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최고의 스승은 칭찬과 다양한 체험이었다

  • 박경애 한국청소년상담원 상담교수

    입력2006-12-06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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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거나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잊어버리자. 떡잎부터 알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행동과학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10세 이전의 아동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이며, 끝없이 배우고 자극받으며 창조하는 존재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30명을 면접한 후 내린 결론도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원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행복한 삶’은 성공을 통해서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성공시대’와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의 성공에 대한 기대와 염원이 남다른 한국 부모들이지만 대부분 아무런 준비없이 부모가 되고 그럭저럭 자녀를 기른다. 아이들이 다 성장한 후에야 좋은 부모가 되려면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타까워한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기르는 과정은 인간행동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과학적 지식과 풍부한 경험적 진실의 통합을 요구한다. 즉 좋은 부모가 되려면 꾸준한 연구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0여년 간 청소년상담을 하면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왜곡된 신념, 과도한 기대, 그리고 잘못된 지도로 비뚤어지거나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의욕이 꺾인 청소년들을 많이 보았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직도 아이들의 행복이 성적순이라는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로는 적성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부모는 드물다. 그냥 현재의 체제와 가치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믿고, 생산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창의성이라고 하면서도 태연스럽게 이에 역행하는 단순지식의 습득을 강요한다.

    이것은 그동안 사회적 성공의 잣대였던 우수성(학문적으로는 수월성이라고 함)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거나 잘못됐기 때문이다. 실버만이라는 학자는 “가사와 양육에서 수월성을 발휘하는 여성과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의미있는 공간에서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는 개인의 능력도 수월성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남’을 의미하는 수월성은 반드시 지적인 면이나 특정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어떤 개인이라도 이룰 수 있다. 특히 과거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인간이 보여주는 여러 측면의 능력이 오히려 미래사회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 기대한다. 또한 수월성이란 발견되고 길러지는 것이므로 그만큼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다행히 우리사회에는 인간의 고유성이 무시된 교육제도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하여 괄목할 만한 업적과 창의적 성취를 한 사람이 많다. 이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어떻게 키우고 극대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30명을 선정해 직접 인터뷰하고 그들만의 성취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했다. 여기서 성공이 아닌 성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성공이라 할 수 없는 것도 그가 꿈 꾸던 것을 이루었다면 성취요 성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정기준은 세계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학자,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 벤처기업가, 대중예술가, 그리고 기타 분야에서 독특한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위 우리가 지금까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비중있게 다뤘던 가치들, 예컨대 출신학교나 학력 직업 혹은 직장을 고려하지 않고 성취여부에만 초점을 맞췄다.

    면접대상은 여성 9명, 남성 21명으로 문학(신경숙 오인숙 김용택 곽재구 나해철 안도현), 학문(임지순 이혜원 나종일 김순권 강만길), 예술(황영성 한희원 김용우 전유성 임원식 박광수), 언론(정길화 김어준 장해랑), 사업(김성주 이봉재 박병무), 교육(이혜성 장상 이경숙), 기타(한비야 김지룡 백종열 서진규) 등이다.

    [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워야 하는 이유 ]

    환경적인 변인 중에서 자신이 어느 지역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고 활동했는지가 사람의 능력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텃밭이 된다. 국악을 대중음악과 접목시켜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 잠재된 정서를 새롭게 움트게 하고 문화의 숨결을 호흡하게 도와준 소리꾼 김용우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충북 영동은 세종대왕시절 아악을 정리한 박연의 고향이다. 그 지방에는 박연을 기념하는 음악제 등이 많이 개최돼 김용우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또한 그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도 지역 특성상 국악교육을 많이 했다고 한다(그의 모친 역시 김용우를 잉태했을 때 장구가락 등을 익히고 배운 경험이 있다).

