 인연의 타래가 얽히고설키며 때로 헝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닥의 실이 질서와 조화를 얻으면 아름다운 매듭으로 완성되듯이 그의 삶도 수많은 인연의 끈을 아름답게 엮어낸 것 같다.
할머니 노리개로 만난 매듭

“어머니의 혼례복을 보면 서울의 붉은 활옷이 아니라 녹색 활옷에 소매에는 색동을 대었어요. 거기다 머리도 네모나게 틀어 올려 목단 꽃으로 장식했고요.”
실제로 이 혼례복은 근대유물로 지정됐다.
“시집오기 전 25년은 할머니 밑에서 개성 사람으로 살았고, 시집오고 난 뒤부터는 시어머니 밑에서 서울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가 제사를 물려주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할머니 교육 덕택인지 모른다. 개성과 서울의 문화는 달랐지만 할머니나 시어머니나 유교를 바탕으로 한 것은 마찬가지여서 그는 시집 전통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신식 교육을 받으면서 유교 전통에 거부감을 가질 법도 한데, 그에게는 그런 거부감을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가 매듭의 아름다움을 처음 접한 것도 할머니의 노리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인사동에 자주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골동품 가게에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노리개를 선물 받았다.
“아버지의 단골 가게였던가봐요. 따님도 오셨냐며 주인이 저에게 노리개를 선뜻 내주더군요. 지금으로 치면 값나가는 건데 말입니다.”
할머니의 노리개를 볼 때도 그랬지만, 자신의 첫 노리개를 봤을 때 그는 ‘사람 손으로 어떻게 이렇듯 곱게 만들었을까’ 하고 신기해했다. 훗날 매듭을 해보자는 마음을 낸 것도 어릴 때 접한 노리개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골동품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둘째 딸인 그는 인사동 나들이의 동반자이자 비서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백자를 사오시면 제가 큰 함지박에 물과 함께 넣고 빨래비누를 풀어서 데웠어요. 그러면 때가 깨끗이 벗겨지거든요.”
첫째 딸인 언니가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받은 딸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이 육군병원에 입원했던 당시 아버지와 함께 병문안을 간 기억이 있다.
“그때는 누군지 모르고 아버지가 화가 친구 병문안 가자고 해서 따라간 거였어요. 이중섭은 뒤로 넘긴 머리에 가운데 가르마가 보이는, 아주 순하고 얌전한 인상이었어요. 아버지가 ‘잘 있었나?’ 하고 물으면 ‘응’ 하고 대답하고 ‘부인 소식은 듣나?’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책상의 먼지만 손으로 잡아냈습니다.”
김광균은 이중섭과 친하게 지내서 이중섭이 죽은 뒤, ‘이중섭을 욕보이지 말라’라는 글도 발표했다. 이중섭이 낙서하듯 그린 그림들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유작처럼 거래하는 세태를 꾸짖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기본 매듭은 서른여덟 가지인데, 그중 열 가지가 기초가 된다. 매듭 이름은 거의 곤충이나 꽃 이름에서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