    작가 신경숙씨의 첫 문학적 스승은 자연이었다.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으면 매우 사실적이고 유려하게 묘사된 자연을 접할 수 있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10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그는 줄곧 걸어다녔다. 자연스럽게 사계절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늘 밟고 다녔다. 그때 체험했던 계절의 변화무쌍함이 글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쉰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세계의 문화 속에 통합시켜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화가 황영성씨. 그의 그림들은 무릇 모든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데서 비롯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확인해준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한 번 특선을 하고 우쭐했다가 이후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의기소침해 있던 중 친구 부친의 회갑잔치에 초대받았다. 서향의 초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음식상이 나오는 전형적인 시골 잔치.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그때 본 석양과 초가가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초가지붕과 토담,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여인들. 그 광경이 그에게 깊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초가, 마당 등을 통해 우리민족의 조형성을 알게 됐고 거기에 그의 생각들을 집어넣어 우리마을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출품하여 여섯 번 특선을 하면서 화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마련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는 “가장 위대한 스승은 자연이고 모든 것은 다 자연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는 섬진강변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했고 일을 하며 살아간다. 똑같은 산을 30년, 40년 바라보고 살아도 아무런 부러움이 없단다. 그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움직여야 하는 도시의 유동적인 삶 속에서는 깊이 있는 생각들을 끌어내기 어렵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산이건만 그에게 산은 매순간 다른 얼굴을 한다. 그 속에 살고 있는 동물, 풀잎, 꽃, 나무, 바위를 생각하면 너무나 좋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마을 전체를 사랑한다. 꽃과 산과 강물과 아침저녁 새울음이 다 공부일 거라고 판단하고 그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거나, 대학을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이 고향마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기에 그의 시(詩)는 ‘지었다’가 아닌 ‘썼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의 관념과 생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살면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그냥 썼기 때문이다.

    [ 부모가 믿어주는 만큼 자라나는 아이들 ]

    아무리 훌륭한 교사 100명도, 아무리 유능한 100명의 카운슬러도 한 명의 부모를 따라 갈 수 없다.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부모는 최선의 교사이면 최상의 카운슬러다. ‘광수생각’으로 유명한 만화가 박광수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학교에서 정학을 당할 정도로 말썽을 많이 피웠어요. 저랑 같이 말썽 피웠던 친구들의 부모는 다 포기하시더라고요. 저 애는 원래 저래.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 부모님은 특이하게도 늘 박수를 쳐주셨어요. 지금 한때의 실수고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똑같은 출발점에서 달리기 시작하지만 일단 탈락을 하면 트랙 밖에서 박수를 치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죠. 그러나 저는 부모님 덕분에 다섯 번 여섯 번 다시 뛸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시 뛸 수 있는 용기를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해요.”

    번뜩이는 기지로 유명한 개그맨 전유성씨. 그의 부모도 세상의 여느 부모처럼 자식교육 잘 시켜보려고 노력했지만 기대처럼 공부를 잘 하지 못 하는 자식을 꾸짖거나 실망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전유성씨는 요즘 아주머니들이 사인을 부탁하면서 “거기에다가 공부 좀 잘하라고 써주세요”라는 주문하면 “여기까지 그런 거 쓰면 애 돌아요, 그러지 말아요. 애들한테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으세요?”라고 응답한다고 한다.

    ‘딴지일보’ 발행인 김어준씨는 특이하게도 부모의 완전 방임 속에 자랐다. 자라면서 “공부해라”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게 어린 마음에 섭섭하기까지 했단다.

    “공부를 잘 해도 잘 했다는 말을 안 하고, 못 해도 ‘공부 해’라는 말을 안 하고,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내게 관심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죠. 돈이 필요하면 네가 벌어 쓰라고 하고, 학비도 잘 안 주고, 용돈도 물론 안 주고, 도시락도 잘 안 싸주시고. 그런데 그게 몸에 배니까 무엇을 해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대신 결과도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것을 배운 거죠. ‘딴지일보’ 보시면 아무렇게나 막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거 없는 말은 하지 않아요. 패러디를 해도 있는 사실을 가지고 패러디를 하지, 더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지만, 없는 일을 가지고 패러디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니까요.”

    서울대 물리학과 임지순 교수도 어머니에 대해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간섭은 안하셨어요. 아마 참으신 것 같아요. 제가 부모가 돼보니까 그게 무척 힘들어요.”

    반면에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너희 자녀를 노엽게 말라’ 등 교육서로 많은 학부모들을 각성시킨 우촌초등학교 교사 오인숙씨는 아이들은 ‘사랑’으로 자란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등교 전에 옛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몸이 약한 저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생각하는 바를 글로 써보라고 하셨고 글짓기 대회에 출품해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아버지는 마당에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자연과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딸에게 필요하다 싶은 기사를 스크랩해주셨지요. 부모님은 다툴 일이 있으면 자식들이 듣지 못하도록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싸우셨어요.”

    아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 아울러 부모와 자식 간은 서로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모와 자식의 끈끈한 관계는 특히 자녀들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좌절의 상황을 벗어날 때 큰 힘이 된다.

    인간은 주변의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중에서 자신의 숨은 능력을 알아주는 스승은 한 인간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는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일수록 작은 격려에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현재 하버드대에서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있는 서진규씨(‘나는 희망의 증거이고 싶다’의 저자)는 20대 초반 미국으로 식모살이 취업이민을 떠났다. 꿈의 땅 미국이었지만 미국 군대에서 중령이 되기까지 소수민족 여성이 겪어야 할 애환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충북 제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님의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버텼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어린 진규의 손금을 보면서 “너는 앞으로 성공할 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손금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술집딸로 멸시받던 어린 진규에게 큰 격려가 됐고 ‘성공’이라는 말에 매달렸다. 그는 항상 “지금의 고통은 하나의 과정이고 나중에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신경숙씨도 영등포여상 부설 산업체 야간고등학교 시절 만난 최홍이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정읍 출신인 이 문학소녀는 서울 구로공단에 자리한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향한 자신의 꿈이 실현될 거라고 믿었으나 현실에 좌절했고 무단결석을 했다. 최교사는 벌로 반성문을 쓰게 했다. 대학노트 몇 장에 깨알같이 써낸 반성문을 읽고 최교사는 신경숙의 문학적 자질을 간파해,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로 안내했다.

    일반적으로 진로 상담학자들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진로를 빨리 파악하여 그것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씨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잠재력을 읽어내고 키워준 교사를 만난 것이 행운이다. 이후 그의 안내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준비할 수 있다.

    관념을 깨는 닉스청바지 광고로 유명해진 크리에이터 백종열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존 교육제도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교사라는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다. 내가 할 줄 모르는 것을 시키면서 내가 그걸 잘하지 못한다고 야단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한번도 내가 잘 하는 것을 시켜보지도 않고, 그것을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편협한 잣대만으로 왜 이렇게 못 하느냐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게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시에 있는 패션 인스티튜트 테크놀로지(Fashion Ins titute Technology) 만화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거기서는 토플점수 550점을 요구했다. 당장 담당교수를 찾아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면서 청강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교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재학중 토플 550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내주었다. 백종렬씨는 지금까지도 그 교수의 유연한 사고방식과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화여대 장상 총장은 고3때 담임인 김정호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시절 우수한 여학생은 남녀공학으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여서 저도 서울대 화공과와 이화여대 수학과를 두고 갈등을 했어요. 그런 제게 선생님은 ‘입학할 때의 기분보다는 졸업할 때를 생각해 대학을 정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화여대를 선택했고 선생님 덕분에 저는 교수도 되고 총장도 될 수 있었던 거죠”

    이혜성 한국청소년상담원 원장은 어릴 때부터 똑똑한 언니 밑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고, 스스로 매력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미국 유학중 만난 힙스 교수를 통해 건강한 자아상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할아버지 교수는 나만 보면 사랑스럽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너처럼 사랑스러운 성격이 어디 있느냐, 너는 너 자신이면 된다, 너 같은 딸이 있는 부모님은 얼마나 행복하시겠느냐고 칭찬을 해주셨지요. 그 칭찬 덕분에 스물 아홉 살이 되어서야 ‘정말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됐지요.”

    큰 나무 밑에서 자라는 나무는 죽지만 큰 사람 밑에서 자라는 사람은 더욱 성장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도 결정되는 것이다.

    [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살다 ]

    꿈과 목표는 인생의 돛이다. 창의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는 꿈과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꿈과 목표는 인간의 무한한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결집된 에너지는 가위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시인 곽재구씨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시에 완전히 미쳤지요. 시인이 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시 자체가 본질이었어요. 당시에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개념도 없고 24시간 시만 생각했어요. 하여튼 고등학교 때에는 아침에 해가 뜨는 이유는 내가 시를 써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녁에 별이 반짝이는 것을 봐도 저렇게 많은 별들보다도 내가 써야 할 시는 더 많다, 이런 상징으로 생각했죠.”

    그의 간절한 소망은 대학 4학년 때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이루어진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시 ‘사평역에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의 시집을 냈다.

    이화여대 장상 총장에게는 어린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월남한 후 시골에서 살 때 동네 친구 중에 영자라는 아이와 곧잘 놀았는데 하루는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나는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했고, 영자는 ‘커다란 가게 주인이 될 거야’라고 했죠. 동네 구멍가게는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영자가 그런 꿈을 꾼 건 당연했던 거죠. 30년이 지나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내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우연히 큰 가게에 들어가게 됐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주인 아주머니가 웬지 아는 사람처럼 여겨져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정작 인사를 하고 난 뒤 누구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혹시 만난 적이 없는지 더듬어 보았지요. 어느 곳을 대봐도 신통치 않아서 참 이상하게 생각을 하다가, 내 이름이 좀 특이한데 혹시 ‘장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가 ‘네가 상이구나, 나 영자야’ 하고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영자는 가게 주인이 됐고, 저는 선생이 됐어요.”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고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 아니던가. 장상 총장은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항상 큰 꿈을 꾸어라. 그러면 성취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성주인터내셔널 김성주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성산업 김수근 회장의 막내딸이다. 배경이 말해주듯 그는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가진 자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누군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왜 존재하는가. 틈틈이 이런 실존적인 물음을 하면서 삶의 좌표를 확인해 봅니다. 위로 오라버니가 네 분 계시는데 저와 가장 가까운 오라버니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제 삶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제 존재의 가치를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미국의 작은 하버드라 불리는 암허스트 칼리지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공부가 정말 어려웠는데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의 기로에서 이왕 칼을 뺐으니까 여기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으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지요”

    오지 여행가 한비야씨는 어린시절 세계지도를 펴놓고 지명찾기 놀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반드시 세계일주여행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저는 인간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걸고 한발짝 한발짝 나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여행을 통해 자기만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킬리만자로에서 끝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튼튼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잘 올라가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 힘만 믿고 누가 앞으로 나서면 따라잡으려고 막 뛰어요. 그러다 고산증이 생기지요. 그러나 목표가 확실하면 남이 앞에서 뛰어가는 걸어가든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속도로 가는 거예요. 목표는 사실 정상에 도착하는 거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정상이라는 목표가 확실하면 남들이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하지 않을 여유가 생기는 거죠. 저도 상당히 속전속결형이었는데 킬리만자로를 오르면서 강박관념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어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 그러나 자꾸 남과 비교하다 보면 자신의 속도를 잊어버리고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가 주저앉거나 게으름을 피워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한비야씨는 오지를 여행하면서, 분쟁지역을 육로로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도 많았지만 그 순간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던 일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고 한다.

    육종학자인 경북대 김순권 교수는 옥수수 박사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17년간, 아프리카에 세계최초의 교잡종 옥수수를 보급하여 기아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내가 옥수수에 미쳤어요. 미쳤으니까 전세계에서 제일 가는 옥수수를 만들 자신이 있는 거죠. 미국 농장에 있을 때 너무 열심히 일하니까 인간괴물이라고 했어요. 옥수수 만들려고 태어난 괴물이라고.”

    아이디어는 현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김교수는 100여명의 연구원이 있는 나이지리아 국제 옥수수 연구소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세배 정도 일을 했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찾아간 날도 새벽부터 칠곡 옥수수농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장화에 모자를 쓴 평범한 촌부 차림이었다.

    숙명여대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이경숙 총장도 꿈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꿈 속에서도 그것만 생각하죠. 그러면 분명히 방법이 떠오릅니다. 나한테 어떤 일이 주어지면 24시간 그 일에 매달리는데 그러면 꼭 실현됐어요.”

    창의적 성취를 한 사람들을 대개 자신이 하는 일에 푹 빠져있다. 그래서 일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가 속한 일터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로 ‘일’ 과 ‘사랑’을 꼽았다. 특히 ‘일’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고 자아를 실현한다.

    한국 역사학의 희망으로 불리는 고려대 강만길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공부가 참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으니까 역사책도 많이 읽었지요. 물론 대학에 들어와보니 학문은 재미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도 역사공부를 하면서 지루하다거나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때만 해도 사학과에 역사공부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정치학과나 경제학과 가려다 못가서 왔다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는데 저야 역사공부 하겠다고 대학 갔으니 재미있을 수밖에요.”

    미국 제퍼슨 의대 교수이며 세계적인 간암전문가 이혜원 교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고 한다.

    “환자를 만날 때가 참 좋아요. 환자들의 얘기를 듣고나서 치료로 고통을 덜어줄 수 있잖아요. 치료를 해서 병이 낫는 것을 보면 얼마나 좋은데요. 낫지 않으면 같이 울기도 하고. 진료를 할 때는 30분 일찍 일어나 남보다 먼저 가서 환자와 만나지요. 또 남보다 30분 늦게 퇴근하더라도 환자를 한 번 더 보는 게 좋아요. 퇴근할 때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을 한바퀴 돌면 환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는 미국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고 싶던 혈액과 대신 암연구센터를 택해야 했는데 10년 뒤 가장 유망한 분야로 떠올랐다.

    경희대 정치학과 나종일 교수도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찾아낸 경우다. 그는 학자의 길을 걷기 전 사업가로 먼저 세상을 경험했지만 적성이 아닌 것을 알고 과감히 포기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업을 하다가 그만두었어요. 실패해서 그만둔 게 아니라, 돈이 너무 쉽게, 잘 벌리니까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어요. 사업은 재미없었지만 공부하고 책 읽고 글 쓰는 것은 너무 재미있지요”

    그래서 중도에 사업을 포기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후 학자가 됐다.

    박광수씨는 매일매일 행복한 일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재미 없으면 재미있는 일을 만들려고 노력하고요, 신나는 일이 없으면 신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죠. 술 먹고 싶은데 술 먹을 일이 없으면 술 먹을 일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지 최소한 3시간을 고민해 보라고 하죠. 제 친구들을 보면 남이 맞춰둔 삶의 행복에 자기 채널을 맞추고 살아요. 그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죠.”

    [ 다양한 체험으로 고정관념을 깬다 ]

    인간은 체험이 부족할수록 고정관념의 노예가 된다. 고정관념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주요한 기능인 사고과정을 생략하게 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방해가 된다.

    많이 보고, 참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딴지일보’의 김어준씨는 누구보다 여행을 통해 배운 게 많다고 말한다.

    “배낭여행으로 45개국을 다녔어요. 여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는 미국영화에 길들어서 아랍인이라고 하면 과격한 테러분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데 막상 만나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중동에 대해 나의 시각이 아닌, 미국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처음에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배낭여행이었지만 김어준씨의 안목을 넓히고 성장시켰다.

    그는 또 여행 중에 떠올랐던 무수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겼다. ‘딴지일보’도 그 아이디어 중 하나였다.

    “아테네를 여행하면서 그곳 건물은 모두 다원형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우리가 잘 아는 원형극장 같은 것이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직접민주주의를 하느라고 그랬겠지요.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어, 그러면 그때는 한 사람 한사람이 방송국이었네. 개인이 매체였네’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냥 잊어버렸지요. 몇 년이 흐른 후 재미있는 신문, 나를 표현하는 신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른 거에요. 마침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인터넷이 아크로폴리스가 되는 거죠. 이론적으로는 인터넷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하고 싶어도 방송국이 없어서 못 했는데 이제는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것이 바로 디지털 아테네라고 생각하고 ‘딴지일보’를 창간했죠.”

    인터넷에 미치면서 그가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배울 수 있는 가치로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명제였다. 그에게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든가 “이러이러한 것을 배워둬야 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크리에이터 백종렬씨의 닉스 청바지 광고가 유명해진 것은 도저히 청바지와는 연결될 것 같지 않은 파, 양파, 탱크를 광고에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장치들은 소비자들에게 이 바지를 입으면 편안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것이 적중해 그 해 닉스청바지 매출액은 500억원에 육박했고 처음으로 라이벌 회사를 앞지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당연한 것일수록 의심해보는 것이 습관이 됐다. 어릴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승복 어린이가 정말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을까였다. 친구들과 오징어 놀이(바닥에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하는 놀이)를 하면서도 “야, 이게 어떻게 오징어냐? 오징어라면 다리가 있어야지”라고 끝까지 우겼다.

    우리는 흔히 창의성은 기괴하고 이상하게 사물을 보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사물과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인식하는 것이 창의성의 중요한 축이다.

    ‘나는 일본문화가 좋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를 낸 후 신세대 문화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는 김지룡씨 역시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정하면서 행복이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소위 일류대학에 다니는 친구는 항상 우울해 있었어요. 졸업하면 앞으로 뭘 할까 걱정으로 피곤해 했지요. 애인도 없고, 일본 대기업에 들어가면 승진도 안 되고 출세하기도 힘들다고 하면서. 한편 음악을 하는 친구들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지만 행복하다고 해요”

    로펌 김·장의 박병무 변호사도 나름대로 생산적인 인생여정을 걸어오고 있다. 그는 서울법대 수석입학, 수석졸업의 재원이었다. 부모는 그가 판검사의 길을 택하기 원했으나 그는 법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판검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법고시 합격 후 그는 곧장 하버드 법과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토론식 수업으로 논리를 개발하는 훈련을 받았다.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교수들이 자꾸 말을 시켜요.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동료친구들은 엉뚱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런 것을 계속 반복하고, 거기에 어떤 논리가 뒷받침이 되면 상당히 좋은 이론들이 나오는 거죠”

    어린 시절 학교 밖 활동이 잦았다. 어린이회관에서 실시하는 과학반, 음악반의 활동, 보이스카우트, 신문배달, 바이올린, 영어회화, 시험이 끝나면 입장료가 조금싼 의정부까지 가서 하루에 두세편씩 영화를 보았다. 만화도 섭렵했고 세계문학전집 속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도 만났다. 특히 한국단편문학전집을 두루 읽으면서 인생의 비극적 요소를 이해하려 했다. 음악전집 레코드를 들으면서 음악속의 배경을 마음에 그려보면서 상상력을 키웠다.

    박변호사는 지금도 일을 하다가 막히면 동료변호사들과 함께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어떻게 전쟁을 해서 이 세계를 정복할까를 생각하며 웃는데 그것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다양한 체험이 창조적이고 통찰력있는 생활을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고 고백한다.

    [ 인간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을 만든다 ]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공부해서 남주냐”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남주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남을 위해 하다 보면 그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오는 것이다.

    ‘영산포’라는 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나해철씨는 성형외과 의사이기도 하다. 그는 환자를 볼 때 최선을 다하는 시인의 마음이 된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가 말을 하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껴요. 꽃 한 송이가 말을 해주니까 우리가 시를 쓸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생명처럼. 저는 환자들을 볼 때에도 그런 생각으로 합니다. 환자들이 내 가족처럼 느껴져요. 어쩌다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환자가 울면 나도 당장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파요.”

    의사 나해철은 시인 나해철임을 더욱 강조한다. 시인의 정신으로 환자를 보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나해철,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생명력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성실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온 것 아닐까.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골드뱅크 창립멤버로 벤처업계에 뛰어든 이봉재씨는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제가 아주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행동하는 크리스천이 되려고 해요. 십일조 생활은 잘 못해도 장기기증, 각막기증, 헌혈 이런 것은 앞장서서 해요. 저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형님, 형수님, 집사람 다하게 만들어요. 진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주여 주여라고 찾기만 할 게 아니다라고 말하죠.”

    인간의 가슴속에 다른 인간에 대한 배려나 애정이 생략되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서양화가 한희원씨가 소외당하고 박해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민족미술 운동을 하고 시인 안도현씨가 참여시를 통해 어려운 이들의 삶을 고발한 것은 예술이 인간을 앞설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결국 좋은 인간성과 연결된다. 조각가 최종태씨는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그림을 그린다. 그림도 옳은 그림이 있고 바른 그림이 있다. 좋은 그림은 옳은 그림이어야 하고 또한 바른 그림이어야 한다. 그림은 사람이 그리는 것이고 그 사람됨이 그대로 그림에 반영된다.”

    위에서 언급한 요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요인이 인간의 잠재된 능력을 발현시켜 세상에 유익하게 작용하게 한다. 예를 들어 배우자 형제자매 친구 등의 주변인물, 삶에 대한 신앙적 태도, 사회를 지각하는 눈,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 봉사정신, 천직의식, 자신감, 어려움을 극복하는 즐거움, 외로움을 견디는 힘, 물질을 아끼는 태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풍부한 독서, 건강관리, 시간관리, 도전의식 등이다. 이밖에도 밝혀지지지 않은 많은 요인들이 한 인간이 지닌 잠재력을 발굴하고 개발하는데 기여한다.

    필자는 30명의 창의적 성취를 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분석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도 이 30인처럼 성취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흔히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거나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자칫 아이의 가능성을 죽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떡잎부터 알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떡잎 단계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알 수 없다. 행동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10세 이전의 아동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변화하는 존재이며,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극 받으며 새로운 반응을 하고 창조하는 존재다. 아이들이 가진 흥미, 적성, 개성을 잘 발현하도록 돕고 그것들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단 부모가 됐으면 부모로 성공해야 한다.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 학교공부만 잘 하는 아이로 만드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 세상에 널려 있는 2만2000개의 직업 중 자녀가 신바람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부모가 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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